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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49화 (49/214)

제49화

‘언뜻언뜻 쓸쓸해 했던 것이…….’

아버지의 모습에서 루하흐 가주의 모습을 엿본 것이리라.

어디 혈육을 잃은 슬픔이 쉬이 가시던가.

예상 못 한 어느 순간에 불쑥불쑥 튀어 오를 터인데.

“레브, 지금 너한테 가장 필요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누구?”

“만나보면 알아. 일단 따라와.”

“어딜 가려고?”

“코르디아 구.”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고 이안은 마차 보관소로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의구심과 호기심이 얽힌 레브의 발걸음이 뒤따라왔다.

다그닥다그닥.

두 사람은 마차에 몸을 싣고 코르디아 구역으로 향했다.

‘코르디아 구.’

소키에타스 제도를 통해 영입된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루하흐는 루하흐끼리, 발리올은 발리올끼리.

마을을 이루며 살아서 총 세 개의 지구로 나뉜 구역이다.

‘그곳에 가면.’

레브는 자신과 같은 푸른 머리와 똑같은 동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질감이 없으니 그들에게 정붙이면 뷔트시겐에 대한 애착도 커질 터.

거기다 이주한 녀석의 가족도 그곳에 있지 않던가.

“코르디아가 슈바츠의 북쪽 끝자락에 있지?”

레브는 말문을 열며 밖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어딜 가나 설원인 풍경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어.”

“생각보다 가깝네”

레브는 자신도 모르게 까닥거리던 손을 말아쥐었다.

터놓고 말하자면 긴장과 근심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나저나 좀 건방져 보이겠다.”

“어?”

“그렇잖아. 난 영입됐으니까 가주님을 뵙고 나면 곧장 코르디아의 촌장님을 만났어야 했는데.”

“아. 이제야 만나러 가니까?”

“응.”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아이루스 때문에 한창 시끄러웠잖아.”

상단의 뿌리가 루하흐였다.

그들이 분탕 치고 다니니 혹 휘말리게 될까 봐 촌장은 마을을 폐쇄했다.

외인의 출입을 금지한 것이다.

이 시기에 맞물려 레브가 왔으니 별수 있나.

만남은 소란이 가실 때까지 보류되었다.

“혹여 뒷말 나오지 않게 미리 서신도 보냈고.”

“이것저것 항상 신세만 지네.”

“신세는 무슨.”

레브는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하는 녀석이다.

“정 부담되면 내가 레브 너한테 빚 갚는 거라고 생각해.”

“빚? 네가 나한테? 그거 반대 아냐? 내가 너한테면 모를까.”

“깊게 생각하지 마. 그런 게 있으니까.”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는 레브를 스쳐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추운 곳에서만 자라는 아케랑코 나무가 빼곡하게 회색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녀석을 맞닥트렸던 지난 생의 어떤 날처럼.

레브 아르데슈.

적이었기에 미치도록 미워했었던 상대.

<또 만났네, 이안 뷔트시겐. 위대한 예언자의 특기신가? 널 만나면 찢어발기겠다는 놈들한테 둘러싸이는 게.>

<…….>

<킥킥. 발발 떠는 쥐새끼 신세가 아주 볼만하다.>

대전쟁 후반, 알란이 죽고 혼자 남았을 때였다.

뒤쫓던 살리카들에게 잡혀 죽을 뻔한 순간.

콰콰콰쾃.

살리카들 수십을 얼음 채찍으로 즉사시켜버린 레브와 조우했었다.

“…….”

제 편을 죽이고 날 살리다니…….

레브의 행동에 이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체 왜?’라는 의문을 들여다보기도 전.

슈슈슉.

물방울로 에워싸진 이안은 회색 숲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뷔트시겐 진영과 가까운 곳.

무려 수십 킬로에 달하는 거리를 녀석은 한 발자국 떼는 것처럼 휘둘렀다.

술식을 강제한 워프 게이트도, 블링크도 아닌 공간 이동.

질투조차 할 수 없게 녀석의 실력은 경이로웠다.

‘그래서 여신이 누군가를 총애한다면 저 녀석일 거라고 다들 떠들어댔지.’

천재(天才).

레브는 이 수식이 가장 잘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덕분에 덕을 보고 목숨을 건진 건 이안 자신이었고.

‘사람 인연이 참 묘하네.’

과거를 잇는 아케랑코 나무를 이안이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히이잉.

말의 투레질 소리로 보아 목적지에 도착했나 보다.

