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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52화 (52/214)

제52화

“내가 들어가도 되나?”

창틀 위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검은 물체.

남쪽의 관리자이며 검은 소인 로르였다.

시도 때도 없이 제집인 양 막무가내로 들어오더니만, 웬일로 문을 두드렸을까.

“그냥 들어오면 되지 새삼스럽게 묻긴.”

“나는 ‘객식구’이니 예의를 차리려는 거다.”

찰나를 스친 의문은 뚱한 로르가 책상에 안착하는 것으로 손쉽게 풀렸다.

녹스나 사냥개에게 치근덕대지도 않고.

궁둥이를 실룩대지도 않고.

로르다운 행동을 하지 않는 건 곧, 삐졌다는 신호였다.

역시나.

“다들 광이 나는군. 얼굴이 번질번질하니 개기름도 흐르고. 뷔트시겐의 공기가 엄청 좋았나 봐?”

“푸흘흘. 말해 뭐해? 설산의 공기가 어찌나 달짝지근하던지.”

눈치 좀 챙기지.

그런 거 따위 애초에 없다는 듯이 녹스가 떠벌렸다.

“그 맛을 한 번 보면 크으으.”

“나 빼놓고 신났나벼?”

로르의 얼굴에 서운함이 덕지덕지 얼룩졌다.

따돌리고 싶어 따돌렸나.

데려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그랬지.

이 이상 로르가 엇나가기 전에 이안은 얼른 변명을 주워 삼켰다.

“로르 너도 알잖아. 관리자는 그라나토스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흥.”

이안은 재게 가죽 가방, 그러니까 냉기가 장착된 아공간을 열었다.

아공간엔 에이셔로 만든 눈꽃 빙수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그중 산딸기가 가장 많이 들어있는 빙수.

소담한 그것을 집어 든 이안은 공손히 로르 앞에 내려놓았다.

“짜아안. 너 주려고 가져왔지.”

“……나?”

“특. 별. 히. 냉기가 어린 아공간까지 주문 제작했다니까. 널 위해서.”

“날 위해……. 흠흠. 눈꽃 빙수는 차게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지.”

“그러니까. 어서, 어서 먹어 봐.”

“이안 네 성의가 그렇다면 친구 사이에 거절할 수 있나.”

로르의 삐짐은 유려한 언변에 빙수처럼 사르르 녹아버렸다.

이를 증명하듯, 녀석은 못 이기는 척 빙수 그릇을 꽉 끌어안았다.

……잘 먹는다.

로르가 폭풍 흡입하자, 이안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행이었다.

서운한 일이 생기면 밤새도록 한 말 또 하고, 또 했을 텐데.

단순한 놈에게 집념이 장착되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보여주는 게 로르지 않던가.

어렵사리 난관을 극복한 이안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사이.

“흐음.”

빙수를 해치운 로르가 그릇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런 뒤 탐색하듯이 방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번엔 또 뭘 하려고?

의혹 어린 시선에도 로르는 새침한 얼굴로 어슬렁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녹스가 좋아하는 간식거리가 나열된 책상을 시작으로.

언제든 먹으라고 상시 채워놓은 사과 상자를 지나.

말로의 탑 형태로 지어진, 폼나는 사냥개의 집을 거쳐.

아무리 굴러도 다치지 않을 푹신한 러그가 깔린 방바닥까지.

죄 꼼꼼히 둘러본 로르는 대차게 콧방귀를 뀌었다.

“……쳇.”

두것들 물건밖에 없다.

이 코딱지만 한 곳에 뭘 이리 줄줄 늘어놨는지.

“자랑질하는 것도 아니고.”

결속 안 한 정령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말은 툴툴거리면서도 팩팩 뿜어대는 콧김에는 부러움이 매달려있었다.

그래서일까.

입술을 삐죽 내민 로르는 비어있는 왼쪽 구석탱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에 내 둥지 하나 둬야겠다.”

“뭐?!”

로르의 수상한 움직임을 쫓던 녹스가 새되게 외쳤다.

무슨 개소리냐는 뜻.

분명 알아들었을 텐데, 로르는 딴청 피우며 발굽을 꼼지락거렸다.

“날 그렇게 좋아하니 같이 살아주겠단 거다.”

“같이 살겠다고오오오오?”

“히히. 감격스럽지? 그래도 너무 기뻐하진 마.”

“허어어어.”

녹스가 뒷목을 잡고서 뒤로 넘어갔다.

졸도인 듯 졸도 아닌 졸도.

녹스의 의식이 깜박깜박하는 동안 밤도 깊어져 갔다.

