제47화
“꼬리는 꼬리란 건가, 결국.”
“그런 것 같아. ‘밤의 장막’을 써서 여자의 무의식을 읽었는데 쓸 만한 정보는 영.”
즉답한 레브의 손등에서 일순 푸른 장미가 도드라졌다.
직계의 고유 기술을 쓸 때만 나타나는 현상.
푸르스름한 손등을 레브가 망설임 없이 소도로 그어 피를 냈다.
아물지 않는 녀석의 손등을 흘끗 본 이안은 되물었다.
“살리카나 루하흐, 두 가문에 관한 정보는 아직 없단 거지?”
“어. 밤의 장막을 두 번이나 시도했는데……. 아무래도 다시 시도해 봐야겠어. 무의식의 방어가 강하면 한두 번으로 안 되거든.”
레브는 수정구에 자신의 피로 고대 문자를 써 내려갔다.
그가 읽어 내리는 것을 시각화해 수정구에 비춰주는 술식.
그것을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쓰자 곧 술식이 완성되었다.
츠츠즉.
그 즉시, 투명한 수정구에 푸른 연기가 퍼지며 일렁거렸다.
“송출은 문제없네. 그럼 시작한다.”
레브는 얼이 빠진 여자에게 다가간 후 쪼그려 앉았다.
포개질 듯 가까운 거리.
녀석은 마력을 불어넣은 손을 여자의 관자놀이로 가져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푸르스름한 빛과 함께 손끝에서 바늘이 돋아났다.
“끄으윽.”
바늘이 관자놀이를 뚫자 여자가 눈알을 까뒤집으며 경련을 일으켰다.
기묘한 광경을 이안은 무미건조하게 관망했다.
‘밤의 장막.’
상대의 무의식을 읽거나 세뇌할 수도 있는 기술.
빛에 가까운 치유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지극히 어둠에 가까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언제 봐도 신기하군.’
비늘이 덧씌워진 레브의 손끝이 순간 잘게 떨렸다.
그러자 수정구에 드문드문 어떤 기억들이 맺혔다가 흩어졌다.
가난, 배고픔, 엄마를 따라간 푸른 장미의 저택에서 당한 비참한 일.
여자의 생이 어떻든 이안에게 쓸모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다만.
“이 남자, 중요 인물 같지 않아? 몇 번이나 나오는 걸 보면.”
“나도 동의해. 잠깐만. 저 남자에 대해 더 파고들어 볼게.”
마력을 끌어올리는 건지 레브의 손끝이 더욱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럴수록 팔찌의 중앙 구슬도 선명한 크림색 빛을 내뿜었다.
우우우웅.
기술을 극대화했는데도 남자의 모습은 좀체 뚜렷해지지 않았다.
안개처럼 아른거릴 뿐.
“후우. 이거……. 아무래도 이 이상은 힘들 것 같다.”
넘실대던 빛이 차츰 줄어들며 레브의 손등에 있던 장미 문양도 옅어졌다.
“차단 술식이 걸린 것 같거든.”
“숨길 게 얼마나 많으면.”
이안의 서늘한 말투와 함께 장미 문양이 사그라들기 직전.
<네게 군림할 힘을 주겠다.>
어딘가 모르게 깊은 바다를 닮은 음색이 수정구를 뚫고 나왔다.
“……어?”
둘은 짠 것처럼 수정구에 몸을 바싹 들이밀었다.
아주 희미하게 드러나는 남자의 윤곽.
“이안, 이 남자 동공이 조금…….”
“이거 문양인가? 아니, 그림자가 비친 건가?”
“내가 보기엔 문양 같은데.”
아예 들어갈 태세로 이안은 수정구를 끌어안았다.
더 자세히 살펴보려던 찰나, 삽시간에 남자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
이후론 단주가 된 여자의 악행이 핏물과 함께 재생될 뿐이었다.
거슬리면 때리고, 죽이고, 가난한 아이들을 유흥거리로 삼고, 노예로 팔고.
더는 기억을 읽어봐야 쓸모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안은 그만하란 신호를 레브에게 보냈다.
‘동공에 문양이 박힌 젊은 남자, 라…….’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단서’란 직감이 들었다.
“어떻게든 누군지 알아내야겠다.”
이안은 일어서며 해야 할 일을 천천히 정리했다.
그 후 찬 눈길을 기절한 여자에게 두었다.
쓸모는 다했다.
괜히 살려둬서 분란을 만들 바에야 죽이는 게 최선이었다.
아니, 죽여야만 한다.
저벅.