퍼뜩 생각의 파편을 털어낸 뒤, 이안은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카르디아 구역 내 루하흐 마을 초입.

희뿌연 안개가 사위를 메워서 코앞의 사물 빼곤 뵈는 게 없었다.

저벅저벅.

불투명한 시야를 뚫고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 * *

“역시 촌장 그대가 직접 마중 나왔군.”

이안의 말에 응답하듯 누군가가 허리를 숙였다.

푸른 두건으로 얼굴을 꼼꼼히 덮은 복장.

어딘가 음울한 기색의 촌장이 손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마을로 들어가자는 의사 표현.

말문을 열지 않는 촌장을 보며 레브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한데 잠깐 스친 단정을 반박하듯 촌장이 곧 말문을 열었다.

“마을에 들어서면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우선 그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금속을 긁는 것 같은 촌장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어쩐지 인위적이라 위화감이 들었다.

레브는 슬쩍 이안을 쳐다봤지만, 녀석은 덤덤했다.

문제가 있다면 저런 반응을 보일 리 없겠지.

껄끄러움을 뭉갠 레브는 ‘알겠습니다.’라고 답을 했다.

그가 느낀 의구심을 눈치챈 듯.

안심하라며 이안이 레브의 어깨를 쥐었다가 놓았다.

이러는 동안 안개가 끝났고, 그곳에는 장대한 석벽이 있었다.

그 석벽의 입구를 통과해 마을로 들어서자 아르데슈 가 사람들이 보였다.

“오빠! 레브 오빠!”

환하게 웃으며 레브를 부르는 일곱 살 남짓한 여자아이.

꼬마를 꽉 끌어안는 레브의 표정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여행자 같달까.

편해 보였다, 진심으로.

가족들과 해후한 레브가 재차 촌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떠난 후.

이안은 녀석을 기다리려 일단 정박해 있는 곤돌라에 자리 잡았다.

배에는 바둑판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 마을의 모든 것이 레브에겐 낯선 듯 익숙하겠어.”

“예. 하지만 금방 적응할 겁니다. 가족과 마을 구경을 가는 낯빛이 그리 어둡지 않은 것만 봐도.”

“하긴. 꽤나 밝더군.”

“그럴 밖에요. 뷔트시겐에서 배를 탈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요.”

“옛 선대들이 공을 들였지. 영입한 인재들을 향수병으로 잃을 순 없으니.”

이안은 바둑판에서 눈을 떼고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쏴아. 쏴아아.

파도치는 소리와 짭조름한 소금기.

물 위에 뜬 가옥들.

루하흐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눈과 설산뿐인 뷔트시겐에선 쉬이 볼 수 없는 풍광이었다.

“까놓고 말해 금화를 쏟아부은 만큼 충성도는 높아졌고, 그게 뷔트시겐의 전력이 되지 않았나.”

“그렇지요. 염치란 게 있다면, 저희를 위해 노력한 뷔트시겐을 어찌 배신하겠습니까.”

“그럼 된 거지. 뱃놀이가 즐거우면 뭐.”

“가만 보면 도련님은 참 특이하신 분입니다. 두 달 전, 아는 사람 몇 없는 바둑을 가르쳐달라 찾아온 것만 봐도.”

“단기 속성이 필요한데 그대만큼 훌륭한 스승은 없잖나.”

“몇몇의 상인들에게서 배운 제 실력이 제법 출중하긴 하지요. 그래서 일부 귀족들이 제게 사사하기도 했고.”

‘그분 역시 제게 배웠었는데……’라고 촌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쓸쓸함이 묻은 손길로 그는 하얀 돌을 바둑판에 내려놓았다.

말이 영입이지, 자신의 뿌리를 옮긴다는 건 사연이 있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런고로 이안의 바둑 스승은 회한이 많은 자였다.

그의 쓸쓸함에 이안의 말투가 달래는 것처럼 둥글둥글해졌다.

“이제 그런 추억을 레브와 나눌 수 있지 않나.”

“그 또한 가주님 덕분입니다. 그분이 절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도련님 덕분입니다.”

“내가 뭘 했다고.”

“너무 많은 일을 해주셔서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지요. 이 늙은이 은혜를 갚기 위해선 목숨을…….”

“됐어, 됐어.”

“하지만…….”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대처럼 늙은 목숨은 필요 없어. 얼마나 산다고.”

이안은 검은 돌을 놓고 건성건성 손을 흔들었다.

