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57화 (57/214)

제57화

……벌떡!

B반이건 A반이건 너나 할 것 없이 튕기듯 일어났다.

앞구르기 열 번 하며 대충 봐도 상자 안엔 검은색 꽃이 넘쳐났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예상을 벗어난 흐름에 다들 눈만 끔벅거렸다.

당혹과 경악.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 속에 C반은 환호를 내질렀다.

언제 평온했냐는 듯 담담함을 내던진 채였다.

“와아아아!”

“우. 리. 만 성공했다!”

“A 학점, A 학점!”

아이들의 괴성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에이프릴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이안을 쳐다보았다.

격한 움직임에 단발이 뺨을 스치며 엉클어졌지만 무슨 상관이랴.

에이프릴은 이안의 검푸른 동공에 담긴 확신에 다른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일부러…… 당한 척한 거야.’

무덤덤한 이안의 태도에 에이프릴 또한 확신할 수 있었다.

이틀간 맥없이 군 건 속수무책 당해서가 아니라 속임수였다는 것을.

이안은 기다린 것이다.

B반을 힘으로 누르고, A반을 지략으로 누를 최적의 시기를.

‘그런데 이안은 어떻게 상자를 열었을까?’

어떻게?

의문이 가시질 않아 골몰하길 잠시 잠깐.

화들짝.

에이프릴은 갑작스레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움츠렸다.

이안이 볼 줄 몰라서 놀란 것도 있지만, 자신의 손등을 봐서 더 놀랐다.

어느 사이 긁고 있었던 손등을.

그녀가 서둘러 손을 떼는 때에 맞춰 기드온이 헛기침을 했다.

어쩐지 교수의 입가가 푸들거렸다.

미세한 경련을 이안은 기꺼운 마음으로 감상했다.

“잘…… 했구나. 언젠가 너희들이 해낼 줄 알았다.”

“예에. 감사합니다, 교수님.”

“축하한다……, A 학점.”

* * *

수업이 끝나고 히오나스에 모인 C반.

“이 점수 실화인가요?”

“최초의 A 학점, A 학점!”

거기다 점수가 짜기로 유명한 기드온 교수의 수업에서 A를 받다니!

이게 누구의 덕이겠는가.

“우리는 이안이 있는 한 무적이다아아아앗!”

아이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괴상한 춤까지 춰댔다.

모닥불을 두고 제 올리는 개코원숭이들.

그 무리 가운데 가장 격렬한 동작을 선보이는 건 올리브였다.

“크으. 우리 진짜 연기 잘하지 않았냐?”

“그러게. 완전 연극배우 뺨쳤지.”

“특히! 상자를 뺏길 때 아련한 표정, 죽여주지 않았어?”

“죽여주다 못해 아주 썩었지, 썩었어. 올리브 넌 거기서 눈물은 왜 흘리냐?”

“어린노무 시키가 그때의 내 심정을 어떻게 알겠어. 우리 이안의 뒤태가…… 크으.”

“‘크으’는 무슨. 너 때문에 다 들통날 뻔했다, 이 자식아.”

유치하게 굴던 아이들은 또다시 푸하핫 폭소를 터트렸다.

A반을 이긴 거?

입 찢어지게 좋았다.

좋은데……, 더 기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다 같이 해냈다는 사실이다.

아직은 이안에게 기댄 면이 많지만, 예전이라면 작전에 가담시켜도 아예 실행하질 못했을 테니까.

A반이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뿐이면 다행이게?

아마도 ‘최악’은 벌벌대다가 이안의 계획을 발설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맡은 바에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A 학점을 얻어냈다.

고로 학점은 용기의 증표인 셈.

“야, 우리 좀 괜찮지 않냐?”

“말이라고.”

환한 기색으로 방방 대는 아이들의 면면을 살피다 이안은 입을 열었다.

“수고 많았다.”

“이안 너도. 진짜 네가 아니었으면…….”

“또 그 말 한다. 나 혼자 머리 쓴다고 작전이 성공하는 거 아냐, 단체전이라는 건.”

이안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오기 수치는 높은 반면 자존감 수치는 바닥인 C반 녀석들.

이놈들에게 중요한 건 인정과 토닥임이었다.

“그러니까 우쭐해도 돼. 너희들은 충분히, 그럴 실력을 갖췄어.”

“진……짜? 우리가?”

얼마쯤 기대가 어린 물음에 이안은 입꼬리를 올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잰체하는 몸짓에 허세가 잔뜩이었다.

“내가 업어 키우다시피 가르치는데 실력?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지.”

“업어 키웠다는 거, 거기서 난 빼줘. 난 원래 잘났거든.”

아이들이 모두 수긍하는 표정을 짓는 와중, 레브만이 반발을 했다.

진지한 척 구는데 표정에 장난기가 그득 넘쳤다.

그런데도 녀석은 차를 홀짝이며 거만함을 유지했다.

도도한 모양새에 아이들은 슬쩍 올리브의 옆구리를 찔렀다.