이안은 냉정한 걸음을 떼며 차분히 여자에게 다가갔다.
* * *
다음날 워프 게이트 초소 앞.
아이루스 상단주는 멀끔한 모습으로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그의 곁에는 발그레한 혈색의 딸이 서 있었다.
백치 상태가 치유되고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레브 덕을 톡톡히 봤네.’
<배신자도 처벌하고 그대의 딸도 구할 방도가 있는데.>
사아악.
이안의 말이 끝나자 레브는 아이 미간의 생살을 갈랐다.
주르륵 흐르는 피.
즉시 레브는 미간에 장미 꽃잎 세 장을 새겨 넣었다.
이후, 부총관의 미간에도 똑같은 작업을 하고선 각각의 문양에 손을 가져다 댔다.
“‘포자 심기’란 기술입니다.”
“포자 심기라면?”
“쉽게 말해, 따님의 증상을 ‘빼서’ 저자에게 ‘심는’ 겁니다.”
침음을 삼킨 상단주는 무거운 낯빛을 하고서도 과정을 지켜보았다.
부총관의 마지막을 잊지 않으려는 것처럼.
사르륵.
꽃잎 문양이 유연하게 굽이치며 허공을 넘실거리다 서로 섞여 들어갔다.
한데 엉켜서 요동치자.
“끄아아앗!”
부총관이 침을 질질 흘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반면 아이의 흐리멍덩한 표정에는 점차 생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딸아이를 살려주셔서.”
상단주는 보들보들한 아이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하마터면 아이와 영영 생이별할 뻔했다.
적시에 나타난 이안의 도움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목숨으로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는데…… 어지러운 상단을 정리해야 해서 이리 떠납니다. 면목 없게도.”
“아닙니다. 언제든 뷔트시겐의 도움이 필요하면 연통을 넣으세요.”
일개 상인에게 이안은 내내 정중했다.
4대 가문의 방계 혈족만 되어도 상단주에게 하대하기 마련인데.
과연 뷔트시겐이다 싶어 상단주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렸다.
좋은 인연은 오래 이어가는 것이 인지상정.
“도련님, 제 미약한 성의 표시입니다. 받아주십시오.”
상단주는 헤르세 모양의 비취 패를 이안에게 건넸다.
이것을 지닌 자는 상단주에 준하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
아이루스에 속한 누구든, 어떤 명령이라도 따라야 한다는 것인즉.
아무나 얻을 수 없는, 상단주가 내보일 수 있는 최대의 호의였다.
“도련님이 아니었으면 저도, 제 여식도 지금쯤 어찌 됐을는지.”
“이마저 거절하면 부담이 더해질 터이니 덥석이지만 받겠습니다. 다만 신의의 상징으로만 간직하겠습니다. 상단주와 나 사이에 맺은.”
“과연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군요. 이토록 훌륭한 도련님에 대해 떠도는 말들이 어찌나 흉한지.”
“하하핫. 그러게나 말입니다. 살리카 몇 좀 팼기로서니.”
“어련히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도련님께서 괜히 죄 없는 사람을 팼겠습니까.”
“암요.”
유들거린 이안은 허리를 굽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이만으로도 왠지 은밀해졌다.
덩달아 상단주도 귀를 쫑긋 세우며 경청했다.
“그러니 나에 대해 상단주가 좋은 소문 좀 많이 내주세요.”
“염려 마십시오. 책임지고 나쁜 소문을 뿌리 뽑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상단주는 호언장담했다.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 뻥뻥 친 연후.
그는 다시금 허리를 숙여 작별을 고하고 워프 게이트를 통과했다.
상단주가 떠난 뒤.
“…….”
뒤를 돈 이안은 눈알을 한 바퀴 굴렸다.
칼브란과 레브, 그리고 기사단까지 전부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뭣 때문에 그러지?
고개를 갸웃하는 이안을 보며 대표로 레브가 중얼거렸다.
“아, 저렇게 알뜰히 써먹는구나. 상단주를 얻자마자.”
다들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소문을 새로 퍼트리는 데는 아이루스 상단만 한 게 없지요.”
“역시 도련님은 무서울 정도로 영악하십니다.”
“우리 편이라 다행이지 남의 편이었어 봐. 어우야, 소름.”
***
상단주란 태풍이 가시고 나자 일상이 잠잠해졌다.
집에 온 지 5일째.
“아이고. 한가하다.”
이안은 이제야 휴식다운 휴식을 취한다, 며 눈을 감았다.
발코니 창을 통해 내리쬐는 달빛이 유달리 포근했다.
