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58화 (58/214)

제58화

[왠지 짠해지는구나, 분명 나쁜 놈인데.]

도서관을 막 나서며 녹스가 꺼낸 첫마디였다.

그러더니 사냥개의 털이 카스티야인 양 살살 쓸어내렸다.

[죽살나게 맞은 것도 모자라 세작질까지 해야 하다니.]

“뿌린 대로 거둔 거지. 그런 놈은 동정할 필요 없어.”

[흠. 질 나쁜 인간이라서?]

“내가 싫어하는 놈이라서.”

[명쾌하군. 보아하니 이안 넌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리 여기며 행동하는 것 같구나.]

“생긴 대로 살다 죽는다는 말이 괜히 있게? 죽을 때에서야 하는 반성은, 그냥 죽음 직전 자신에게 가지는 연민일 뿐이야.”

[꽤 냉정한 말이군.]

“내가 그렇다는 거지 뭐. 녹스 네가 보기에 그놈이 불쌍하면 도와줘도 돼.”

[그러다 내가 진짜 도와주면 어쩌려고?]

“그건 녹스 네 선택이라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감수해야지.”

[흐음. 나도 그런 놈은 동정하지 않는다. 단지, 네 생각이 궁금했을 뿐.]

녹스는 시종 냉담한 이안을 새삼스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잘 웃고 감정 표현도 풍부한데…….

분명 그러한데, 가만 보면 대개가 무표정이다.

더 놀라운 것은 진심으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감정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녀석에게서 맡았던 희미한 위화감.

그게 다시금 스멀스멀 발끝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어느 한구석, 묘하게 어긋난 것 같단 말이야.’

이놈에 관한 호기심을 풀고 싶어 녹스는 재차 말을 걸어보려 했다.

스으윽.

그런데 이안이 선수치듯 눈꽃 빙수를 녹스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나쁜 놈 얘긴 그만하고. 제자가 스승님께 바치는 공물을 받아주십시오.”

[마지막 남은 내 에이셔어!]

앞선 상념은 빙수보다 못했다.

빛의 속도로 산화되어 버렸으니까.

식탐꾼으로 돌변한 녹스에게 이안은 알랑방귀를 뀌었다.

“로르가 호시탐탐 노리는 것을 이 제자, 스승님을 위해 굳건히 지켜냈지요.”

[잘하였다, 잘하였어.]

“맛있으십니까?”

[아이고. 달다, 달아!]

“스승님은 마지막 에이셔를 차지할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이번 과제를 완성 시켜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찹찹찹.]

“상자에 걸린 잠금 술식을 풀지 못했다면, 이 계획은 시작도 못 했을 텐데.”

[에헴. 실로 타당한 말이다. 나니까 가능했지.]

잘난 ‘척’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상자에 걸린 잠금 술식은 에루리안이 건립되었을 때부터 내려오던 것이었다.

세월이 더해지며 보수와 덧댐을 여러 번 거친 거였고.

[에루리안에 있는 모든 것은 내 마력의 성질과 비슷하니 그럴 수밖에.]

“애초 에루리안은 아카데미가 아니었으니까.”

에루리안은 초대 황제가 건립한 비밀 별장이었다.

설계부터 완공까지 황제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그러다 보니, 시설 하나하나에 그의 마력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하니 황가의 수호자인 나에게는 이곳이 놀이터와 같지.]

“스승님, 뒤에서 후광이 비칩니다.”

[푸흘흘. 되었다. 고작 그런 하찮은 일로 뭘 그리.]

말은 그렇게 해도 녹스의 입가가 귀밑까지 찢어졌다.

이번 일은 작은 도움 수준이 아니라 핵심 전력이었으니까.

그 사실이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녹스의 기분이 저 하늘 끝에 정처 없이 걸렸다.

[푸흐흘흘흘.]

끝없이 치솟은 광대에 이안 또한 기분이 퍽 좋았다.

그만큼 걸음이 산뜻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즐겁게 걷다 보니 예상보다 빨리 텔로미어관에 당도했다.

* * *

5층 왼편의 끝쪽 창문.

노르스름한 불빛이 켜진 곳을 이안은 올려다보았다.

<이안, 도서관 갔다 빨리 와. 나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으니까.>

<어딜 가려고?>

<아, 기드온 교수가 불러서 다녀오려고.>

<기드온이?>

<아까 수업 끝나고 날 부르더니 그러더라.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교수실로 오라고.>

이안은 레브에게 들은 말을 되짚으며 숨을 들이켰다.

겨울에 피는 올드 로즈의 눅진한 향이 났다.

낡은 잿빛.

텔로미어관을 덮은 장미는 색깔에 어울리는 습한 냄새를 풍겼다.

흡사 기드온처럼.

‘애가 타나 보군.’

