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50화 (50/214)

제50화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

“형이 나를, 아니, 우리를 위해서 싫은 걸 참았을까 봐서요.”

“싫은 것?”

“응. 형은 루하흐라는 것에 자부심이 대단하거든요.”

“자부심 정도가 아니라 그게 레브 그 녀석의 전부지.”

“맞아요. 근데 우리가 위험할까 봐 루하흐를 버렸잖아요.”

발렌티노는 또다시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었다.

“엄마, 아빠가 쉬쉬해도 난 다 알아요! 이제 아홉 살이니까!”

왠지 덜자란 병아리가 벼슬을 자랑하는 것 같은 몸짓과 말투.

풋풋한 허세가 발아하려고 꿈틀대고 있었다.

아이고. 귀엽다, 귀여워.

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어 이안의 눈가가 접혔다.

‘레브가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되는군.’

이 녀석을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던 거였다.

레브의 선택.

사실 선택이라지만 길이 하나밖에 없는 강압이었다.

어린 남매를 살려야 했으니까.

‘거기엔 죄책감이 아주 큰 몫을 했지.’

레브가 지닌 자질 때문에 저들의 가족이 몰살당했으니까.

직계의 고유 기술인, 다중 치유술과 밤의 장막.

직계들 가운데 이 두 가지를 전부 개화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밤의 장막은 한두 세대에 하나 꼴로 나타난다.

그러니 살리카 가주 입장에선 레브가 굴러들어온 행운이었다.

이것을 잡기 위해 그자가 어떤 행동을 했을까.

‘아르데슈 가 자체를 몰살시켜 버렸지.’

딱 두 명, 발렌티노와 여동생만을 남기고서 말이다.

살았으되 죽은 것과 진배없는 몰골로 만든 후에.

숨만 붙어 있도록 마력핵에 구멍을 내고선 인질로 삼은 것이다.

이후 둘은 구멍을 메꿀 마력을 불어넣어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해서 동생들을 살리려 레브는 원수의 발밑을 기어야 했다.

“……형, 이안 형.”

찐득찐득한 과거를 비집으며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반 박자 늦게 답한 이안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환기하려는 몸짓.

발렌티노의 눈이 커진 걸 보니, 지난 생의 기억에 너무 깊이 매몰되었던 것 같다.

찰랑.

겸연쩍어진 이안은 상체를 숙인 뒤 손을 물에 담가 양껏 떴다.

그러고는 발렌티노를 향해 잽싸게 뿌렸다.

피하지 못한 녀석의 발치에 얕은 물웅덩이가 생겨났다.

“발렌티노.”

“응?”

“꼬맹이의 의무는 재밌게 노는 거니까, 어른들 사정은 쪼금만 헤아려도 돼.”

“그치만…….”

“레브 걔가 얼마나 고집쟁인데. 싫은 건 절대 안 해. 때려죽여도 말이야.”

“진……짜?”

“그렇다니까. 이건 비밀인데…….”

이안은 가뜩이나 낮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절로 집중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터라 발렌티노는 몸을 수그렸다.

“레브가 먼저 뷔트시겐으로 옮기고 싶다고 했어.”

“……정말로?”

“매일 날 괴롭히고 징징거리면서 얼마나 볶았는데.”

“우리 형이 그랬다고?”

“이 꼬맹이가 속고만 살았나. 존경하는 날 닮고 싶다고 네 형이 귀에 피고름 나게 말한다니까.”

“헤헤. 형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가 보다.”

짐을 덜어낸 듯 발렌티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없는 말을 지어낸 이안의 낯짝은 반들거렸고.

[하다 하다 이제 아홉 살짜리에게까지 사기를 치는 것이냐?]

아마 녹스가 따라왔다면 그런 타박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칼브란의 붕어 똥이 되어 이안을 개밥 취급하고 있지만.

“그나저나 형이 늦네.”

발렌티노의 웅얼거림에 이안의 시선이 중앙 건물로 옮겨 갔다.

* * *

건물 안으로 들어선 레브는 묵직한 공기에 몸을 굳혔다.

촌장처럼 푸른 두건을 두르고 있는 자들.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비장함이 공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거기다 얼굴을 가렸다는 건 정체를 숨긴다는 뜻.

“…….”

풀어졌던 레브의 마음이 긴장으로 여며졌다.

마을 구성원의 약 1할 정도가 이런 자들이었다.

‘얼굴을 가리면 위장하기 쉬워 위험 요소가 될 텐데, 가주님은 왜 그냥 두셨지?’

의문이 든 그 순간.

쿠웅.

촌장이 무릎 뼈가 나가겠다 싶을 만큼 무릎을 꿇었다.

그런 뒤 가슴팍에 왼손을 얹고선 그 위에 오른손을 직각으로 얹었다.

의미 없는 동작 같지만 루하흐로선 최고의 예였다.

주군과 반려에게만 하는 행위였으니까.

촌장은 그대로 상체를 숙여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했다.

떨리는 그의 등.

잇따라 두건을 쓴 자들 모두 똑같은 동작을 하며 엎드렸다.

