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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60화 (60/214)

제60화

다음날 새벽.

이안은 거센 눈 폭풍을 가르며 말로의 탑으로 향했다.

정체불명의 남자.

그리고 음흉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살리카 가주.

하나의 실타래로 뭉쳐진 이것들은 그에게 있어 불안 요소였다.

“후우.”

지난 생을 알고 있어도 늘 이렇다.

그들, 그들의 삶을 공유해 보지 않은 이상 정보는 단편적이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이기에.

이는 변수가 될 수 있어서 불안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것을 제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강해지면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변수에도 대처가 가능해질 것이다.

하여 탑으로 가는 중이다. 지금보다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끼이익.

말로의 탑에 도착한 이안은 석문을 열어젖히곤 안으로 들어섰다.

수호자의 신상과 네모난 제단뿐인 공간.

단출한 공간에서 이안의 목적지는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신상의 뒤편, 막다른 석벽이 있는 곳이었다.

거기로 곧장 직진한 이안은 우선 석벽을 찬찬히 살폈다.

벽면 가득 황실의 상징이 음각되어 있었다.

“흐음. 여기가…….”

이안은 독수리가 은색 달을 움켜쥐고 있는 부조의 달 부분을 두어 번 두드려 보았다.

투웅, 퉁 묵직한 울림이 공기를 튕겨냈다.

이는 석벽 뒤로 비어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황자는 알을 얻은 즉시 이 석벽이 활성화되는데.”

원래라면 이곳의 석벽이 열리고 계단이 나타나야 한다.

계단이 탑의 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기 때문이다.

상층, 탑이되 에테르계와 환경이 유사한 곳.

오직 황태자만을 위한 공간이다.

상층에 진입한 즉시 황태자는 ‘여신의 질문’이라 불리는 시험을 치를 수 있다.

그것을 통과하면 곧장 카르디아 1성이 될 수 있고.

물론 4대 원소를 다루는 황자에게 등급은 무의미하지만.

‘일반적인 기준으로 설명하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마력핵이 생기자마자 페이라조 1성에서 카르디아 1성으로, 이른바 초고속 성장을 한다는 거다.

“막혔다는 건…… 아직 자격이 없단 건가?”

“이안, 내가 누차 말하지 않았누?”

약간의 실망이 담긴 이안과 달리 녹스의 음색은 한없이 고점이었다.

혹시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기 때문이다.

자격 없는 자가 상층에 진입하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녹스는 석벽이 열리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입을 놀렸다.

“상층으로 가려면 4대 원소를 전부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알을 얻었으니까 혹시나 싶었지.”

“뭐든 때가 있는 거다.”

“꼼수를 쓰기도 전에 얄짤없이 막혔네.”

“천천히 가자, 천천히. 이안 네놈 벌써 페이라조 3성의 고리를 절반 가까이 채웠다.”

“더 강해지면 좋잖수.”

이안은 석벽 앞을 떠나지 않았다.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두고 돌아서려니 못내 아쉬운 것이다.

하여 남은 꼼수가 있을까 하고 서성거렸다.

본래 주인이 아닌 그가 알을 먹는 안배, 그게 주어졌다면 혹여 다른 안배도 주어지지 않았을까, 하여.

남들이 보기엔 무모해 보일지라도 나름의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그래서 이안은 석벽 여기저기를 꼼꼼히 관찰해보았다.

독수리의 머리통, 독수리의 날개, 독수리의 발톱.

조류의 해부도라도 그릴 것처럼 뜯어보고 있길 한참.

이안이 포기를 않자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기어이 녹스가 이안의 목덜미 쪽 코트 자락을 물었다.

“오랜만에 태워주마. 가자.”

“흠.”

“가자니까.”

“지금은 방도가 없는 것 같으니까…….”

이안은 희미한 아쉬움을 삼키며 탑을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아직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적들과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감.

이 아슬함 사이에서 이안은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이안의 심정이 어떨지 얼추 짐작이나마 해 볼 수 있었기에.

녹스는 쉬엄쉬엄하자며 노란 발로 이안의 정수리를 꽉꽉 눌렀다.

“다시 말하지만 강해지는 것에도 때가 있다. 단계가 있고.”

“…….”

“그러니 서둘지 마라.”

고집스레 다문 이안의 입이 열리질 않았다.

이럴 때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 고집을 익히 아는 녹스는 한숨을 쉬곤 말을 선회했다.

“더는 잔소리 안 하마. 루체와 바둑이나 두러 가자.”

“어. 집에 다녀오는 거랑 과제가 겹쳐서 며칠 못 갔으니 오늘은 가 봐야지.”

