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55화 (55/214)

제55화

“……멜러니 폰투스.”

“오랜만에 뵙네요, 이안님.”

“그런가?”

“휴식기가 끝나고 처음 뵙는 거니까요.”

이안은 갑자기 등장한 폰투스를 유심히 살폈다.

화사한 미인은 오늘따라 청초했다.

호수에서 새어 나오는 빛과 달빛이 만난 어느 지점에 교묘히 서 있었으니까.

“미인 중 최고는 달빛 아래 서 있는 미인이라더니.”

“예?”

“못 들었으면 말고.”

“후훗. 이안님은 짓궂으시네요.”

폰투스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볼에 어린 홍조가 달빛을 타고 보드랍게 넘쳤다.

어딘가 달짝지근해진 분위기.

폰투스는 눈가를 둥글게 접으며 귀밑 머리카락을 넘겼다.

“실은 이안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 몰래 찾아왔어요.”

“도움?”

“예. 지금 연합 때문에 힘드시잖아요. 이안님 혼자 채집하고 C반까지 지키며 고군분투하느라.”

“다 같이 힘든데 뭐.”

“그렇긴 하지만…….”

폰투스가 말꼬리를 흐리자, 이안은 채집한 케르도스 한 묶음을 흔들었다.

어룽지는 검은 잔상.

그것을 쫓는 폰투스의 모습에 이안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다시피 과제도 잘 되고 있고.”

“수월하시다니 천만다행이지만, 지금 연합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나 보군.”

“예. 이러다간 C반이 과제를 완수하겠다 싶었는지, 차라리 과제 상자를 닫아버리잔 의견이 나왔어요. 그래서…….”

“알만하군. 상자가 닫히면 과제를 더는 수행할 수 없으니.”

과제를 위해 주어진 상자.

부정과 비리를 막기 위해 고안된 이 마도구는 열고 나면 절대 닫아선 안 된다.

닫으면, 잠금 술식이 발동돼서 담당 교수 이외에는 열지 못하니 말이다.

‘실컷 쥐몰이 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거네.’

그래서 폰투스가 찾아온 것이다.

먹잇감을 던져주고 이안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제 말에 동요하는지, 혹은 덤덤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안은 교묘히 말을 흘리는 폰투스를 빗겨 케르도스를 내려다보았다.

꽃잎이 창날처럼 뾰족한 꽃에선 불이 타는 냄새가 났다.

그에게 한 점 여유가 생겨도 결단코 잊지 못할 그 냄새가.

케르도스를 두어 번 흔든 이안은 폰투스에게 다가갔다.

“멜러니 폰투스.”

“예?”

“내게 귀띔을 해줬단 사실이 발각되면 난처해질 텐데, 도움을 줘서 고맙군.”

“별거 아니에요. 이안님을 위해서라면.”

스으윽.

이안은 케르도스를 폰투스의 귓가에 꽂았다.

서늘한 손길과 달리 표정은 다정했다.

“보답.”

“……과분한 선물을 받았네요.”

“이대로 만남이 길어지면 눈에 띌 테니. 폰투스 그대가 먼저 돌아서는 게 좋겠군.”

“예. 그럼……. 이안님이 과제를 해내길 기원하겠습니다.”

폰투스는 나붓하게 고개를 숙인 뒤 돌아섰다.

홍조가 어린 뺨과 설레는 낯빛.

이 모든 것들은 그녀의 걸음이 이안에게서 멀어질수록 멀끔히 지워졌다.

애초에 그런 적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무감한 동공을 빛낸 채 폰투스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묻힌 후.

“재능이 아깝군. 연극배우를 했으면 대성했을 텐데.”

이안은 폰투스의 변화를 보기라도 한 듯 차게 내뱉었다.

마찬가지였다.

다정함은 어디 가고 그의 기색 또한 차다 못해 시렸다.

* * *

이안의 시린 기색은 에윙클 호수에 다다라 C반을 보자 사그라졌다.

아니, 절로 그리되었다.

“이안, 어서 와.”

“고생했어.”

“혼자 뒤에 남았는데 별일 없었지?”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녀석들을 보고 있노라니 실없이도 웃음이 뒤따랐다.

본디 그렇다.

귀엽거나 순수한 것에는 쉬이 무장해제 되기 마련이다.

사락사락.

별일 없었다는 뜻을 담아 이안은 케르도스를 흔들었다.

그런 연후 모닥불 가까이 앉으며 꽃을 한편에 내려놓았다.

“식인 꽃이 찾아왔어.”

