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56화 (56/214)

제56화

그라나토스 동쪽의 B반 본진.

“히야. 멜러니 진짜 대단하지 않디?”

“그러게. 난 그 결계 보이지도 않더만.”

“멜러니가 아니었으면 개고생하며 헤맸겠지?”

“데펜도의 정령 결계라 카르디아가 와도 해제하는데 며칠이나 걸린다잖냐.”

“뻘짓하다가 C반 그것들 상자도 못 뺏고 과제가 끝났을걸. 그러다 C반이 학점이라도 받았으면……. 으윽. 끔찍하다.”

“어쨌든 그것들을 패주진 못했어도, 우리가 연합으로 쪼지 않았으면 상자를 내줬겠냐.”

“그러니까. 큭큭큭. 속이 다 시원하다.”

“야, 그만 말하고 우리도 이제 슬슬 돌아가자. 과제 종료까지 30분밖에 안 남았는데.”

“그러자. 빨리 가서 그 잡것들 우울한 낯짝이나 실컷 봐야겠다.”

상자 주위에 앉아 있던 루하흐들은 신나게 일어섰다.

C반의 썩은 낯짝을 볼 수 있다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희희낙락하는 분위기 속.

“…….”

푸른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의 것을 뺏고선 즐거워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이런 결과가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괜스레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쐐애액.

한겨울의 서늘한 향이 소녀, 아니 에이프릴을 스쳐 갔다.

……바람 화살?

질풍 같은 속도를 자랑하며 화살이 상자 옆, 바닥에 꽂혔다.

파르르르.

화살이 떨림과 동시에 어쩐지 땅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착각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화살에 시선이 쏠려 땅 울림을 즉시 인지하지 못했을 뿐.

“우와아왁!”

연이은 진동에 균형을 잡지 못한 루하흐들이 허우적대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 순간에 맞춰.

콰콰쾃.

뾰족뾰족한 가시가 땅을 뚫고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솟구쳤다.

상자 주위에 있던 루하흐들의 팔다리를 자비 없이 꿰뚫으면서.

“젠……장!”

고통에 몸이 달달 떨려오는데도 루하흐는 가시를 부수려 했다.

힘겹게 짜낸 마력을 운용하려던 찰나.

후우웅.

루하흐의 움직임을 저지하듯, 짙은 물의 회오리가 가시 사이사이를 누비며 생성되었다.

그 뒤 바람을 타고 세차게 돌면서 루하흐의 등을 찍어눌렀다.

인정을 두지 않는 손길에 그의 몸뚱이가 찌부러졌다.

“크아아앗!”

가시에 살덩이가 사정없이 찢겨나갔다.

주르르륵.

벗어나려 할수록 상처가 더욱 벌어지며 피가 줄줄 샜다.

뇌수를 진탕 휘젓는 격통에 루하흐는 침을 질질 흘리며 늘어져 버렸다.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불능상태에 빠진 것이다.

‘…….’

상자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에이프릴은 마른침을 삼켰다.

상황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돌아가는 추이를 살피다 보니, 대강의 윤곽이 보였다.

가시에 꿰뚫린 아이들의 공통점이 뭔지.

‘멜러니를 심하게 따르는 애들이야.’

이 말은 곧 B반을 휘어잡고 있는 아이들이란 것이다.

이들을 고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실력자들을 제압해서 초장부터 분위기를 휘어잡으려는 거였다.

‘심리적 압박감을 주어 완벽한 제압을 하려는 거겠지.’

치밀하고 무자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실로 훌륭한 전술이었다.

실력이 좋은 이들만 찍어눌러도 나머지가 반항하지 못할 테니까.

에이프릴은 무력하게 달달 떠는 B반 아이들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 * *

“…….”

얼어붙은 공기를 타고 위에서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봄볕처럼 따스한 바람이.

특정인에게만 너그러운 바람을 밟으며 여유롭게 하강하는 누군가.

이안이었다.

“워후. 착지는 완벽한데 먼지가.”

능청을 떤 이안이 손을 내젓자 바로 구박이 내리꽂혔다.

“꼬시다. 혼자 멋진 척 다하더니.”

이안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레브였다.

제법 유명해진 삼총사 중 두 명이 등장했는데 하나가 빠질 리가.

캬캬캬.

까마귀 같은 웃음을 토해내며 올리브가 존재감을 증명했다.

셋 다 여유로웠다.

자기 집 앞마당을 산책하는 것처럼 말이다.

“심히 유감입니다, B반 여러분. 이런 모습으로 만나서.”

이안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B반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죽상인 것은 뵈지도 않는 모양인지.

“아이고. 찬 데서 날밤을 깠더니 허리가 아프네. 어디 앉을 데가…….”

과장되게 허리를 두드리던 이안은 과제 상자를 빤히 응시했다.

