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A반의 시선이 멈춘 곳, 거기에는 폰투스가 있었다.
숲의 정경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티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그리고 그녀의 뒤로 친위대 열 명이 도열해 있었다.
각 잡힌 그들과 여유로운 폰투스.
달그락.
폰투스는 다르질링을 한 모금 들이켠 후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습네.”
“멜러니 이대로 지켜만 볼 거야?”
“흥미롭기도 하고.”
얼핏 보기에 폰투스는 지금 사태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시큰둥한 그녀의 얼굴로 인해 안달 난 건 친위대를 제외한 A반들이었다.
“그것들을 밟을 좋은 기회 아냐?”
“지금을 놓치면 영영 C반 것들을 모시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고.”
“어차피 이 과제를 하는 동안엔 무슨 일이 벌어지건 처벌도 없잖아?”
처벌이 없다.
이 사실이 명료하게 머릿속에 각인된 A반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어떤 손실도 없이 다시 우위를 점할 절호의 기회니까.
“더 생각할 게 뭐 있어?”
“그러게. 이러다 학점까지 뺏기면? 우리만 뭣 되는 거야.”
주절거리던 A반은 일제히 어미 새를 보듯이 폰투스를 응시했다.
수 초?
짧은 침묵 뒤, 간절한 눈빛들에 답하는 양 폰투스가 머리카락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서로 반목할 필요는 없지만…….”
“…….”
“A반이 A반다운 품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겠지.”
“……그럼 멜러니, 그냥 까도 돼?”
은은한 미소.
폰투스의 미약한 몸짓에 A반 모두가 숨통이 트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소는 허락, 차가운 표정은 불허.
이번은 무엇을 하든 허락하겠다는 의미였다.
“야, 근데 깐다고 까지겠냐? 이안이 있는데.”
“후우. 골치네. 그 자식, C반 것들 있는 곳이면 귀신같이 나타나던데.”
“갠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니까.”
속은 팔팔 끓었지만, A반은 공포심을 어쩌지 못했다.
분기와 화도 종내엔 이안으로 귀결되고 있었으니까.
답이 없었다.
오합지졸의 무리에게 폰투스는 은근슬쩍 방향을 제시했다.
“동맹을 맺는 건 어때?”
“동맹?”
“B반과 한 편이 되면 위험 부담이 덜할 거야.”
“…….”
“아무리 강해도 다수를 상대로 승리를 쟁취하긴 어렵겠지. 누군가를 지키기도 버거울 테고.”
“아!”
“그럼 과제를 하기 쉬워지지 않을까?”
온전히 과제를 위한 방편이라는 것처럼 폰투스는 말을 우회했다.
그녀의 의도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랴.
묘책을 얻은 A반은 신이 나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오오, 진짜 괜찮은 생각인데?”
“빨리 B반을 만나러 가야겠다.”
“잠깐, 잠깐. C반을 처리하고 난 뒤엔? 학점을 나눌 순 없잖아. 그건 어떡할 거야?”
“쓸모없어지면 B반도 처리해야지. 당연한 거 아냐?”
흥분한 무리를 바라보다가 폰투스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잔에 가려진, 교묘히 한쪽만 올라간 입술.
어쩐지 조소인 듯한 표정이 잔 끝에 은은하게 머물렀다.
물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찰나였을 뿐이지만.
* * *
“무슨 소리 안 났어?”
올리브는 숲을 거닐다 주변의 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왠지 그라나토스가 평소보다 조용한 것 같았다.
유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칼바람 소리.
콧구멍으로 들이치는 으스스함에 올리브는 곧장 건틀릿을 문질렀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다.
“내가 예민했나 보군. 다른 반이 공격하러 온 줄 알고.”
“나도 쫄리긴 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일방적으로 터졌으니…… 야, 올리브.”
“응?”
“근데 너 말투가 왜 그 모양이냐. 지금 이안 따라 하냐?”
“캬캬캬. 티 났어?”
“완전. 개소름 돋았다. 팔뚝에 닭살 돋은 거 보이냐?”
“쫌 있어 보일라 했더니 역시 안 되것다. 이안의 말툰, 목소리가 나직해서 멋지던데.”
“네가 하니까 존나 느끼이한 아저씨 같다.”
서로 킬킬대느라 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무른 탓일까.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 사실이 벌어진 목구멍을 찔러오자, 노란 머리 소년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올리브, 이안이 ‘에윙클 호수’에서 보자고 한 거 맞지?”