* * *

녹스가 정신을 차린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어딘가 낯익은 광경을 또다시 맞닥뜨렸다.

로르가 들이닥치고 나면 으레 벌어지는 광경 중 하나.

허리에 양손을 얹은 녹스가 사냥개에게 뭔갈 주입하는 장면이었다.

“자, 졸개 1호! 따라 해봐라! ‘로르 타도!’”

[크륵?]

“지금 네가 해맑게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크르륵?]

“아이고, 이놈아. 로르의 등급이 카르디아 3성이야, 3성! 그런데 너는?”

녹스가 자신의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사냥개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게 퍽 답답한 모양이다.

“넌 페이라조 3성이 되었단 말이다. 저 개미 똥구멍보다 하찮은 결속자와 결속을 하는 바람에.”

[크르르륵.]

“졸개 너도 알 것이다. 본래라면 정령이든 정령사든 등급이 1성 이상 차이 나면 결속 못 한다는 것을.”

차가운 현실을 알려주겠다는 양 녹스는 설교를 시작했다.

“그게 원칙이라, 원래 카르디아였던 네놈과 이안은 결속을 할 수 없지. 절대.”

[크르륵. 크륵!]

“대들긴.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네놈은 예외였지. 수문장과 알의 주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결속이 가능했으니.”

한마디로 ‘유일’인 셈.

“그럼 따져보자. 이안이 훅 커서 정령을 하나 더 영입할 수 있을 때, 똑같은 암흑 정령이면 카르디아가 낫겠니? 페이라조가 낫겠니?”

[…….]

“어? 이제 냉정한 현실이 보이느냐? 너로서는 로르를 막을 방도가 없단 말이다.”

녹스의 날조와 선동에 충격을 먹은 모양이다.

사냥개의 머리통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짠한 몰골에도 앞뒤 따질 상황이 아닌 녹스는 음침하게 주절거렸다.

“하나, 그렇게 실망할 필욘 없다. 졸개 네놈이 로르보다 나은 게 있으니까.”

[캬앙?]

“그래, 바로 고거! 그 귀여움!”

[컁!]

“고거다, 차갑기가 설산 닮았다는 뷔트시겐의 장로들까지 녹인 고 귀여움!”

녹스의 피 터지는 열변에 사냥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면 되냐는 행동.

이에 녹스는 목뼈 부러지도록 고개를 주억거렸다.

“등급? 재능? 다 필요 없다.”

[컁컁.]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건 오롯 외모다. 예쁘고 귀여우면 장땡이지!”

흥분한 녹스의 얼굴이 잘 익은 고구마가 되었다.

저러다 터지겠다.

“그럼 이제부터 너만의 병기로 무엇을 해야 할까?”

[캬아앙?]

“무조건 이안 저놈을 꾀어야 한다. 로르 그것이 들러붙지 못하게.”

알았냐며, 녹스는 사냥개의 머리통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참, 조오은 거 가르친다.

이안은 녹스의 일장연설을 다 듣고 나선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무래도 어제 먹은 빙수가 제대로 상했나 보다.

맛이 가도 저렇게 맛이 갈 수 있나.

안 되겠다 싶어 이안은 어린 양을 구제하기 위해 사냥개를 불렀다.

“코르키, 이리 와.”

녹스 옆에 붙어 있다간 나쁜 물 옮을라.

이안의 염려를 아는 것처럼 사냥개가 그의 발치에 찰싹 달라붙었다.

“저 쉰내 나는 녀석 곁에는 가지 마. 너도 상한다.”

명심하겠다는 듯 애교 많은 사냥개가 머리통을 이안의 종아리에 비볐다.

참 포실포실하다.

보드랍게 비벼지는 사냥개의 은색 털.

그 은색에 서서히 아침 햇살이 얹히자 이안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에루리안의 모든 것들이 활동한 시간이었다.

‘음. 이 시간쯤이면…….’

슬슬 나가봐도 될 것 같았다.

가늠을 끝낸 이안은 책상에 놓인 차 상자로 눈길을 고정했다.

일순간 냉랭함이 어렸다.

그러나 곧 허상인 양 나른함을 풍기며 차 상자를 챙겨 기숙사를 나섰다.

슬기로운 아카데미 생활을 위해선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 * *

차 상자를 들고 찾아간 곳은 교수들의 연구실이 있는 텔로미어 관이었다.

목적지는 기드온 연구실.

이안은 문을 두드린 후 차분하게 들어섰다.

행동은 직계의 품위를 드러낸 채 우아하게.

표정은 기드온 교수를 존경하는 양순한 제자인 것처럼.

