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51화 (51/214)

제51화

이안이 코르디아 구역에 있던 그 시각.

“수호자님을 위해 디저트를 준비했습니다. 에이셔의 우유로 만든 눈꽃 빙수지요.”

“에이셔의 우유?”

가주의 집무실 탁자에 앉아 있던 녹스는 꼬리를 풍차처럼 돌렸다.

에이셔.

욕 나오게 추운 곳에서만 살 수 있는 젖소였다.

신기한 체질 탓인지 우유가 열 배는 고소하고 설탕보다 달았다.

무언가를 첨가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완성품이란 의미.

“고걸로 만든 빙수가 뷔트시겐의 특산품이라지? 인기도 많고.”

“예. 셋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이지요.”

“오호? 이안한테 말만 들었는데. 한 번 맛보자꾸나.”

녹스의 거만한 허락이 떨어지자 칼브란이 차가운 은쟁반을 내려놓았다.

냉기가 폴폴 새는 접시.

그 위에 놓여 있는, 크리스털 잔에 소복하게 담긴 빙수.

빙수는 산딸기만 듬뿍 얹어져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이 되어 있지 않았다.

치장 따위 없어도 맛에 자신 있다는 얘기였다.

녹스는 기대감에 침을 꿀떡 삼키며 빙수를 입안 가득 넣었다.

혓바닥에 퍼지는 달콤하고 새콤한 감각이 퍽 짜릿했다.

“오호, 오호. 이거 정말…… 천국의 맛이로구나.”

극상의 우유 맛에 눈이 풀린 녹스가 연신 히죽거렸다.

준비한 사람이 보람을 느끼게 하는 반응이었다.

어찌 흡족하지 않을까.

눈가를 접은 칼브란은 집무에 매진 중인 가주에게도 빙수를 건넸다.

“가주님, 드시고 하십시오.”

“자네도 들게. 남만 돌보지 말고.”

시중만 드는 칼브란에게 가주가 넌지시 권했다.

그의 권유에 칼브란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릇을 받아들었다.

사이좋게 빙수를 나눠 먹는 나른한 오후가 유유히 흘러갔다.

츄릅.

빙수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녹스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아쉽다는 듯 날름거리길 여러 번.

어렵사리 그릇을 내려놓은 녹스는 미련을 버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이안이 돌아올 시간이군.”

밖이 잠잠했다.

뷔트시겐의 겨울은 눈 폭풍이 가시질 않는데, 며칠 전부터 날이 얌전했다.

너울너울 조용히 나리는 눈을 구경하길 한참.

녹스는 이안의 행보를 짐작해보는 양 말문을 열었다.

“이안 그놈, 루하흐를 손에 쥐게 되었어.”

다소 뜬금없고 이해할 수 없는 서두였다.

하나, 그런 행간을 붙들고 대화를 이어가는 건 가주의 몫이었다.

칼브란은 귀가 있고 입이 있어도 의사를 표하지 않기에.

“마치 이안이 흑막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오, 흑막! 의뭉스러운 그놈에게 딱 맞는 말을 잘 골랐네.”

“하핫. 중요한 건 이안이 평생의 지기를 얻었다는 것이지요.”

“퍽 낭만적인 견해로군.”

“설령 루하흐를 손에 쥐지 못해도 뷔트시겐은 강합니다. 그 사실을 이안도 모르지 않을 겁니다.”

“…….”

“그렇기에 저는 가주로서 이 상황을 판단하기보다 아비로서 판단하려 합니다.”

“아비의 마음이라.”

“신념을 나눌 벗을 만나는 것은 아주 귀한 행운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하니 축복해주고 싶습니다.”

“실은 나도 그편이 더 맘에 든다네. 괜히 전대 가주의 핏줄을 얻은 것에 대해 계산하기보다.”

녹스는 창밖에서 가주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가주는 몇 분만 쉬어도 눈덩이처럼 부는 집무에서 손을 뗀 지 오래였다.

심지어 깃펜까지 놓고선 대화에 한껏 집중하고 있었다.

저러니 팔불출 소리 듣지.

“한데 말일세. 참 그래.”

“뭐가 말입니까.”

“어찌 그놈은 매사 뭐든 터놓지 못하고 뒷주머니를 챙겨놓는지. 하다못해 벗을 얻고자 할 때조차도.”

“흠. 9할의 진심과 1할의 계책이 뒤섞이는 것만큼 최고의 수는 없다지 않습니까.”

“그러하지. 이안이 주로 사람을 대할 때 쓰는 방법이고.”

9할의 진심과 1할의 계책.

꺼내 보인 진심의 크기에 묻혀 약간의 계산쯤은 보이지 않게 된다.

설령 보인다 할지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고.

“지도자로서 최고의 자질이기도 하지.”

“그렇지요. 더구나 타고 나야 하는 것이라 교육으로도 가르칠 수 없지 않습니까.”

가주가 이안에게 놀란 점은 이것이었다.

성장이 빠르네, 그런 단순한 것들로 감탄을 한 게 아니었다.