“응. 작전을 짜고 움직여야 한다고.”
“그럼 좀 더 빨리 움직이자. 다른 반이 조용한 게 아무래도 영 찜찜하…….”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사그락.
눈을 밟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여어. 우리 자랑스러운 C-반 놈들 아닌가.”
건들건들한 투로 A반이 맞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의 살리카, 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B반 다섯도 있었다.
저것들이 행동을 같이 한다고?
올리브 무리는 믿을 수 없어서 어리벙벙해졌다.
A반 놈들이 누구던가.
힘의 우위를 철저하게 가르며, 자신들의 입지를 과시하는 놈들이었다.
그러던 것들인데, 자신보다 아래인 B반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협력을 한다고?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왜, 과제 하고 계셨어?”
“상관하지 말지.”
“오, 다 컸는데? 말대꾸도 하시고.”
“네가 키워준 거 아니거든. 비켜.”
“버러지들이 깝치는 꼴하곤.”
“아무래도 주제를 알려드려야겠다. 등급 좀 올랐다고 유세 떠는 것들한테.”
미리 합을 맞춘 모양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올리브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험악한 기세였다.
누구 하나 곧 죽일 기세였고.
* * *
이안은 기드온 교수와의 면담을 마치고 에윙클 호수로 향했다.
새로운 장소에 막 당도한 참.
“무슨 일들 있었어?”
그를 맞이한 건 먹구름이 잔뜩 낀 아이들의 기색이었다.
너무 우중충해 왜 그러나 싶어, 이안은 레브를 쳐다보았다.
돌아가는 사정을 묻는 눈짓.
이에 레브가 이맛살을 잔뜩 구기며 상황을 설명했다.
“과제를 하기도 전인데, 예상대로 A반 것들이 지랄을 떨어대더라고.”
“A반만?”
“아무래도 작정한 것 같더라. B반까지 연합해서 쌍으로 덤비는데 방법이 있어야지.”
“흐음.”
“평소엔 지들 잘난 맛에 사는 것들이라 겸상도 안 하더니. 하아아.”
“그러게. 재밌는 선택을 했네.”
C반이란 공통의 목표가 생기자 결성된 연합.
이안은 좋지 못한 상황에도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과제를 받기 전부터 어느 정도는 예측했던 거였으니까.
‘포식자로 살았던 놈들이 현재 우위를 잃었으니.’
이럴 때 취할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납작 엎드리거나, 아니면 역공하거나.
‘……마냥 순순히 포식자 자리를 내놓지 않겠다는 거군.’
기회가 생기자마자 연합을 한 걸 보면 말이다.
그것들이 선택했듯, 이안으로서도 지금이 가장 중요했다.
무슨 짓을 하든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니까.
뭔가를 결심한 이안의 검푸른 동공이 번들거렸다.
유리알 같은 반지르르함.
이안을 내도록 보고 있던 레브가 의식을 잡아채듯 말을 건넸다.
“걔들이 붙어먹었다고 순순히 당할 순 없잖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보자.”
“하하핫. 붙어먹는다는 말 너무 찰떡인데?”
“웃지만 말고.”
“일단, 다친 사람 있어?”
이안의 물음에 아이들은 ‘아니’라며 열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습공격을 받은 것치곤 생채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특히 올리브는 평소보다 더 살가죽이 탄탄해 보였다.
“하나도 안 다쳤지. 잡것들을 보면 무조건 튀라고 이안 네가 그랬잖아.”
“괜히 뼈 상하게 맞는 건 손해라며.”
“맞아. 복수는 언제든 할 수 있다고 그랬지.”
“정 안되면 쪽수로 밀어붙여 갚아주면 된다고. 그런 복수도 비겁한 거 아니라고.”
“수련 때마다 하도 들었더니 몸이 자동 반응하더라.”
“너도 그랬냐? 나도 싸우는 척하면서 무조건 튀었다.”
“큭큭. 죽자고 덤비던 그것들이 황당해하는 표정을 이안 너도 봤어야 하는 건데.”
한 방 먹여서 좋은가 보다.
어느새 아이들의 얼굴에선 먹구름이 걷혀있었다.
“부상자도 없고. 그럼 이제부터 대책 회의를 해볼까?”
“연합을 찢어발길 확실한 방도가 필요해. 그 얍삽한 새끼들을 찢어발길.”
