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허리까지 오는 새빨간 머리카락과 붉은 동공.
그저 하나의 불길 같은 남자가 수려한 정원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시선의 끝, 핏빛과 대비되는 검은색 꽃이 하늬바람 인양 하늘거리며 보는 이를 희롱했다.
케르도스.
꽃의 빼어난 자태에도 남자의 눈빛은 다시 없을 원수를 마주한 것 같았다.
밤을 닮은 꽃의 색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뷔트시겐을 연상시키는 칠흑에 남자의 눈가가 살풋 구겨졌다.
그래 봐야 겉으로 보기엔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알의 상태는?”
건조한 물음만큼 무감하게 남자는 몸을 틀어 뒤를 쳐다보았다.
테라스 끝에 서 있는 그와 정확히 열 걸음 떨어진 거리.
그 간격을 명확하게 지키며 남자의 수호검인 폰투스 가의 가주가 서 있었다.
수호검은 제 주군이 돌아보자 그제야 입을 달싹거렸다.
말을 해도 된다는 허락이 던져졌으니 응당.
“4대 원소를 다루는 것은 점점 수월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역시 문제는 그것인가?”
“예. 에르그 2성에서 나아가질 않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힘이 미약하군.”
“연구진들이 말하길, 3성이 될 때까지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흐음. 4대 가문을 찍어누른 황가의 힘이 겨우 그 정도라…….”
“…….”
수호검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가주의 혼잣말은 답변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 정리에 가까웠으니까.
‘이럴 땐 무조건 입을 다물어야 하지.’
그녀가 모시는 주군은 그랬다.
최측근이라도 지근거리까지 접근하는 걸 싫어했다.
또한, 가신이 주군의 속내를 짐작한 양 나불거리는 것을 혐오했다.
그렇기에 입을 열 때와 다물 때를 기민하게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이번이 그런 경우였고.
“알을 먹은 게 황가의 직계가 아니라서 그런 것인가.”
가주는 이 문제에 관해 이미 답을 낸 상태였다.
즉, 그녀의 의견은 애초부터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장의 수임에는 틀림이 없지.”
“…….”
“그러니 알의 능력을 끌어낼 연구에 박차를 가해라. 그릇이 깨지지 않는 선에서.”
“예. 명 받잡겠습니다.”
“어렵게 구한 그릇인데 망가지면 안 되지. 대체품이 없으니.”
살리카 가주의 음색은 진폭이 적었다.
신의 위치에서 관망하는 것처럼 감정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메마름.
그의 냉막함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대화를 나눌 때면 언제나 등허리가 떨려왔다.
하지만 수호검은 상체를 꼿꼿이 세우며 오싹함을 내리눌렀다.
……대체품.
사람의 가치를 쓸모와 무쓸모로 나누는 것.
가주가 가진 사고방식은 희미한 위화감을 풍겼다.
그에게 중요한 알, 아니지, 알을 먹은 라이라프스의 가치를 이렇게 결정한 것만 봐도 알잖는가.
그 때문에 이 순간의 공기가 숨 막힌단 생각이 목구멍에서 꿈틀거렸다.
“알은 그렇고.”
“…….”
“아이루스 상단주가 상단으로 복귀한 지 며칠 되었군.”
누군가의 쓸모를 결정한 가주는 무심하게 다음 주제를 꺼냈다.
라이라프스에 대해 신경 쓰는 건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가주가 그러하니, 수호검은 손을 말아쥐었다 펴며 단조로운 척 답했다.
“이후로 상단에 피바람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미심쩍다 싶은 자들을 상단주가 전부 쳐내는 통에.”
“흐음.”
“그러고선 새로운 인물들을 수혈하고 있다 합니다.”
“그 빈자리에 채워지는 게 뷔트시겐 쪽 인물이라지.”
“예.”
“뷔트시겐 그자, 이득을 독식하는군. 혼자 고고한 척은 다 하더니.”
“돈에 장사 있겠습니까. 아무리 뷔트시겐이라도.”
“그자가 무얼 취하든 중요한 것은 실패했다는 거지, 내 계획이.”
가주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군자금을 모을 수 있는 최상의 수가 막혔다.
이만으로도 상황이 좋지 못한데, 거기에 불길함 하나가 더 따라붙었다.
뷔트시겐이 어디까지 파악했는지 알 수 없다는 거.
“우선 그 음흉한 자가 어디까지 꼬리를 밟았는지 그것부터 파악해야겠군.”