“식인 꽃?”

대뜸 튀어나온 단어를 레브는 퍼뜩 이해하지 못했다.

그 탓에 십 초 가량 가만있다가, 이내 뭔가가 떠오른 듯 말문을 열었다.

“……아아, 폰투스?”

“어. 공격한다고 예고를 하더라.”

“이 밤에 그 말을 한다는 건 잠을 자지 말란 소리네.”

“그렇지. 심리상 지키는 쪽에선 불안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게 치유학 수업인지, 전투학 수업인지.”

잠깐 허공을 응시하던 레브가 모닥불 옆 스튜 단지로 시선을 두었다.

스튜 단지는 찬 공기에도 뜨거운 김이 폴폴 나고 있었다.

레브는 소고기 스튜를 듬뿍 떠서 떠안기듯 이안에게 건넸다.

“무슨 지랄을 하든 그것들 몫이고. 이안 넌 일단 배 좀 채워.”

“이거 아까 내가 만들어놓고 간 거…….”

“뛰어다니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안 도련님.”

레브의 넉살에 이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많이 풀어졌다.

코르디아 구를 다녀온 뒤로 생긴 심경의 변화 탓일 터.

그 사실이 새삼 실감이 돼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이안은 진한 웃음만큼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스튜를 맛있게 먹었다.

“아. 이제부턴 뜀박질 대신 상자를 지켜볼까?”

“본진 사수에 들어가자는 거지?”

“돌아다녀 봐야 의미가 없으니 뭉쳐있는 게 낫지.”

이안은 그새 밑바닥까지 삭삭 긁은 스튜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런 뒤 주섬주섬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담요는 보온 술식이 걸려 따뜻했다.

한기에 입 돌아가고 싶지 않아 장만한 것.

제법 금화는 깨졌지만, 단체 구매한 값을 한달까.

이안이 눕자 각자의 담요를 챙긴 녀석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순둥순둥 앳된 얼굴들.

녀석들이 다친 곳은 없는지 재차 살펴본 이안은 눈을 감았다.

“연합조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순번 정해서 망을 보자.”

“내가 먼저 설게. 어차피 난 여기서 상자만 지키고 있었으니까.”

“먼저 고생해라, 레브.”

이견 없이 망보는 순번은 빠르게 정해졌다.

순찰 범위는 에윙클 호수 근처로 한정했고.

‘이게 최선이지.’

어차피 멀리 가 봐야 연합조에게 걸리면 처맞기만 할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상자 지키기.

상자 지키기는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우고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치사한 새끼들. 몰려와서 공격은 안 하고 간만 보네.”

레브는 엘다 나무 위에서 물의 발판을 타고 땅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짜증과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였다.

신경이 곤두선 건 가지고 노는 것처럼 구는 연합의 행태 탓이었다.

“우리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거겠지.”

“와, 엿 한번 제대로 먹인다.”

레브가 꺼끌꺼끌한 손을 들어 마른세수했다.

능력 좋은 녀석이 저런 상태니 다른 녀석들은 오죽할까.

눈자위가 뻘겋고 초췌한 것이 상거지꼴이었다.

산발적인 공격에 밤을 꼴딱 새웠으니 지칠 만도 하지.

‘이때가 가장 위험한데.’

하지만 적으로선 이 순간이 공격하기 가장 좋은 시점이었다.

자박.

똥개도 부르면 온다더니, 저 멀리서 눈구름이 일었다.

바닥에 쌓인 눈이 밟히며 일어난 것.

눈구름은 점차, 점차 C반과 가까워져 왔다.

* * *

“겁먹은 꼴들 봐라.”

멜러니 폰투스를 주축으로 그녀를 둘러싼 친위대들.

그들을 앞세우고 기세등등한 A반과 A반의 위세를 입고선 우쭐대는 B반.

이들 연합은 하나같이 C반을 깔아보았다.

“옹기종기 모여서 뭣들 하실까.”

“그러고 있지 말고 살려달라 빌어보시던가. 그럼 봐줄지 누가 아냐?”

“그만 겁줘라. 저것들 오줌 지릴까 봐 미리 호수 중앙에 곱게 서 있는 거 안 보이냐.”

연합의 시선이 호수 중앙에 모인 C반에게로 향했다.

얇은 얼음 발판을 딛고 따닥따닥 붙어 있는 꼴이 어찌나 궁상맞은지.

영락없이 궁지에 몰린 쥐새끼였다.

“관심 가져주는 건 고마운데 엄청 시끄럽네. 남의 본진에 와서 예의 없게.”