“남은 나날 동안 레브와 회한이나 털어내. 괜히 은혜 갚겠다고 버둥거리지 말고.”

“말씀은 퉁명스러워도 모두 절 위한 것임을 압니다. 고맙….”

“아, 내가 이래서 바둑 스승만큼은 박대하게 된다니까. 걸핏하면 고맙다고 허리 굽히지 말래도 말을 안 들어.”

“이렇게 베풀고도 생색내지 않는 도련님을 뵐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또 무슨 엉뚱한 소릴 하려고?”

“도련님은 결핍을 알기에 인정이 많으신 분이란.”

“…….”

“감히 불손하게 도련님을 전부 헤아리겠냐 만은. 어쩌면 이런 과정 또한 운명일지도.”

촌장은 바둑판을 아주 오랫동안 응시했다.

하얀 돌과 검은 돌이 얼기설기 맞물려 있었다.

흡사 운명의 실타래인 양.

가끔은 어떤 뜻이 있다고 믿재도, 때때로 운명은 너무나 비정하고 모질었다.

그가 겪어내야 했던 그 사건처럼.

“이젠 운명을 자아내는 여신을 탓했던 과거를 버리려 합니다. 도련님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졌으니 말입니다.”

“하려거든 나 말고 레브 그 녀석을 위해 해. 난 해줄 사람 많거든. 인기인이라서.”

“하여튼 도련님 넉살은 못 말리겠습니다.”

“아, 바둑은 그만둬야겠군.”

이안이 보는 곳으로 촌장의 고개가 돌아갔다.

가족을 만나 좋았던 건지, 루하흐를 그대로 옮겨 놓은 마을이 좋았던 건지.

다소 상기된 채인 레브가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저 촌장이 가만히 보고 있자 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가봐. 어느 날 그대의 악몽에 나온 것처럼 레브가 허상은 아니니까.”

“꿈이 아닌 걸 알지만…….”

“레브 저 녀석, 간혹 쓸쓸해하더라고. 새로운 가족이 아무리 잘해줘도, 친구가 많아져도.”

“…….”

“그 허한 마음 달래줄 수 있는 건, 그대뿐이겠지.”

벌떡 일어난 촌장은 다급히 몸을 움직여 레브에게로 다가갔다.

그런 뒤 몇 마디를 건네곤 자신의 거처가 있는 중앙의 건물로 데려갔다.

사라진 레브의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오후의 하늘은 무척이나 청명했다.

“목숨 빚 한번 거하게 갚네.”

* * *

이안은 시원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런 연후 바둑판의 중앙에 검은 돌을 놓았다.

혼자 바둑을 두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안녕하세요, 이안 형.”

웬 꼬맹이가 친한 척 인사를 하는 통에 더는 바둑을 둘 수 없었다.

바둑판에 그림자가 져서 시선을 돌린 이안은 눈썹을 꿈틀했다.

‘이 녀석.’

열 살 남짓한 푸른 머리카락의 남자아이.

혈관을 그대로 비추는 창백한 피부를 가진 소년.

“……발렌티노 아르데슈.”

레브의 동생이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발렌티노가 이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곤돌라가 얕게 출렁거렸다.

“형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래?”

“엄마랑 아빠가 엄청 얘기하거든요. 형에 대해서. 레브 형이 보내준 편지가 올 때마다.”

“에헴. 녀석이 날 형처럼 따르며 존경해서 자주 얘기하나 보네.”

“아닌데? 형이 제일 좋아하는 건 난데?”

발렌티노는 반박하며 커다란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자 동공이 푸른 보석을 잘게 쪼갠 것처럼 반짝거렸다.

“이건 비밀인데…… 형은 내가 웃으면 우울하다가도 기분이 풀려요.”

“오, 그건 몰랐네.”

“형한테 제일 중요한 건 나거든요.”

발렌티노가 우쭐거리듯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홉 살다운 풋풋한 허세.

이에 싱긋 웃은 이안은 발렌티노의 머리카락을 엉클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부스스해지자 녀석이 머리통을 흔들어댔다.

‘이 녀석 말대로긴 하지.’

가족을 잃은 레브는 두 번째 가족인 아르데슈를 끔찍하게 아꼈다.

자신의 목숨보다 우선순위에 둘 정도로.

이것이 결국 지난 생의 레브에게는 족쇄가 되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살리카 가주에게 굴종해야 했으니 말이다.

찰박찰박.

몸을 기울인 발렌티노가 손을 오므려 바닷물을 담아냈다.

“그래서 걱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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