아무래도 레브의 마력향이 맡아지지 않아 녀석을 부른 것 같다.

이쯤이면 포기할 법도 하건만 참 질기다.

쓸데없이 기울이는 그 노력을 등급 올리는데 사용했다면 대성했을 터인데.

“그자도 참 어리석네.”

이안은 기드온에게 연민 한 조각을 드러냈다.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뒤엉켜 썩어간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고개를 돌리며 생각 또한 끊어내는 것으로 사고를 일단락지었다.

그러는 사이.

“이안.”

마침 기다리던 놈이 저만치서 뛰어와 이안 곁에 섰다.

“벌써 카스티야를 만나고 오는 길이야?”

“어. 생각보다 말을 잘 듣더라고.”

“A반의 동태를 살피기엔 그만한 패가 없지. 폰투스 친위대의 끄트머리에 있던 놈이니까.”

“레브 너는?”

“나? 아, 기드온이 ‘견습생’을 제안하더라.”

“견습생?”

견습생.

교수는 학생 전원에게 평등해야 하나 어디 그게 쉽던가.

재능이 특출나 눈에 띄거나 가르치고 싶은 학생도 있을 터.

그럴 때 견습생이란 제도를 통해 학생을 자신의 밑에 둔다.

까놓고 말해 제자로 거둬들이는 것이다.

편파적이란 느낌을 줄까 봐 명칭만 그럴싸하게 꾸몄을 뿐.

‘투명하다, 투명해. 기드온의 의도가 훤히 보이네.’

설마 레브가 예뻐서 제자로 거두려는 거겠는가.

곁에 두고 밀착 감시하려는 거겠지.

이안은 절로 나오는 비소를 감추지 못하고 한쪽 입귀를 비틀었다.

“기드온의 의도야 뻔하고. 레브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처음엔 황당하고 실소가 나와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시간 좀 끌다가 수락했어. 기드온 교수가 날 감시하려고 제안한 거니까.”

“사자의 입안으로 머리통을 들이밀겠다는 거네.”

“너도 그렇잖아.”

“나?”

“기드온을 혐오하면서도 필요하니까 적절히 상대하고 있으면서.”

“흠. 그게 티 나나?”

“안 나. 나면 기드온이 저렇게 헤벌쭉거리지 않겠지.”

“꽤 신랄하네.”

“사실을 나열한 것뿐인데 뭐.”

레브가 어깨를 슬쩍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휴식기’는 녀석의 실력뿐 아니라 성격까지 개조시킨 것 같다.

이전보다 더 직설적으로 변한 걸 보면.

“실은 기드온의 제안을 수락한 진짜 이유가 따로 있어.”

“진짜 이유?”

“이 에루리안에선 기드온 하나지만, 졸업하고 밖으로 나가면 기드온 같은 자가 수두룩할 거 아냐.”

“악의를 가졌으면서 선한 척 가면을 쓴 자들?”

“어. 그런 자들에게 제대로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수련이랄까, 그런 거지 뭐.”

레브에게 있어선 필요 요소였다.

데클렌과 추방자들을 책임지는 자가 되기로 했으니까.

책임.

무겁고 무거운 단어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유약해선 안 된다.

그 다짐이 굳어질수록.

<외적으로 강해지기 위한 수련도 좋지만……. 레브, 곯아가는 마음을 내버려 둔다면 진정으로 강해질 수 없단다.>

뷔트시겐 가주님이 해준 조언이 자꾸 되감아 졌다.

염려를 담고 있는 눈빛을 마주 보았을 때, 레브는 확실히 깨달았다.

지난 7년간을 완벽히 털어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7년.

오직 복수만을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며 살았던 삶이 외로웠던 걸까.

기드온의 가짜 호의에 홀랑 넘어가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아니지.

보지 않으려 외면했던 것에 가까웠다.

드문드문 새던 기드온의 적의와 탐색을 눈치챘음에도.

레브는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젠 날 담금질하는 차원에서 기드온을 상대하려고.”

“아, 그래서……. 뭐가 됐든,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된 거지.”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거기다 기드온의 일이라면 레브가 매듭짓는 게 맞다.

그것에 관해선 더 살을 붙이지 않고 이안은 레브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레브.”

“어?”

“기드온이든 네 숙부든 이해하려 하지 마. 그들은 생긴 대로 사는 거니까.”

“생긴 대로…….”

“자신의 선택으로 만든 결, 그것 따라 허덕이는 거지.”

“나도 알아.”

‘단지 궁금할 뿐’이란 속마음을 레브는 혀끝으로 밀어내지 않았다.

자격지심으로 점철된 그 속내.

자신의 못남을 남 탓으로 돌리는 기드온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부쩍 숙부가 생각났다.

그자의 배신도 그 자격지심에서 시작되었을까 하고.

제 머릿속을 스친 생각의 단편 때문이리라.