“……휴식기 동안 무슨 일 있었어, 올리브? 레브 성격이 변했는데?”

“쟤 원래 저래. 신경 쓰지 마.”

“그래?”

“그렇다니까!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 쟤, 걸핏하면 지가 잘났다고 나불거린다니까.”

“야, 내가 언제.”

“그랬는데? 맨날 그랬는데?”

“닥쳐! 진짜 유치해서 내가.”

레브가 올리브에게 자주 하는 말이 나오자 아이들이 와르르 웃어 재꼈다.

정돈되지 않고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분위기.

별빛 총총한 밤하늘.

모닥불을 둘러싸고 옹기종기 모인 C반.

더 깊이 쌓여가는 신뢰.

이 모든 것들이 사람을 참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아, 조오오타.”

“그러게. 그냥 좋다.”

끄덕끄덕.

아이들은 격하게 긍정하며 차를 홀짝거렸다.

두 달 새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보다.

‘직계나 마시는 아케랑코를 서슴없이 마시고 있다니.’

지배력을 올려주는 아케랑코는 귀한 홍차이다.

뷔트시겐에서 분기에 한 번 소량만 팔기 때문이다.

하여 직계 외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몫 자체가 거의 없다.

여태 구경도 못 해본 것을 마시려니 손이 달달 떨렸지만, 목구멍으론 잘만 넘어갔다.

차를 넘기는 건 목구멍이니까.

‘지금껏 우리를 동등하게 대해준 건 이안 밖에 없어. 그러니까 우리도 잘하자! 도움이 될 수 있게!’

아이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의지를 다졌다.

조용한 변화였다.

무형의 다짐이라 눈에 보일 리 없건만, 녀석들의 속내를 이안은 기민하게 간파했다.

‘앞으론 더 단단해지겠네.’

그는 아이들이 스스로 강해질 이유를 찾았다는 것에 흡족해했다.

결국, 남이 강요하는 수련에는 명확한 한계선이 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떤 이유든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나아가야 효과가 있지.’

과제 하나로 많은 것을 얻었다.

특히나 아이들의 내적 성장에 도드라진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에 대해 되짚으며 이안은 천천히 일어섰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바람결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여 누구도 이안이 빠져나가려는 걸 감지하지 못했다.

물론 레브만은 예외였지만.

“어디 가게?”

“A반한테 엿 먹인 숨은 공로자 만나러.”

“아아, 잘 다녀와.”

“걱정하지 마시게, 아우님.”

“지랄.”

레브의 거친 언사에 이안은 ‘큭큭’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힌 뒤 레브에게 속닥거렸다.

“아우님, 적당히 틈 봐서 수련하는 분위기를 만드시게.”

“하여튼 지독하다, 너도. 오늘 하루쯤은 풀어줄 수도 있는데…….”

“오늘 쉬면 한 달 뒤엔 오늘치만큼 차이가 벌어지겠지.”

“하여튼 말발하곤.”

“하하핫. 수고 좀 해줘. 항상 내가 고마워하는 거 알지?”

“간지러운 소리 그만하고 얼른 꺼져.”

“얘가 점점 거칠어져 가.”

“이게 다 너랑 올리브 때문이거든?”

“이 형님은 널 이렇게 키운 적이 없단다.”

“형님은 누가 형님이야?”

“아, 너무 존경스러워서 스승님이라 부르고 싶다고?”

“누가…… 후우. 다 놀렸으면 그만 가라.”

레브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자 이안이 사악하게 킬킬거렸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작은 불씨 하나만 던져줘도 마른 장작처럼 화르르 타오르는 녀석이었으니까.

* * *

숨은 공로자를 만나기 위해 당도한 제1 도서관.

이안은 접선 장소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마다 천창을 통해 쏟아진 달빛이 그를 따라왔다.

후광에, 얼핏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자 결국 녹스는 입을 열고 말았다.

[생긴 건 멀쩡한데…….]

-왜 또 시비실까.

[요즘 툭하면 레브를 놀려서 그런다.]

-쿡 찌르면 바로바로 반응하니까.

[고약스럽긴.]

-고약하긴. ‘적당히’ 조절하고 있는 사람 억울하게.

[내가 모를 줄 아누? 그거 오래오래 놀려먹기 위한 수라는 걸.]

들켜버렸다.

‘레브 놀리기’는 다람쥐가 아껴놓은 도토리 같은 거였다.

야금야금 까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하하핫.”

호쾌한 이안의 웃음에 반응을 보인 건 녹스가 아니었다.

도서관의 가장 후미진 곳.

“아, 씨ㅂ…….”

달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짜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꼭 숨어있느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니만.

이안이 가까워지자, 누군가가 책장 밖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트란 카스티야.’

레브를 불로 지지다가 처맞은 그놈이었다.

‘이번 과제의 숨은 공로자지.’

궁상맞게 쪼그려있긴.