마침 적당한 의자가 여깄네, 라는 눈빛.

“이, 이건 안돼!”

이안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누군가가 용감하게 외쳤다.

참으로 씩씩했으나, 향년 45세, 겉모습만 십 대인 중년에게 들릴 리가.

이안에게는 허리 아픈 게 더 중요했다.

안 되긴 뭐가 안 되냐며 이안은 안에 든 케르도스를 탈탈 털어냈다.

빈 상자를 만든 후.

콰아앙!

상자를 닫은 이안은 연신 허리를 두드리며 상자에 걸터앉았다.

심지어 옆을 두드리며 레브와 올리브에게도 앉으라 권했다.

사양지심 없는 녀석들이라 냉큼 자리에 앉았다.

거기다 두 녀석은 거만하게 다리까지 꼬았다.

코딱지만 한 상자에 낑겨 있으면서 있는 척하긴.

두 녀석을 따라 다리를 꼰 이안은 B반의 염장을 긁었다.

“편안하구먼.”

“…….”

오로지 침묵만이 감돌았다.

소리는 없었으나 침묵의 밑바탕에 깔린 건 ‘이 개자식’이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할 말을 삼키는 패배자의 몰골에 이안은 비소를 날렸다.

“왜? 버러지가 꿈틀하니까 짜증 나냐?”

“좀…… 비겁하다고 생각 안 해?”

“비겁? 크하하핫.”

이안은 화통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그런 연후 계속 허리를 두드리며 남학생에게 다가갔다.

땀에 절은 푸른색 머리카락이 번들거리며 이안의 시선을 잡아챘다.

에루리안에서 푸른색은 B반의 상징이었다.

루하흐의 숫자가 절반 넘게 차지하고 있으니까.

살리카가 득실한 A반과는 엄연히 달랐다.

“너희들의 연합은 전술이고, 우리의 기습은 비겁이다?”

“…….”

“꼬우면 날 제압해서 따져보시던가? 어차피 이긴 놈의 말이 진리니까.”

“그 아비에 그 새끼네. 성인군자인 척 위선 떨면서 뒤로 역겨운 행동하는 게.”

선을 세게 넘은 발언이었다.

콰드득.

삽시간에 장난스러움을 거둔 이안은 루하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뚫린 주둥이라도 말은 가려 해야지.”

냉혹한 손길.

뒤늦게 반항하며 버둥거리는 루하흐를 이안은 그대로 밀어버렸다.

빙글빙글 유영하고 있는 바람 화살 쪽으로.

“크아아아앗!”

어깻죽지를 관통한 화살은 커다란 구멍을 만든 뒤 날개뼈를 뚫고 나왔다.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에 끊길 듯 숨을 헐떡이던 루하흐가 게거품 물며 혼절해버렸다.

“쯔읏. 손에 피가 묻었네.”

무자비하게 굴고도 이안이 신경 쓰는 건 고작 하나였다.

제 손에 묻은 피.

그걸 말없이 보다가 이안은 레브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씻을 것 좀 달라는 손짓이었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레브가 물방울을 불러냈다.

그 뒤 이안의 손바닥에 비스듬히 떨궜다.

피가 충분히 씻길 양이었다.

“피 냄새는 질색이거든.”

지난 생에 지겹도록 맡은 게 이 냄새였다.

누군가의 생이 으스러지며 비명을 지를 때마다.

그래서 에루리안에 다니는 2년 동안만이라도 맡고 싶지 않았다.

물론 뜻대로 되지 않을 걸 알았지만.

“내가 평화주의자라서 말이야.”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헛소릴 이안이 지껄였다.

그러더니 물이 묻은 손을 털며 화사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의 널 뛰는 감정 변화에 B반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 사람만 안 건들면, 내가 참 착한데.”

“…….”

“무슨 말인지 알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면 덤벼도 되는데, 그게 아니면 조용히 살자. 응? 조용히.”

쉿!

입가에 손을 가져간 이안이 눈을 찡긋했다.

도로 굉장히 개구진 표정을 지어 보인 후.

“아주 유익한 만남이었습니다, B반 여러분.”

이곳에 온 적 없다는 것처럼 이안 일행은 홀연히 사라졌다.

가시도, 물의 회오리도 흔적 따위 남지 않았다.

기절한 루하흐와 피 웅덩이만 아니면 꿈이라고 여겼을 정도로 깔끔했다.

“…….”

불과 10분 만에 벌어진 사태였다.

그리고 B반에 남겨진 건 전염병이 휩쓴 듯한 무력함뿐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게 되게 정적인 존재였던 이안이라는 사실.

그에 에이프릴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릿속에 단단히 뭔가가 박혔다.

다음은 없을 거라는 것.