“설령 의심한다손 치더라도 주군과 연관 지을 순 없을 겁니다. 흔적은 전부 지웠으니 말입니다.”
“근 30년을 내 곁에 머물렀으면서도 여전하군.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
“……죄송합니다.”
가주의 질책에 수호검은 고개를 떨궜다.
“중요한 건 뷔트시겐이 개입했다는 거다.”
“…….”
“그자가 뭔가를 눈치챘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을 터.”
불쾌한 진실이었다.
“이제부터 주력해야 할 건 뷔트시겐의 동태다.”
“예. 명 받잡겠습니다.”
가주는 케르도스를 물끄러미 보며 홀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제국을 손아귀에 쥐기.
이 계획의 가장 큰 걸림돌은 뷔트시겐이었다.
뷔트시겐.
후계자로 태어난 자가 마력핵이 없어도 흔들림 없는 그 일족.
혹독하게 춥고 메마른 땅에서 생을 피워낸 그 일족.
“정말 성가시군.”
마치 저 케르도스 같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밟아도 밟아도 결단코 짓밟히지 않는 것이.
정말이지 징글징글하다.
오죽하면 떠올리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을까.
<살리카, 사람의 가치를 네 멋대로 재단하지 마라. 네가 신이 아닌 이상 그것은 오만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거슬리는군. 매사 나의 신경을 긁어대니.”
살리카 가주는 하얀 대리석 난간 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안에서 삽시간에 거센 불길이 일었다.
흡사 핏빛 같은 붉음은 이내 검은색 케르도스를 뿌리까지 집어삼켰다.
거슬리는 것은 치워버리면 그뿐.
“도려내야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약점만 한 게 없다.
그리고 뷔트시겐 가주의 취약점은 명확했다.
“이안 뷔트시겐.”
살리카 가주는 재가 된 케르도스를 보며 주문처럼 이름을 되뇌었다.
무언가를 결정한 눈빛.
냉막함이 흐르는 가주의 곁을 수호검은 묵묵히 지켰다.
저벅.
그러다 푹신한 융단을 밟는 소리에 수호검이 슬쩍 뒤돌아보았다.
지근거리에 동공이 특이한 젊은 남자가 오연하게 서 있었다.
어쩐지 음습함을 풍기는 이의 등장에 수호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반응에 도리어 젊은 남자는 비소 같은 인사를 보냈다.
사람을 깔아볼 땐 언제고, 가주를 향해선 무척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살리카 가주님.”
“……루하흐 가주가 왔나 보군.”
“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흐음. 상단의 일이 어그러졌으니 대책을 마련해야지.”
* * *
《동공에 특이한 문양이 있는 남자 말입니다. 그런 문양은 일부 이종족이나 정령서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 그에 대해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단서가 적은바. 아이루스 상단과 연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아예 루하흐나 살리카 가주와 접점이 있는 자들로만 조사했습니다. 그렇게 범위를 좁히다 보니 후보군 몇을 추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 그자의 얼굴을 또렷하게 알지 못하는 터라, 후보군 모두 더 자세히 추적해봐야…….》
“흐음.”
이안은 칼브란이 보내온 서신을 읽어내려가며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을 드러내는 묵직한 리듬이 그의 손끝을 울렸다.
서신의 내용은 ‘그 남자’에 관한 거였다.
아이루스 상단의 단주였던 여자와 밀접하게 연관된 그 남자.
“루하흐나 살리카 가주와 계획을 함께 도모하는 자라…….”
이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고 있는데.
기웃기웃.
자꾸만 서신에 그림자가 져서 이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녀석도 관심이 많나 보다.
잔뜩 쭈그려 채로 서신을 열심히 정독하고 있는 걸 보면.
깊은 관심을 보이는 녀석에게 이안은 추측하고 있는 바를 슬쩍 꺼내 보였다.
“그런 위치에 있는 자는 몇 안 되겠지? 있다면 발리올, 황가, 정령사 협회 중 하나?”
[거기서 황가는 빼라. 굳이 반란을 꾸밀 까닭이 없으니 말이다.]
“글쎄.”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다.]
“모르지. 마력핵 없는 황자가 태어나지 않은 후론 황권이 약해졌잖아. 이 틈을 타 방계 혈족 중 누군가가 야욕을 드러냈을지도.”
“…….”