좀도둑 같은 행색에, 이안은 카스티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절 부하인 양 내려다보는 구도, 이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뭘 꼬라봐. 사람을 깔아보긴. 귀한 도련님이라 이거야?”

“죄인처럼 쪼그려서 숨어있던 건 너 아냐, 트란 카스티야?”

“아니거든.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언제 숨어있었다고 지랄은.”

툴툴대던 카스티야는 구부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놈도 참 한결같다.

어쩜 저렇게 대쪽 같은지 존경심이 일 정도였다.

얄쌍하게 생긴 카스티야가 지지 않으려는 듯, 허리를 꼿꼿이 펴자 서로의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마력핵이 막 생긴 시점엔 놈보다 더 작았었는데.

‘흠. 카스티야의 신장이 5피트 8인치(172cm)였지, 아마.’

두 달 사이 오른 건 등급만이 아니었다.

새삼 사소한 것에서 변화를 실감한 이안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웃음에 움찔한 카스티야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겁먹은 꼴이었지만, 놈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부러 큰소리를 쳤다.

“씨……. 그딴 식으로 쪼개지 마! 또 뭔 짓을 하려고. 약속은 지켰잖아!”

“…….”

“A반 상자를 지정 장소로 가져갔는데 또 뭐.”

“누가 뭐래?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부른 거니까 쫄지마.”

“누가 쫄았다고 그래! 나 트란 카스티야거든!”

“나한테 처맞고 A반 것들한테 떨거지 취급당하면서 허세는.”

“X팔. X 같네.”

카스티야가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았다.

분기가 어린 낯짝을 보다가 이안은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였다.

“실핏줄 터졌다. 완전 뻘겋게. 어째 꼭 토끼가 우는 것 같은데?”

“재수 없는 새끼.”

카스티야가 이를 득득 갈수록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약간 레브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 녀석이 들었다면 펄쩍 뛰겠다, 란 생각을 하며 이안은 대화를 이어갔다.

“칭찬 고맙다.”

“뭔 되먹지 않은 개소리를.”

“그렇잖아. 나쁜 놈이 아무한테나 ‘나보다 더한 놈’이라고 하겠냐?”

“……널 상대한 내가 미친놈이지.”

“반사.”

“뭐?”

“그 칭찬, 받을 수가 없다고. 레브를 불로 지졌던 왈패랑은 정들기 싫으니까.”

“하!”

카스티야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런 새끼가 있냐는 표정.

놈의 반응을 건조하게 넘기며 이안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무방비해 보이나 어떤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카스티야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이만으로도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힘에 눌려 시키는 대로 하지만, 언제든 이놈은 빈틈을 노릴 놈이란 것을.

기회가 되면 악착같이 물어뜯을 놈이고.

‘그렇다 해도 아직은 쓸만하니까.’

카스티야를 계속 첩자로 써먹을 심산이다.

절대 사이가 좋아질 수 없는 관계라 의심을 살 리 없으니.

설령 누군가가 눈치를 챈다 해도 지금은 아닐 것이기에.

‘계속 써먹으려면 기 좀 더 죽여놔야겠다.’

앞으로를 위한 일종의 담금질이었다.

굳이 카스티야 저놈을 만나러 온 맥락도 이 때문이었으니까.

이안은 무감한 눈빛으로 카스티야를 가만히,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십 초.

침묵 속에 응시하자 카스티야의 주홍빛 동공이 끄트머리로 굴러갔다.

시선은 피하지만 눈은 내리깔지 않았다.

일종의 반항에 이안은 입술 끝을 올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뭐?”

“호시탐탐 날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는 건 상관없으니, 오늘처럼 복종하라고.”

무색무취에 가까운 이안의 동공은 여전했다.

보고 있되, 무생물을 보는 것처럼 죽어버린 눈.

너무도 무감한 시선에 카스티야는 자신의 목을 긁어댔다.

꽉 막힌 숨구멍을 열려는 행동이었다.

목울대에 피가 날 정도로 거친 손길을 보며 이안은 말문을 열었다.

느릿한 어조는 카스티야가 가진 두려움을 들쑤시기에 충분했다.

“아직은 쓸모가 있는 널 죽이긴 싫거든.”

“…….”

“네가 계속 첩자 노릇하다 A반의 누군가한테 들켜 뒈지면 어쩔 수 없지만.”

“……또라이 새끼.”

“아까도 말했지만 칭찬은 넣어두시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미친 새끼.”

카스티야가 ‘퉤’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무슨 반항을 하든 그래 봐야 시늉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이안은 강아지가 하는 재롱을 보듯 너그럽게 넘겼다.

사냥개는 사냥만 잘하면 된다.

능력만 있다면 성격이 까칠한 것쯤이야 뭐.

“이제 보니 가진 재주가 많다, 너. 날 재밌게 할 줄도 아네.”

와그작.

카스티야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찌그러졌다.

그 낯짝이 몹시 웃겨 이안은 ‘아하하핫’ 파안대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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