이안은 건조하게 귓구멍을 후벼팠다.

무심한 손길이었지만 시선만큼은 연합을 매섭게 훑었다.

상대의 전력을 탐색하기 위함이었다.

‘작정했군.’

전투 준비를 마친 정령에다 살기등등하게 휘감은 불길까지.

끝장을 볼 요량이었다.

폰투스의 친위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이안의 동공이 깊어졌다.

‘흠. 지금 전력으로 부딪히는 건 무조건 우리 손해야.’

죽을 각오로 피 터지게 싸운다 치자.

어차피 개싸움밖에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지키지 못할 바에야 포기하는 게 나을 때도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였다.

이안은 과제 상자를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원하는 게 이거지?”

“왜, 주시게? 근데 너무 후려치신다. 우리가 그 상자 하나 못 가져갈까.”

“거야 가져가 봐야 아는 거고.”

“하. 배때지로 굴러나온 자신감 보소.”

“이쯤에서 타협하지? 난 상자보다 애들이 다치지 않는 게 중요하거든.”

이안은 덤덤한 고갯짓으로 다시금 상자를 가리켰다.

‘곱게 내줄 때 가져가’라는 뜻.

거만함이 깃든 투항에 연합의 기세가 더욱 흉흉해졌다.

“이 새끼가 장난하나.”

“어이없네. 우리가 고작 상자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인상을 구긴 살리카 몇 놈이 더는 참지 않고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따악!

기다렸다는 듯이 이안이 손을 튕겼다.

그 즉시 상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오색 막이 실체를 드러내며 팔락거렸다.

“……으억!”

이에 사납게 달려든 살리카들은 이안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파르르.

탄력적으로 그들을 밀어낸 막이 심하게 요동쳤다.

‘……데펜도의 정령 결계?’

상황을 지켜보던 폰투스는 머리카락 끝을 문질렀다.

데펜도의 결계, 그 너머에 있는 이안, 그리고 호수 중앙에 모여 있는 C반.

왜 저 꼴로 있나 했더니…….

‘저것 때문이었어. 결계의 범위 안에 있느라.’

밤샘으로 C반이 피곤을 이기지 못하는 때.

그때가 가장 적절한 공격 시기라고 판단했는데…… 판단 착오였다.

밤새 결계를 짰을 줄이야.

‘……시간을 끈 게 패착이 되었네.’

폰투스는 물결치는 오색의 결계를 날카롭게 주시했다.

데펜도의 정령 결계는 방어막 중에서도 최상위 술식에 속한다.

참여하는 정령과 정령사의 수가 많을수록 단단해지는 결계.

‘술식을 해제하재도.’

진을 해석해서 배열을 알아내고 해제하는 것 자체가 시일이 걸린다.

카르디아가 와도 최소 일주일은 걸리는 게 데펜도니까.

‘당장 해결 못 할 일에 매달릴 필욘 없지.’

입매가 진해진 폰투스는 손가락을 들어 까닥거렸다.

그러자 멀끔하게 생긴 친위대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숙인 그에게 폰투스가 무어라 속닥거렸다.

끄덕끄덕.

친위대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앞으로 나섰다.

“괜한 일에 힘 뺄 필요 없으니, 상자를 내어주면 그냥 물러나지.”

“신용은 지켰을 때 가치가 있지.”

“안다. A반의 명예를 걸고 어떤 뒷공작도 하지 않겠다.”

A반의 손으로 떨어진 C반 상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연합은 미적거리지 않았다.

그렇게 왔을 때처럼 그들은 우르르 히오나스를 벗어났다.

여왕벌인 폰투스의 결정이니 일벌들이 토를 달 리가.

“…….”

연합이 떠난 자리.

눈밭 위에 남은 무수한 발자국에 붙박인 C반의 눈빛이 참으로 묘했다.

생각이 복잡한 듯 아닌 듯 엇갈렸다.

미동도 없이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올리브가 ‘아’하고 소리를 냈다.

그게 신호였을까.

아이들은 착실하게 서산에 떠 있는 정오의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이안, 과제 종료까지 30분 남았어.”

“아, 서둘러야겠다.”

이안은 바람의 속삭임을 들으며 그라나토스 어딘가를 응시했다.

방향은 동쪽, B반의 본진이 있는 곳이었다.

현재, C반을 친 연합은 한곳에 뭉쳐있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다 끝났다고 여기는 것.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린 이안은 레브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깽판 치러 가자. 망하려면 다 함께 망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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