레브는 형제의 자리를 음습하게 뺏은 숙부의 현재가 아주 잠깐 궁금해졌다.

* * *

콰릉. 콰르릉.

번개가 튀는 밤하늘은 마치 대낮 같았다.

사위가 환해질 때마다 초췌한 남자의 등이 연달아 움찔거렸다.

헝클어진 진한 푸른색 머리카락.

양 손바닥에 가려진 얼굴 사이로 드러난 푸른색 동공.

중년 남자는 무언가를 보곤 흠칫해서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흐읏.”

그러다가 창백한 손을 뻗어 탁자 위, 산호 껍데기를 집어 들었다.

허겁지겁 정신없는 움직임이었다.

그 탓에 껍데기에 든 분홍산호 가루가 전부 손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것조차 아까운 듯, 남자는 체신도 버리고 손을 마구 핥았다.

싹싹. 싸악싹.

혓바닥의 타액만으로 살가죽이 녹겠다 싶을 즈음.

부르르 몸을 떤 남자의 눈자위가 탁해지고 몽롱해져 갔다.

약에 취한 탓인지, 아니면 죄책감이 만든 악몽인지.

하얀 번개가 멈췄는데도, 남자의 앞에 선 그것은 여전히 ‘카티오.’라고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현실조차 악몽으로 만드는 그자가 또 찾아왔다.

“아드리아아아안!”

독을 먹고 토해낸 벌건 핏물이 시커멓게 얼룩진 그자의 입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치떠진 그자의 눈.

마력이 점액질처럼 뭉쳐 새어 나오던 그자의 몸뚱어리.

선뜩한 모습들이 남자를 똑바로 직시해 왔다.

신뢰가 산산이 부서진 채 자신을 보던 그 순간을 어찌 잊을까.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모든 게 네놈 탓이다! 네가 죽은 것도, 네 가족이 죽은 것도!”

남자, 아니 루하흐 가주는 새된 외침을 토해냈다.

아드리안 루하흐, 전대 가주이자 그의 형.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같잖은 그 이유만으로 모든 영광을 앗아 간 자다.

그리하여 그를 습하고 눅눅한 지옥의 구덩이에서 살게 한 놈이고.

루하흐 가주는 벌건 눈알을 까뒤집으며 의자에 널브러졌다.

“첫째로 태어난 네놈 잘못이다! 크하하핫.”

그에게 최초의 기억이 생긴 후부터였다.

자신의 형은 첫째란 이유로 능력이 특출났고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니 후계자 자리도 손쉽게 꿰차지 않았던가.

결단코 모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렇기에 형이 빛날 때마다 가주는 종종 어떤 충동에 휩싸였다.

내가 첫째로 태어났다면.

그랬다면 내 능력이 더 우월했을 텐데.

그랬다면 내가 저자보다 더 빛났을 텐데.

그랬다면 가주의 자리는 내 것이었을 텐데.

그랬다면 그 여자도…….

“후우.”

가주는 창백한 손을 치우고 실눈을 떠 앞을 보았다.

콰르릉.

번개가 번쩍 빛을 토해내는 순간에 맞춰.

빙그레.

여전히 상냥하게 미소 짓는 그의 형이 보였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저 가증스러운 미소를 찢어발기고 싶은데 허상이라 그럴 수 없으니까.

“하. 끝까지 그 더러운 웃음을.”

그러라지.

가주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사리물며 고래고래 외쳤다.

“그래 봐야 넌 패배자야! 아무도 살리지 못했어! 네 아내도, 자식도!”

내가 다 죽였지!

“네놈이 그리 아끼던 막내아들까지 전부 다 갈가리 찢어 죽여버렸다고!”

등신 같은 놈.

가주는 목을 쥐어짜며 몇 번이고 악다구니를 썼다.

그의 분노에 장단을 맞추려는 것인지, 비웃으려는 것인지.

콰르르릉.

다시금 하얀 번개가 튀었다.

바다의 포말을 닮은 섬광이 번득일 때마다 가주의 몸도 움찔거렸다.

어쩐지 저 번개는…… 아드리안, 뒈져버린 놈을 닮았다.

그러니 이런 날에만 나타나 그의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거겠지.

“용기도 없는 비겁한 새끼!”

이를 득득 갈며 욕지기를 뱉고 있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란 가주가 뭐라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홍채에 자색 연꽃이 새겨진 젊은 남자였다.

“루하흐 가주.”

산호 껍데기를 든 남자의 미소는 은은했다.

여신이 미소를 내보인다면 저러지 않을까, 싶은 농밀함은 너무나 고결해 보였다.

그랬기에 도리어 어느 한구석, 심해처럼 어두웠다.

“살리카 가주가 연통을 보내왔습니다.”

“……살리카 가주가?”

“찾아오라고 하더이다. 할 말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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