무엇하나 기드온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을 태도를 유지하며, 이안은 소리 나지 않게 소파에 앉았다.

‘찾아뵙겠다.’라고 미리 알렸던들.

여태껏 교류가 없었던 탓에 갑작스러운 방문이긴 했다.

하여 기드온은 옅은 의문을 드러내며 이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인 일이지?”

“아, 직접 뵙고 드려야 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내게 말이냐?”

“예. 교수님만을 위한 것입니다.”

이안의 말투에서 어떤 은밀함이 풍겼기 때문일까.

그를 좋아하지 않는 기드온이라도 눈두덩이가 실룩거렸다.

직계가 주는 것, 그것도 공짜 선물인데 마다할 리가 있겠는가.

근엄한 척하려 애쓰는 기드온에게 이안은 가지고 온 차 상자를 내밀었다.

“아버지께서 드리는 약소한 ‘친교’의 선물입니다.”

“뷔트시겐 가주님이?”

재차 퍼덕거리는 기드온의 눈가에는 기쁨이 서렸다.

윗사람과 줄 대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정이 극명하게 엿보였다.

뷔트시겐 가주가 주었다고 하면 설령 먹다 남긴 뼈다귀라도 덥석 받을 위인.

그게 기드온이었다.

“최상등품 아케랑코입니다.”

“호. 아케랑코라면 뷔트시겐에서만 나는 허브차가 아니더냐.”

“예. 그중 첫 수확 날에 딴 어린 잎은 매우 귀하지요. 이것만큼은 ‘친밀한 지인’과만 나누는 풍습이 있고요.”

“어린잎이라면 마력량뿐 아니라 지배력마저 늘려준다는?”

그 귀한 것을 기드온의 배 속에 버릴 순 없었다.

그래서 어린 잎을 가장한 묵은 잎을 새것처럼 교묘히 꾸몄다.

어차피 뷔트시겐이 아니면 미세한 차이를 잘 모를 테니.

사기꾼인 이안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토해냈다.

“예. 이 귀한 차를, 기드온 교수님께‘만’ 드리라 하셨습니다.”

“흠흠.”

“감사 선물이지요. 교수님께서 늘 저에게 신경 써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드리는.”

“크흐음. 교육자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거늘.”

침 떨어지겠다. 좋아 죽으면서 아닌 척하긴.

기드온은 별거 아닌 듯 무심하게 차 상자를 열었다.

술 속 초입에서 나는 상쾌한 냄새가 났다.

절로 누그러지는 심상 따라 그는 차향을 들이켰다.

“향기가 아주 좋구나. 약차라 그런지.”

“기드온 교수님께선 이것을 복용치 않아도 이미 강하시지만.”

이안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고, 속살거림에 가까워졌다.

“이것으로 작은 성취가 덧대지길 바라겠습니다.”

“크흠. 크흐흠. 제자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그럼요. 덕을 갖추신 기드온 교수님께서 그럴 분이 아니지요.”

“이안 네 성의를 봐서라도 잘 마시마.”

“다 드시면 미리 언질을 주십시오. 또 드리겠습니다.”

“어흠흠. 뒷일까지 이리 세심하게 신경 쓰다니. 이안 너도 참.”

“그럼…… 바쁘신 듯하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점잔 떠는 기드온에게 웃어 보인 뒤 이안은 뒤돌아섰다.

교수실을 나서며 연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삐걱대는 소리에 기대어 차를 타는 부스럭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비죽 웃은 이안은 문을 닫고 복도를 걸었다.

느른한 그의 발자국 위로 소곤대는 녹스의 말소리가 덧대졌다.

[이것이면 된 것이냐?]

-어. 기드온이 차를 마시면 ’추적진‘이 몸 안에 새겨질 테니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이제 놈의 위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겠구나. 하나 위치를 알게 되는 것으로 끝날까. 귀엽고 위대한 내가 짠 술식인데.]

-암요. 이제부턴 기드온이 수작을 부리면 알기 쉽겠지요.

[고렇지. ’강한 살의‘에 반응하도록 술식을 강제했으니 말이다.]

-스승님 덕분에 수월해졌습니다. 원체 음흉한 놈이라 안전장치가 필요하던 차였는데.

[방심하지 않는 건 좋은 자세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아버지의 이름까지 팔아 준비한 선물.

이만으로, 기드온은 차를 혼자 독식하려 들 것이다.

자신을 옥죌 목줄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욕심이 덫이 되어 자신을 태우는 격.

‘만일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슬기로운 아카데미 생활을 위해선 응당 필요한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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