마력핵이 없을 땐 몰랐던 아들의 자질.

그것을 알아채고 난 후론 기쁘면서도…… 어느 한 편으론 심장이 무지근해졌다.

핵 없이 보낸 이안의 15년이 새롭게 읽혔기에.

차라리 아무 재능이 없었다면 모를까, 그간 얼마나 괴로웠을지.

곱씹을수록 미안함이 커졌다.

하지만 그가 자책하는 것은 이안이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기에.

“……아비로서 그저 기뻐하려 합니다. 그 아이가 가진 자질에 대해.”

“크흠. 이안 그놈이 우려먹을까 하지 못한 말이나…… 아주 난 놈이지. 내게 있어 최고의 제자이며 결속자일세.”

“수호자님의 극찬은 더없는 영광이지요. 이안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커흐흠.”

녹스가 과한 헛기침을 뱉으며 날개를 퍼덕거렸다.

제자를 아끼는 스승이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기는 쑥스러운가 보다.

“이안에게는 비밀이네.”

퉁명스럽게 사족을 다는 걸 보면.

그렇다 할지라도 아끼는 마음이 어디 갈까.

가주는 짧을 다리를 비비 꼬는 녹스에게 눈길을 고정했다.

볼이 발간 수호자나 자신이나 서로의 동공에 비친 표정은 비슷할 것이다.

이안이 자랑스럽다는 낯빛.

어느새 녀석은 자신의 자리를 자신의 힘만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못된 망둥이들이 시기나 질투는 할지라도 깎아내릴 수 없도록 견고하게.

어찌 기특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여 이안을 지켜보는 일이 가주는 퍽 즐거웠다.

* * *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했다.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뷔트시겐에 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 째.

이 말인즉슨, 이제 에루리안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난 안 가련다!]

헤어지는 뒷모습은 아름다워야 하건만.

[싫다아아아아앗!]

녹스가 꽈악, 그야말로 꽉 칼브란의 팔을 잡고 놓지 않았다.

[이렇게 충직한 놈을 두고 내가 어딜 간단 말이냐!]

절절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녹스는 머리통을 격하게 내저었다.

아침엔 욕실 가득 뜨뜻한 물을 받아놓고 깨워주지.

낮엔 유리 정원에서 작은 연주회나 연극을 보여주지.

저녁엔 빨간 책에 곁들일 디저트를 매번 바꿔서 준비해주지.

칼브란의 지극정성에 녹스는 홀려버렸다.

황제 같은 생활을 하다가 자급자족의 삶으로 돌아가라니.

[여기 살 것이다! 하루하루가 달달 했는데! 막 콧노래가 나오고 즐거웠는데!]

“…….”

[내가 여기 있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놈을 데려가련다!]

녹스는 인자한 표정의 칼브란에게 매달려 버둥거렸다.

제발 같이 가 다오!

녀석은 질기게 떼쓰며 칼브란의 팔에 덕지덕지 콧물을 묻혀댔다.

아무리 녹스가 울며불며 애원한들.

어차피 헤어져야 하는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냉정한 이안은 개의치 않고 아버지와 작별을 나눴다.

“가보겠습니다.”

“그래. 주말에 또 보자꾸나.”

푸석푸석한 느낌이 날 정도로 건조하고 담백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이안도, 가주도 알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어떤 오해도 없는 부자 사이에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음을.

대화를 끝낸 이안은 워프 게이트의 마법진 위에 섰다.

“아, 도련님.”

그때 칼브란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이안을 불러세웠다.

“에루리안 상단과 연관된 젊은 남자 말입니다. 동공이 특이했던. 그자에 관해선 계속 조사해 보고 있습니다.”

“아직 특정된 건 없는 거지?”

“예. 정보를 얻게 되면 바로 도련님께 연통 드리겠습니다.”

“어. 수고해.”

이안은 칼브란과 아버지를 번갈아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응답하듯 두 사람도 마주 웃어주었다.

그 모습을 끝으로 이안의 시야는 검은색 포말을 남기며 점멸했다.

몇 시간 후.

워프 게이트에서 워프 게이트로 멀미 나게 이동한 결과, 저녁 참에는 에루리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고. 줄곧 앉아만 있었더니 온몸이 뻣뻣하다.”

녹색 육륜 마차에서 내린 이안은 뻐근한 뒷덜미를 문질렀다.

엉덩이에 땀띠 날 정도로 앉아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목을 주무르는 이안의 곁으로 레브가 나란히 섰다.

녀석은 새삼스럽다는 듯 에루리안의 전경을 훑어내렸다.

“왠지 에루리안이 새로워 보인다.”

“아……. 그 느낌 뭔지 알 것 같다.”

“이안 너도 그래?”

“방학 끝나고 처음 여길 봤을 때, 그때 그런 느낌이었지.”

공감하는 이안의 모습을 말끄러미 보며 레브는 입꼬리를 푸들댔다.

입이 근질거렸다.

꼭 해주고 싶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이안, 데클렌이 헤어지기 전에 해준 말이 있는데 말이야.”