차후에 이안을 거슬렀다간, 절대로 오늘처럼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 말이다.

* * *

늦은 오후에 시작된 치유학 수업.

학점 공개가 있을 예정이라 다들 제2 약제실에 모였다.

C반부터 A반까지 빠짐없이 전부.

과제 후라 그런지 반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갈라졌다.

C반은 되레 평온했고, B반은 우중충했으며, A반은 화창했다.

[개별수업에서 알려주면 그만이지 굳이 다 모아선.]

녹스의 떨떠름함에 이안은 답을 했다.

-투명성을 보여주겠단 거지. 어떤 사심이나 조작도 없었단.

[염병. 대놓고 비교하겠단 것 아니냐.]

-실제론 그런 의도인 거지.

[적당한 자극은 의욕을 부추기지만, 넘치면 되레 의욕이 꺾여버리는 걸 아니 그러는 게지. 저 작자가 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맘에 차는 게 없다. 에잉.]

녹스의 푸념과 상관없이 기드온 교수의 기색은 밝았다.

“모두 수고 많았다.”

기드온은 짤막한 마무리를 지은 후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글록시아, 라플레아, 리아트리란 글귀가 덮개에 음각된 과제용 상자.

그중 B반의 것인 라플레아에 그가 손을 가져다 댔다.

언제나 그랬다.

B반을 공개한 후 A반에서 C반 순이었다.

중간치를 보여주고선, 막판에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두 개를 비교하겠다는 거였다.

아이들의 자존감을 깎기 위해.

‘누군가의 얼굴에 비친 절망이, 저자의 희열이 된다니.’

기드온은 비열함 그 자체였다.

그런 자가 오늘도 인자한 교육자의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럼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B반의 상자부터 보도록 하겠다.”

거침없는 손길.

그에 상자가 활짝 열리며 속살을 훤히 드러냈다.

“…….”

이안이 버려버렸는데 케르도스가 있을 리가.

텅 빈 상자에 당황한 기드온이 B반을 직시하며 눈가를 찡그렸다.

“쉬운 과제였을 터인데.”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니, 아니다. 그럴 수 있지. 쉽다고는 하나, 공통 과제이니 변수는 있기 마련이지.”

표정을 수습한 기드온은 얼른 A반 상자로 관심을 옮겼다.

기대감이 어린 건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B반 역시 열망 어린 눈망울을 반짝거렸다.

C반을 뭉개버려!

그들의 반짝거림엔 이런 속내가 잔뜩 녹아있었다.

달칵.

모두의 관심과 거들먹대는 A반의 기세를 타고 드디어 상자가 열렸다.

“오오…… 허억!”

B반 누군가의 비명을 시작으로 웅성거림이 몸집을 부풀렸다.

“왜 상자가…… 비어있는……?”

A반의 상자 또한 꽃잎 한 장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연달아 꽝이라 기드온의 미소에 금이 쩍 갔다.

“어찌 된 일이지, 멜러니?”

“……제출 시엔 분명히 가득 찬 상자였습니다, 교수님.”

“그럼 상자를 누가 도로 열기라도 했단 말이냐.”

기드온의 의문에 이안은 정중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저자가 의심의 화살을 누구에게 돌리겠는가.

필시, C반 담당인 클로에 교수님을 걸고넘어질 것이다.

아귀가 맞든 안 맞든 그게 중요하랴.

본인 실수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클로에 탓을 하는 것이 저자인 것을.

괜한 말 나오기 전에 그 싹을 잘라야 한다.

“과제 상자엔 잠금 술식이 걸려 있습니다. 그걸 깨려면 카르디아가 되어야 하고.”

“그렇지.”

“게다가 상자는 치유학 담당 교수님만이 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까.”

“흠.”

“그런 이유로 상자는 아무나 열 수 없습니다.”

“하긴. 말이 안 되지. 너희들이 상자를 제출 후 줄곧 내가 지키고 있었으니.”

“그럼 결론은 A반이 기드온 교수님을 기만한 게 되겠군요. 그렇게 교수님이 아껴주셨는데.”

이안의 말에 힘을 실으려는 듯 C반이 조잘거렸다.

어쩐지 채집은 안 하고 우리 꽁무니만 쫓아다니더라.

남 괴롭힐 시간에 자기들 일이나 잘할 것이지, 대체 왜 저러냐?

교수님을 의심하는 것이냐, 진짜 너무했다.

한쪽으로 몰아가는 여론에 A반은 기막혀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상자가 빈 건 어떻게 변명을 할 수 없으니까.

일방적으로 돌아가는 판도에 기드온이 손뼉을 쳤다.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거였다.

“크흠.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지. 그럼 C반 상자를 열어보겠다.”

누구도 기대치가 없었다.

후딱 열고 끝내자는 심리 속에 상자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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