겨울잠을 부추기는 온도.
나른함이 절로 스며들고 있는데, 녹스의 방정맞은 목소리가 평온을 박살냈다.
“오오! 이건?”
눈을 동그랗게 뜬 녹스가 칼브란을 보며 히죽거렸다.
뭐가 그리 좋아서 이목구비가 전부 제각각 놀까.
녀석의 괴상함에도 칼브란은 꿋꿋이 은쟁반을 건넸다.
“수호자님을 위해 이 칼브란, 온 마음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뭔가 웅장하게 건네진 것은 책 두 권이었다.
새빨간 양장본.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주는 책은 바로 ‘그 책’이었다.
『아가씨는 왜 시종들의 셔츠를 뜯었나 Ⅱ』
“이건 2권이 아닌가?!”
“예. 이것이 바로 작가가 피를 토하며 써 내려간, 소문의 그 역작이지요.”
“허억. 이 귀한 것을 어찌 구했을꼬오오.”
“아주아주 힘들었습니다. 출간된 지 한 달도 안 돼 벌써 구할 곳이 없었으니까요.”
“푸흘흘. 명품이란 본디 그렇지. 위대한 나처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게다가 이번 2권은 굉장히 특별하답니다.”
“으응?”
“‘음성석’이 포함되어 있답니다. 음. 성. 지. 원.”
“푸흐. 푸흐흐흐흫흘.”
좋아 죽는 녹스, 유능한 집사인 척하는 칼브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둘을 외면하며 이안은 어딘가 모르게 망연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녹스는 평생 모를 것이다.
저 책이 녹스의 손아귀로 떨어지게 된 경위에 대해.
‘내가 저것 때문에 얼마나…….’
《칼브란, 그대의 유능함을 믿기에 부탁 하나 할까 해. 내가 하려는 부탁이 다소 어렵다는 것을 알아. 하나 칼브란이라면 능히 해낼 수 있을 터. 내가 어렸을 때부터 봐온…….
<중략>
……아가씨는 왜 시종들의 셔츠를 뜯었나, 2권을 구해줘.》
쪽팔림을 감수하고 서신을 썼더랬다.
한 지붕 아래 있어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는데도.
차마 대면하지 못하고 칼브란의 방문 밑에 서신을 슬쩍 밀어 넣었더랬다.
그랬더니 글쎄…….
눈물에 젖은 답신 열 통이 되돌아왔다.
《이제 정말 다 크셨습니다, 도련님. 하나 너무 거기에만 정진하시면 기력이 달릴 수도 있습니다.》
‘하아아아.’
그때만큼은 내가 이러려고 회귀했나, 자괴감이 들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쪽팔림은 짧고 녹스의 행복은 길었다.
게다가 이젠 칼브란도 알게 되지 않았던가.
책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이다.
그것을 위안으로 삼은 이안은 가만히 둘을 구경했다.
“혹여 책이 찢어지거나 할 수 있으니, 여분으로 한 권 더 구해놨습니다.”
“오오! 그런 세심한 배려를!”
“도련님과 함께 하는 수호자님을 위한 일인 것을요. 이쯤은 해내야지요.”
“역시 뷔트시겐의 집사장은 다르군.”
“과찬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아, 하나 더.”
“응?”
책의 첫 장을 펼친 칼브란이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자부심이 그득 담긴 손길이었다.
“보이십니까?”
“이거……!!”
“수호자님을 위해 작가의 친필 서명까지 받았습니다. ‘녹스 님에게’라고 말이지요.”
“어쩜 이리 맘에 쏙 드는 일만 할꼬!”
녹스가 꿀이 떨어지는 눈길로 칼브란을 바라보았다.
입안의 혀처럼 구니 오죽 좋을까.
녹스는 집에 온 지 며칠 만에 어딜 가든 칼브란을 대동하고 다녔다.
무슨 행운의 토템마냥.
집착 쩌는 녀석이 성가실 법 하련만.
칼브란은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녹스를 극진히 모셨다.
언제든 전투를 함께 할 아군.
서로가 서로에게 목숨을 맡긴 관계.
정령사와 정령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한 명의 정령사로서 가지는 일종의 헌사였다.
‘우리 도련님 잘 봐 달라.’는 의미가 내포된.
칼브란의 훔훔한 미소를 두고 이안은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기척 없는 그의 움직임을 대번에 칼브란이 잡아챘다.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도련님?”
“아니. 신경 쓰지 마. 레브가 연무장에 있대서 가 보려는 거니까.”
“날이 찹니다. 코트를 챙겨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