무심히 흘린 이안의 말에 녹스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살리카 가주의 야욕에 황가를 한 스푼 끼얹는다?
이보다 더 완벽한 그림은 없었다.
녹스의 발 굴림이 빨라지자, 이안은 진정하라며 녀석의 노란 발을 잡았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 남자가 황가의 일원인지, 아닌지.”
[끄응.]
정작 한숨을 뱉고 싶은 건 이안이었다.
남자에 관해선 아는 게 전혀 없으니까.
지난 생에 마주친 적도, 소문으로나마 들어본 적도 없다.
거기다.
‘예언서에 적혀 있지도 않은 인물이지.’
남자는 숨은 그림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존재였다.
하여 손톱 밑 거스러미처럼 걸리적거렸다.
‘설마…… 예언서의 저자도 남자에 대해 몰랐던 건가?’
이렇게 따지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황실의 비밀까지 세세히 적혀 있던 책에 실리지 않은 정보라니.
“대체 정체가 뭐지?”
[정체가 미지수인 만큼 변수가 많아지겠구나.]
“변수는 곧 위험으로 직결되는데…….”
천 길 낭떠러지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변수를 만난 셈이다.
절대로 가벼이 보아선 안 되는 문제라 이안은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수수께끼로 두지 않으려면 ‘늑대의 그림자’를 가동해야겠어.”
[가주 직속인 최정예 정보부?]
“어.”
[황제의 속옷 색깔도 알아내는 그것들을 쥐어짜면 단서가 나오려나.]
나올 것이다.
아마 칼브란이 햇볕에 말린 걸레마냥 죽도록 쥐어짤 테니까.
이다음은 정보부의 일이었기에.
그들로부터 추가 정보를 들은 후 그것을 토대로 유추해봐도 될 터.
그렇게 일단락지은 이안은 나머지 서신을 마저 훑었다.
칼브란이 보냈다 하면 열 장이 기본이라 읽을거리가 아직도 넘쳐났다.
《아, 그리고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밀서 말입니다. 데클렌에게 알아봐 달라 했던.
명을 완벽히 수행하고 싶었지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도 레브 도련님에게 말한 것 외엔 아는 바가 없다 합니다.
하나 이 유능한 칼브란의 사전에 실패란 있을 수 없지요. 해서 머리를 굴려봤습니다. 루하흐 말고 발리올에도 비슷한 밀서가 있다면?
혹여 도련님께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가주님께서 나서기로 하셨습니다. 발리올의 밀서에 관해선 차후…….》
역시 유능한 칼브란.
믿음직했기에 정보의 부족에도 걱정을 덜 수가 있었다.
다만 다른 쪽으로 걱정되기는 했다.
자신의 부탁이라면 없던 의욕도 불태우는 칼브란을 알기 때문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랬다고, 정보부를 밤낮으로 갈아 넣으며 일을 진행하지는 말고 천천히…….》
이안은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마음을 전달했다.
벌써 정보부의 원망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정성스레 답장을 쓰는 이안의 곁에서 녹스가 고갤 비틀며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천천히’란 단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였다.
[왜 이리 느긋하지? 평소 일을 추진할 땐 돌진하는 멧돼지 같더니.]
“정보전이잖아.”
[……아.]
“지금까진 현장 임무였다면 남자의 정체나 밀서는 물밑 작업이야. 정보를 얻는 게 주력이니까.”
[하긴. 정보전은 이안 네놈이 조급해한다고 물살을 탈 일이 아니지.]
“그렇지.”
없던 변수가 생겼기 때문일까.
답신을 보내고도 이안은 깊은 야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지러이 뭉쳤다 흩어지는 상념의 끝.
“흐음.”
이안은 새까만 어둠 너머를 응시하며 살리카 가주를 떠올렸다.
말로의 탑에서 가져간 알이 진짜라고 믿고 있을 살리카 가주.
그자는 알이 자신의 야욕을 이뤄줄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실컷 뺑이 좀 쳐보라지.’
가주의 야욕은 2년 동안 정체되며 늦춰질 수밖에 없다.
녹스가 알에 건 환술이 2년간은 짱짱할 테니까.
헛된 노력을 계속 기울이겠지.
정점을 찍지 못하는 그 힘이 사그라들 줄도 모르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4대 원소를 다루는 사냥개를 앞세워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자는 아니지만.’
가주가 계획했던 것들이 조금씩 어그러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언제나 고요하게 일을 추진하던 그자의 사고는 어디로 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