레브는 아까부터 화가 많은 상태였다.
과거의 경험 때문인지, 자신의 울타리에 둔 누군가를 건드는 것에 민감했다.
“연합한 그것들이 날뛰어서 우리가 된통 당해봐. 어떻겠어?”
“우릴 괴롭히려고 연합이 계속 유지되겠지.”
“그러니까 다신 그딴 짓거리 못 하게 후려쳐야지.”
과제 기간은 이틀.
밤을 새우며 진행되는 터라, 그동안 A반은 연합을 이용해 C반 괴롭히기에 주력할 것이다.
A 학점이야 본인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이렇듯 힘에 도취 된 자들이 취할 방식은 하나뿐이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궁지에 몬 후, 쥐가 지치면 그때 사냥을 하겠지.
저들이 그렇다면 이를 역이용하면 될 터.
계획이 정립되자 이안은 반들반들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려면 다 함께 개고생 좀 해야겠는데?”
“다 함께 개고생?”
“어차피 저것들, 채집조 몇을 빼놓고 나머지는 계속 우리 꽁무니를 따라다닐 거 아냐.”
“아아, 꼬리 달고 산책 다니자고?”
“어. 일단 시작은 그렇게 해서…….”
이안과 레브가 입을 뗄 때마다 아이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안 한 번, 레브 한 번.
번갈아 보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회의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우리는 X 빠지게 도망치고, 저것들은 X 빠지게 쫓아오고. 재밌겠다. 크크큭.”
이안의 심술궂은 작전에 C반은 와하하 맞장구를 쳤다.
계획이 세워지자 몇몇 아이들은 정령을 불러냈다.
아직 페이라조 1성인 아이들은 발목을 돌리며 뛸 준비를 했고.
“다들 조심해.”
레브는 몇몇 루하흐들과 본진에 남았다.
혹 부상자가 생길 시 치료하려면 고정된 위치가 필요하단 판단 때문이었다.
“다치면 재깍 본진으로 돌아오고.”
“알았어. 걱정하지 마.”
“진짜 위험해지면 정해진 대로 신호탄을 쏠 거야.”
이미 신호도 정했다.
도망칠 상황이 아닐 땐 마력을 공중에 쏘아 ‘C’를 만들기로.
그러면 이안과 올리브가 재깍 도와주기로 했다.
“가자.”
이안의 한마디에 몇몇씩 뭉친 아이들은 그라나토스로 흩어졌다.
페이라조 1성을 보호하기 위해 2성을 적절히 섞었다.
각자 할 일 하러 떠나고 남겨진 본진.
레브는 지급된 과제 상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잘돼야 할 텐데…… 다치는 애들 없이.”
* * *
몇 시간 후.
이안은 그라나토스를 매끄럽게 가로질렀다.
더는 연합조가 쫓아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도 충혈된 눈알을 번득이며 매섭게 추격하더니.
현재는 약속이나 한 듯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도 돌아가 볼까.”
어떤 상황이든 밤이 되면 본진에 모이기로 했다.
마력이 고갈되기 전 휴식을 취하며 보충해야 하니까.
“신호탄도 안 올라왔고, 다친 녀석들도 없는 것 같고.”
마력이 달린 아이들은 낙오되면 연합의 먹잇감이 된다.
그래서 이안은 경호 겸 정찰을 위해 마지막까지 남았다.
혼자서 에윙클 호수로 가고 있었던 이유.
“다들 잘 버텼네.”
도망치는 것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친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다.
페이라조 1성조차도 잘 버텨냈으니 말이다.
타닷. 타다닷.
재게 움직였더니 에윙클 호수 근처였다.
호수의 푸른 빛은 어느덧 껌껌해진 사위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빛이 진해질수록 목적지에 가까워진다는 의미.
“후우.”
이안은 이동에 사용했던 마력을 가다듬으며 걸음을 늦췄다.
결코, 서두는 법 없는 걸음.
이는 여유로움을 드러내는 한 방편이었다.
C반 녀석들이 자신을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안정감을 주려는 것이다.
다 잘 될 거다.
말로 전하지 않는 다독임 같은 거랄까.
하여 점점 더 배부른 사자의 걸음새를 취하고 있는데.
“……이안님.”
봄볕처럼 나긋한 목소리가 이안의 걸음을 잡아챘다.
그로 인해 느릿느릿하던 속도마저 완전히 정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