“촌장님 왜 제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 건 저인데.”

“흐윽.”

촌장의 억눌린 울음에 레브는 당황하고 말았다.

대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아야 대처할 거 아닌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 이 애송이가 신입이야?’ 그런 눈빛이더니.

“……시온, 시온 도련님.”

“……?!”

“도련님.”

촌장의 부름에 무언가를 직감한 레브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려왔다.

아까와는 너무도 다른 목소리.

그러나 아득한 기억 한편의 뭔가를 끄집어내는 듯한 음색.

“불충한 가신이, 시온 도련님을 뵙습니다.”

촌장이 연거푸 정중하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풍파에 찌든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많이 섞여 있었다.

그렇대도, 설령 귀가 문드러져도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음색이었다.

“데클……렌?”

“예. 주군을 지키지 못한 자가 치욕스럽게도 목숨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진짜…… 데클렌?”

“이렇게 도련님을 다시 뵙게 될 날이 올 줄은…….”

촌장은 굽은 허리를 천천히 폈다.

몇 번이나 휘청이던 그는 간신히 상체를 바로 했다.

그런 뒤 즉각 두건을 풀어 얼굴을 드러냈다.

“…….”

레브가 가진 기억보다 주름이 더 자글자글하고 노쇠했다.

강인함은 사라졌지만, 목숨을 구해준 가신을 잊을 리가.

참변이 있던 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자신을 빼돌리고 아르데슈까지 데려간.

“수호검인 데클렌 지그마링.”

“……불충한 가신이, 루하흐의 온당한 후계자를 뵙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레브는 뜨거운 덩어리를 삼키느라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데클렌은 그에게 죄책감의 상징이었으니까.

“그날, 그날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르데슈에 도착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아버지의 자리를 훔친 숙부가 눈이 벌게져서 그를 찾는데 말이다.

쉼 없이 달려드는 추적자들.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데클렌은 혼자서 아르데슈를 빠져나갔다.

흔적을 지워주는 바다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레브와 데클렌이 같이 있으면 꼬리가 잡힐 수밖에 없기에.

어떻게든 루하흐 가주의 관심이 아르데슈로 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여 전신에 피를 흘리면서도 데클렌은 어둠을 뚫고 홀로 떠났다.

뻔히 죽을 자리로.

“날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도 붙잡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무섭고 두려워서 붙잡지 못했다.

같이 있다간 발각될 것 같아서 그리 했다.

꾸우욱.

레브는 시큰한 눈두덩이를 긁듯이 눌러 눈물을 잠재웠다.

과거의 자책에 빠져 터트리는 울음은 데클렌에게 모욕이 될 뿐이다.

데클렌에게 생사가 중요했으랴.

주군의 명을 수행하는 것이 수호검의 오롯한 명예라 말하는 자인데.

<데클렌, 그대를 믿네.>

그걸 아니, 아버지도 짧은 한마디에 신뢰를 담아 그를 맡겼으리라.

‘그런 자인데.’

중요한 것은 데클렌이 살아 눈앞에 있다는 것인데.

그저 죄책감에 젖어 과거를, 아무 말 못하고 데클렌을 배웅했던 그때를 되풀이할 뻔했다.

레브는 마음을 담아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버지의 명을 훌륭히 수행한 촌장님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게 존대하시면 안 됩니다.”

“전 아르데슈 가의 차남일 뿐이고, 소속을 바꾼 제게 상급자는 촌장님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제발 말씀을 편히…….”

“혹 폐가 되지 않는다면 다른 분들의 얼굴도 볼 수 있을까요?”

레브의 깍듯한 요청에 데클렌은 얼른 뒤로 돌아 눈짓을 보냈다.

도련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게 하냔 호통.

애꿎은 화풀이에 두건 쓴 자들은 서둘러 두건을 풀었다.

“!!”

드러난 얼굴들은 뭉개지고, 불에 지져지고, 베인 자국들이 그득했다.

하나 같이 전부.

그들을 훑어보는 레브에게 데클렌이 있는 그대로 사실을 고했다.

“가주님을 끝까지 따르던 자들입니다.”

“…….”

“배신자를 따를 수 없기에 반기를 들었으나 보다시피…….”

“원하는 것을 쥐게 된 숙부가 가만둘 리 없지요.”

“예. 가까스로 도망친 자들을 뷔트시겐 가주님께서 거둬주셨습니다.”

“아.”

“그분은 가주님의 벗이었단 이유로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지요.”

“정말 많은……, 많은 빚을 졌네요.”

가주뿐 아니라 이안에게도.

레브는 눈알이 뻑뻑해져서 거칠게 문댔다.

<궁금하네. 레브 네가 ‘그들’을 만난 후에도 복수자로 남을지, 아니면…….>

능글맞게 웃던 이안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복수자.

누가 죽든, 누가 희생되든, 지금의 루하흐 가주에게 살풀이만 하면 되는 처지.

솔직히 이건 쉽다.

목숨을 무모하게 던지면 언젠가 가주란 바위를 깰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건 따로 있지.’

‘아니면……’이란 말이 붙는 그다음.