“내 장담하는데, 루체 그놈 완전 심통 부릴걸?”

“큭큭큭.”

“각오 단단히 해라. 쌍둥이 아니랄까 봐 고놈도 로르만큼 밴댕이 소갈딱지니.”

* * *

예상대로였다.

“바둑판을 만들어 오는 줄 알았다.”

여지없이 삐딱한 말투.

의자에 방만하게 앉아있는 루체의 모양새가 어째, 평소보다 배는 삐뚜름했다.

파이프 담배를 뻑뻑 피워문 입매 또한 꽤나 비틀려 있었고.

‘음. 일정이 바빴다곤 해도 열흘 동안 안 왔으니 그럴만하지.’

루체의 엇나감을 수긍한 이안은 손을 설렁설렁 흔들었다.

“날 엄청 기다렸구먼?”

“누가 오매불망 기다렸다고.”

“그 맘 내, 다 알지. 격하게 환영해도 모른 척해줄게.”

“흥! 건방진 애송이가 느물거리기까지.”

이안은 한쪽 눈을 능글맞게 찡긋거렸다.

루체가 아무리 불퉁하게 굴어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녀석의 까칠함은 솔직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거니까.

사실 루체는 제가 둥지에 찾아오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기다린다.

항상 문 앞까지 나와 있다, 그의 머리카락이 보인다 싶으면 후다닥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고.

미처 숨기지 못한 사자 꼬랑지를 길게 남기며 말이다.

그러니 루체의 거친 표현들은 그저 백사자의 애교일 뿐이다.

물론 이 사자가 애교부린답시고 앞발을 휘두른다?

그러면 제 머리통이 아주 예쁘게 터지겠지만 말이다.

이안은 생각의 끝머리를 접으며 눈꼬리를 둥글게 접었다.

“늦은 만큼 벌충하고 갈게.”

“저거 표정이 요상해지는 거 보니 뭔가 찜찜하군.”

“전혀.”

“애송이 네놈이 그딴 표정을 지을 땐, 괴상한 속내를 감추고 있을 때뿐이다.”

“허, 억울한데? 나보다 해맑은 인간이 어딨다고.”

“해맑아? 그딴 건 모르겠고. 네가 본심을 잘 감추는 인간이라는 건 알지.”

검은 돌과 하얀 돌.

이안과 루체가 말로 치고받는 동안 바둑판의 공방도 치열하게 오갔다.

누구 하나 물러섬이 없었다.

양보 없는 격전이 이어지길 세 시간.

이안은 뚜둑 소리가 나는 뻐근한 목을 살살 돌렸다.

오늘치 바둑을 끝낼 때마다 하는 마지막 의식 같은 거였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곧 전투학 수업이 시작될 때라서.”

“벌써 시간이 이리 됐누.”

“흐흐. 나랑 있는 시간이 엄청 재밌었나 봐? 시간 빨리 간다, 타령하는 걸 보니.”

“재밌긴 개뿔. 난 흥 따위 없었다! 애송이 네놈 수준에 맞춰 어울려 주느라.”

루체는 끝까지 속마음과 정반대인 말을 내뱉었다.

그래놓고 ‘내일 또 올 거지?’라는 곁눈질을 하며 그를 흘끗 보았다.

투명하긴.

루체가 보내는 무언의 신호에 이안은 시익 미소를 내보였다.

하는 짓이 귀엽다.

“내일은 조금 더 오래 있다가 갈게. 오늘은 말로의 탑에 들렀다 오느라 늦은 거라.”

“…….”

‘탑’이란 말에, 이안을 응시하는 루체의 시선이 밀랍 눌어붙듯 길어졌다.

뭔가를 짐작해보는 것 같은 시선.

이에도 이안은 어물쩍 넘기며 어느 때보다 느긋하게 ‘갈게’란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시원하게 돌아서는데, 루체의 부름이 뒤통수에 꽂혔다.

“어이, 애송이.”

“어?”

“알을 얻었는데도 어이하여 말로의 탑에 들렀지?”

“아아.”

이안은 동동 떠다니는 빛 뭉치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라나토스 이곳저곳을 볼 수 있는 일종의 천리안.

이걸로 제가 탑에 들어간걸, 루체가 본 모양이다.

“뭐 그냥? 나한테 필요한 게 있을까 하고.”

“…….”

이안의 능청에도 루체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빤히 보기만 했다.

그러길 얼마쯤.

슬렁슬렁 몸을 일으킨 루체가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작스레 그를 덮쳤다.

콰아앙!

뒤로 넘어진 이안과 그의 몸을 으깰 듯이 누른 루체.