“어?”

“아버지의 유지였대.”

“뭐가?”

“날 아르데슈로 보낸 것도, 에루리안에 입학시킨 것도.”

“잠깐. 여기 온 게 네 아버지의 뜻이었다고?”

“응. 신기하지. 근데 더 신기한 게 뭔 줄 알아?”

“뭐가 또 있어?”

“아버지도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밀서’를 그대로 데클렌에게 말한 거래. 이유는 모르고.”

“……밀서.”

말을 곱씹는 이안을 두고 레브는 먼저 걸어갔다.

“조금 웃긴 생각인데…… 이안 널 만나게 하려는 거다,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어.”

“…….”

“실없는 생각이지. 그냥 신기해서 하는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신경이 쓰였다.

그것도 뒷골이 찌릿할 정도라 이안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저만치 멀어지던 레브와 올리브가 뒤돌아보았다.

“이안, 안 가?”

“……어? 어, 가야지.”

기숙사로 가는 내내 이안은 머리통 빠개지게 골몰했다.

밀서.

뷔트시겐에만 있는 줄 알았던 것이 루하흐에도 있었다.

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남긴 것일까.

그리고 그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

[이안, 상념이 많아 보이는구나.]

기숙사로 돌아온 지 1시간.

석상이라도 된 듯 꼼짝 않고 생각에 잠긴 이안에게 녹스가 슬금 말을 걸었다.

녀석이 저러는 건 아마 레브의 말이 걸려서겠지.

[밀서 때문이냐?]

“어느 가문에서나 밀서란 게 내려올 수 있는 거긴 한데…….”

[내용 때문이겠지?]

“어. 에루리안으로 보내란 내용이 흔하진 않을 테니.”

특히 직계를…….

뒤처리를 안 한 것처럼 뭔가 찜찜한 건 그 때문이었다.

비슷한 의도를 담은 데다 하필 동 시간대인 밀서가 존재한다?

확률로 따지면 개미가 코끼리가 될 가능성만큼 희박하지 않을까.

“녹스, 혹시 아는 거 뭐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없다.]

녹스는 꽤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뷔트시겐에 밀서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널 통해 알았으니.]

“날 통해? 황제가 몇 날 몇 시에 수프를 몇 번 떠먹었는지까지 안다는 수호자가?”

[쯔읏. 일부러 누락시킨 것처럼 그쪽으론 아예 정보가 없으니 원.]

“그것참 이상하네.”

[나도 황당하다. 정말 중요한 거라면 이리 백지상태일 리 없는데.]

“흐음. 일단 이것에 대해선 차차 알아봐야겠어.”

그러기 위해 이안은 첫 번째 서랍을 열어 편지지를 꺼냈다.

끄적끄적.

편지지를 채우는 깃펜의 매끄러운 움직임 따라 어느샌가 글자가 빼곡하게 채워져 갔다.

잘 도착했다.

이제 아버지와 함께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하니 아쉽다.

주말이 되면 레브와 올리브, 두 녀석을 데리고 또 찾아뵙겠다, 등등.

시시콜콜한 얘기지만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서술했다.

그런 연후 서신 말미엔 ‘밀서에 관해 자세히 알아봐 달란’ 내용을 잊지 않고 적었다.

수호검이었던 데클렌이라면 뭔가를 더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롯하게 그의 기억에 의존해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루하흐의 밀서에 대해 아는 자가 데클렌 뿐인 것을.

이는 정보를 획득할만한 통로가 한정적이라는 거였다.

‘아무래도 많은 정보를 얻긴 힘들겠군.’

이런 실정이니,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풀어내려면 시일이 걸릴 성싶다.

거기까지 결론이 나자, 이안은 밀랍 인장을 찍으며 생각의 파편 또한 접어버렸다.

시일이 걸리는 일에 조바심 내봐야 효율성이 떨어지기만 한다.

골만 아프고.

“……아.”

생선뼈처럼 목구멍에 걸리는 일을 정리했기 때문일까.

“밀서 때문에 깜빡하고 있었다.”

이안은 의구심 때문에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후려치듯 낚아 올렸다.

“아직 여독도 안 풀렸는데 또 뭘 하려고?”

“아, 그게 아니라 칼브란이 녹스 너한테 주라고 눈꽃 빙수를 챙겨줬거든.”

“칼브란 그 충직한 놈이 또! 푸흘흘.”

감동한 녹스가 양팔을 파닥거렸다.

이대로 다시 뷔트시겐으로 날아갈 기세였다.

그리 좋을까.

이안은 서둘러 칼브란에게 받은 사각의 가죽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가방에 꽂힌 녹스의 초롱초롱한 기대.

그 열렬함을 한껏 받으며 빙수를 꺼내던 순간이었다.

녹스의 입에만 빙수가 들어가는 꼴은 절대로 못 보겠다는 듯.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불퉁하게 울렸다.

두어 번 짧게.

들리지도 않을 진동이 퍼지더니 곧장 물음이 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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