복수는 하되, 아버지를 따랐던 자들을 이끌고 원래 자신이 되었어야 할 루하흐의 지도자로 남는 길.

이건 목숨이고 나발이고 모르겠다며 들이박기만 해선 얻을 수 없다.

끊임없이 인내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고, 때로는 적마저 설득시켜야 하니까.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어찌 모르랴.

이안이 원하는 게 후자라는 것을.

데클렌과 추방자들을 만나고 나니 절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망할 자식!

레브는 허리를 곧추세우고선 또렷하게 속내를 토해냈다.

“전 여러분에게 가주의 남은 핏줄이었단 이유로 이런 대우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

“여러분의 충심도, 말을 편히 하는 것도 후일로 미루겠습니다.”

후일.

“제 힘으로 가주를 끌어내고, 제가 온당한 자리를 차지한 그 날. 그리고…….”

“…….”

“그대들이 반역자란 오명을 씻는 그 날. 그날 여러분의 충심을 온전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진 저에게 예를 갖추지 마세요.”

“역시…… 그분의 핏줄답게 기개가 넘치십니다, 도련님.”

감격에 젖은 데클렌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남은 자들 또한 상체를 굽히며 눈을 빛냈다.

‘어째 말이 먹힌 거 같지 않네.’

왠지 레브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란 예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말만 하면 이들이 허리를 굽힐 것 같다는.

* * *

“레브는 어떤 선택을 하려나?”

이안은 먼저 마을을 벗어나, 초입에 세워 둔 마차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러고는 마차에 등을 기댄 채로 레브를 기다렸다.

어스름한 저녁 하늘.

완전히 밝지도,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어느 경계선.

묘한 정취를 바라보며 이안은 이곳에 레브를 데려온 목적을 곱씹었다.

첫째는 녀석의 헛헛함을 채워줄 동족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명백한 선의였다.

다만 이 마음에 약간의 계산도 들어가 있었다.

‘솔직히 데클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니까.’

그를 포함한 ‘추방자들’을 말이다.

전대 가주를 따른다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은 자들.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 레브는 결단코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혼자 복수하겠다는 고집을 부리지는 못할 터.

이것이 방문의 두 번째 목적이며, 이안의 진짜 속내였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면 좋겠지만 결국 선택은 녀석의 몫이니까.’

현재로선 어느 쪽도 장담할 수는 없다.

레브의 마음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

저벅저벅.

답을 주려는 것처럼 단호한 걸음이 안개를 뚫고 이안에게로 향했다.

“맘을 정한 것 같네. 발소리에 망설임이 없는 걸 보면.”

“망할 놈.”

“결론은?”

“그 망할 놈이 원하는 대로지 뭐.”

“호오? 그 망할 놈은 땡잡았네.”

“내가 언젠가 땡잡았다 생각하는 놈의 뒤통수를 꼭 치고 만다.”

“하하핫. 조심해야겠는데?”

시원한 이안의 웃음이 공기 중으로 산화했다.

허술한 듯 헐렁한 듯.

저리 보여도 레브는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었다.

저 머리통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지.

아버지의 수호검이었던 데클렌, 자신, 루하흐 가주.

루하흐가 아닌 자들이 보면 분명 따로일 것이 명백한 가닥들.

이것들을 이안은 하나의 실타래로 엮어냈다.

‘이 녀석은 정말.’

이럴 때마다 똑같은 열다섯 동갑내기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를 해결할 때 머리를 쓰는 것도 그렇고.

적을 처리할 때 인정을 두지 않는 냉혹함도 그렇고.

이안은 노상 초로의 노인 같은 기색을 풍겨댔다.

‘하여튼 희한한 녀석이야.’

“이안 뷔트시겐.”

“어?”

레브는 이안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아직은 녀석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녀석은 제가 가야 할 길을 차근차근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마치 여행자를 인도하는 북극성처럼.

이렇듯 앞서 걷는 녀석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면.

“시작은 너의 의지였을지라도 지금부턴 내 의지대로.”

결연한 의지가 깃든 목소리와 몸짓.

레브는 가슴팍에 왼손을 얹고선 그 위에 직각으로 오른손을 얹었다.

그런 연후 허리를 굽혔다.

현재, 이안에게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이었다.

“나 시온 루하흐는 죽을 때까지, 이안 뷔트시겐에게 신의를 다할 것입니다.”

맹약이었다.

이안이 심장을 겨눠도 흔들림 없이 믿겠단.

“…….”

레브의 맹약에도 이안은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페르나를 깨고 난 직후와는 다르군.’

그때 레브가 손을 내민 건 필요에 의한 거였다.

신뢰하지 않아도, 최악보다는 차악이 낫단 심정이었으리라.

완벽한 자의는 아니었던 셈.

그러나 현재, 이곳에서의 선택은 오롯하게 레브의 자의였다.

동등하게 벗으로서 건네는 약속.

진실한 마음에는 진실한 대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안은 똑같은 자세로 상체를 정중히 숙였다.

“이안 뷔트시겐 나 역시, 신의를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이로써 아슬아슬했던 동맹은 굳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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