[이안!]

징조 없는 습격에 녹스는 즉각 힘을 개방했다.

마력을 운용한 그 즉시.

촤륵. 촤르륵.

녹스의 발밑에서 금색 사슬이 솟아나더니, 빛 뭉치가 그를 에워쌌다.

빛의 감옥!

움직임이 봉쇄당한 녹스는 당황했다.

지금껏 우호적이었던 루체가 왜 삽시간에 태도를 바꾼 것인지.

“무도한 짓은 그만둬라, 루체.”

“내게 명령하는 것인가? 그럴 권한이 수호자에겐 없을 터인데.”

“수호자에게는 있다. 알을 얻은 자를 보호하는 것이 내 의무이니. 너 또한 그런 맹약에 묶여 있지 않나.”

“비슷하나 엄연히 다르지. 관리자가 지키는 것은 탑이니.”

“…….”

“한데 말이다, 수호자.”

로르의 음색은 한없이 느렸으나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묵직했다.

“의무를 행하는 자치곤 약하군.”

“……!!”

“고작 빛의 감옥 하나 파훼하지 못하는 수호자라니. 이래서 결속자를 지킬 수 있겠나?”

“흥. 문제없다.”

“끝까지 오만하군.”

루체의 눈길이 빛의 감옥을 벗어나려는 녹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약간의 흉흉함이 배인 동공이 이동해 정착한 곳은 이안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애송이 넌 느긋하고.”

압박감이 심할 텐데 이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덤덤했다.

애송이 주제에 평정심이 깨지질 않으니 루체는 앞발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으드득.

루체의 앞발에 눌린 이안의 갈비뼈에서 실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아, 내가 살려달라 애원하면 살려주나?”

“글쎄.”

“봐, 힘의 차이란 게 이렇다니까. 내가 벗어날 수 있으면 애원할 필요 없고. 쉽사리 벗어날 수 없으면 상대의 자비를 바라야 하고.”

“잘 아는군, 그 차이를.”

“처절하게 겪어봤거든.”

“그래서 탑의 상층이 개방 안 된 걸 알면서도 그곳에 들른 건가? 꼼수를 바라고?”

“뭐 대충 그런 거?”

“어중간한 힘이 주는 부당함을 아는 네놈으로선 강해지고 싶겠지. 하나…….”

이안이 탑에 들른 것에 대해 루체는 굳이 언급했다.

애송이의 성정 때문이었다.

부동심(不動心)을 가진 놈이라 웬만한 일엔 흔들림이 없는 편이나…….

일단 원하는 게 생기면 그걸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팔다리가 없으면 이로 물어뜯어서라도.

이런 독한 놈이 탑의 상층을 열고자 작심한다면, 기필코 열 것이다.

그게 뭐가 문제냐 하겠지만…….

‘4대 원소를 갖지 못한 자가 시험을 치르려 하면 ‘즉사’하지.’

‘반드시’ 말이다.

루체가 앞발을 떼면서 말을 덧붙였다.

“탑의 상층은 네놈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괜한 생각 말고 힘이나 더 키우거라.”

루체의 짙푸른 동공이 넘실거렸다.

몰아치는 파도와 같으나 결코, 사납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의 의도 때문인지 물비늘 이는 바다처럼 다감했다.

모든 것을 따스하게 감쌀 것 같은 온도.

일순간에 팽팽한 공기가 느슨해지자 이안은 갈비뼈를 문댔다.

“그걸 내가 모를까 봐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쓴 건가?”

나불거리는 이안의 표정에서 어째 불길함이 읽혀왔다.

어느 때보다 능글맞아서 헛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달까.

주둥이를 막아야겠단 직감이 든 찰나.

“크크큿. 루체 넌 ‘애정’이 과격하다니까.”

“……애정.”

느물거리는 인간 때문에 루체의 수염이 파르르 떨려왔다.

뻑뻑. 뻑뻑뻑.

괜히 말을 꺼내 화를 자초했단 생각에 루체는 애꿎은 파이프 담배만 물어댔다.

‘애정’, 저딴 쉰내 나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채 탑의 상층을 열려 했다간 죽는다.

그 심각성을 알려주기 위해 부러 공격했을 뿐인데.

고작 탑의 관리자 하나 감당하지 못하면서 만용을 부리지 말라 경고하려던 것뿐인데.

단지 그뿐인데, 그게 애저ㅇ…… 에잇, 그딴 헛소리로 치환될 줄은.

“하!”

헛소리 안 들으려면 다신 애송이와 상종을 말아야지.

루체의 뇌리엔 그 생각만 빼곡히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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