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강대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이안이 몸을 돌린 찰나.
바스락.
엘다 나무 뒤편에서 웬 노인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허허. 노부의 장난이 지나쳤나 봅니다.”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며 눈가를 접은 노인.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인자한 할아버지의 그것이었다.
형형한 안광조차 깊숙이 감추어서 더더욱 그리 보이는 인물.
아무리 사람 좋은 척을 해도, 오랜 세월 벼려진 기운이 다 감춰지진 않았다.
그 탓에 아이들은 서로에게 더욱 바싹 엉겨 붙었다.
반면.
“어? 1장로님.”
몇 번 마주쳤다고 올리브는 서슴없이 친밀감을 표출했다.
“이안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껄껄. 용건 있는 놈이 걸음을 해야지.”
“헤헤. 아무튼 반가워요. 나 되게 1장로님 보고 싶었는데.”
순도 높게 발랄한 똥강아지 옆, 상대를 확인한 레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1장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척이나 딱딱한 꾸벅거림이었다.
그래도 거기에는 나름의 반가움이 담뿍 들어가 있었다.
제각각인 무리 사이.
눈썹머리를 올린 이안은 성큼 1장로 가까이 다가갔다.
뜻밖이라도 1장로의 방문이 더할 나위 없이 기꺼웠기 때문이다.
타지에서 동향을 만난 기분이랄까.
“얼떨떨합니다. 이곳에서 1장로님을 뵐 줄은.”
“도련님이 거하는 곳이니 한 번쯤 와보고 싶었습니다.”
“이리 걸음 하셔서 직접 보니 어떤가요?”
“대기가 무겁습니다. 제국의 어느 곳보다 마력의 밀도가 짙어서.”
1장로는 그라나토스의 특이점을 바로 집어냈다.
이 숲은 오히려 등급이 높을수록 활동하기가 힘이 든다.
‘성’이 높을수록 압력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장로의 안색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이안은 ‘아차’ 싶어 서둘러 모닥불 안쪽을 정리했다.
“아. 여독에 피곤하실 터인데 제가 계속 1장로님을 세워두었군요.”
1장로가 편히 앉을 자리를 마련한 뒤.
탁탁.
어서 앉으라는 것처럼 이안은 담요가 깔린 바닥을 두드렸다.
“일단 따뜻한 곳에 앉아 몸을 녹이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서둘 필요 없겠지요. 시간은 많으니.”
이안이 마련해준 자리에 1장로는 등허리를 세운 채로 앉았다.
반듯하고 곧은 자세, 단지 자세일 뿐이었다.
그러나 정점에 선 자가 지니는 특유의 기도 때문일까.
장로급을 볼 일이 없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저만치 떨어져 이쪽을 연신 흘끔거렸다.
감출 수 없는 동경과 감탄이 듬뿍 묻어난 눈빛을 한 채로.
난생처음 보는 녀석들의 모습에 이안은 둥근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볼수록 귀엽다.
얼마쯤의 말랑함이 녹은 손길로 이안은 다관에 아케랑코를 우렸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1장로님.”
“아닙니다. 오랜만에 뷔트시겐을 벗어난 터라 재미있었소이다.”
“그것참 다행입니다.”
“몇 달 사이 제국은 또 변했더이다.”
“그만큼 볼거리도 많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 노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더군요.”
이안은 자연스럽게 상황을 주도했다.
그의 매끄러움에 1장로의 검은 눈자위로 이채가 어렸다.
갑작스레 손님을 맞은 상황에서도 불편함이나 불쾌감을 자아내지 않고, 도리어 주도권을 가진다?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1장로로선 그저 이안이 신기하고 흥미로울 따름이었다.
‘역시나 자질이 남다르군.’
솔직히 이 에루리안에서 썩히기에는 아까울 정도였다.
안타까움이 스미자 1장로는 자신도 모르게 속엣말을 내뱉고 말았다.
“당장 돌아…….”
“예?”
“아니, 아닙니다. 크흠. 이곳의 하늘도 참 보기 좋습니다.”
말머리를 급히 돌린 1장로는 도로 진중함을 꾸몄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일이 꼬이도록 만들거나 말아먹지 않으려면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이번 일이 그러했다.
그의 목적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는 이안을 데려가는 것이기에.
‘가주님의 만류에도 강행한 안건인데 실패할 순 없지.’
냅다 들이밀었다간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잖은가.
“크흠. 이 노부가 왜 왔나 싶겠지만, 별일이 있어 온 건 아닙니다.”
별일, 있어 보였다.
“그저 도련님을 보고 싶어 왔을 뿐이니, 부담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예. 언제든 절 보러 오시는 거라면 환영입니다.”
이안은 1장로의 시치미를 눈치채지 못한 척 그냥 넘겼다.
‘흐음. 중한 얘기를 할 모양이군.’
일족의 1장로는 수장을 보좌하는 자리였다.
즉, 똥 쌀 시간도 없이 바빠서 과로사하기 십상이라는 의미와 통한다.
치여 죽을지도 모를 업무를 내팽개치고 자신을 보러 왔다?
적어도 1장로 그에게는 이곳에 걸음 할 만큼 중한 일이 있다는 거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이안은 꿀떡 삼키고선 모닥불을 크게 키웠다.
굳이 조바심낼 필요는 없잖은가.
이대로 대화하다 보면 1장로가 어련히 말을 꺼낼 터인데.
“따뜻하게 데운 아케랑코입니다. 피로를 푸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안은 느긋하게 차까지 우려 1장로에게 건넸다.
찻잔을 받아든 1장로는 더할 나위 없이 푸근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소이다.”
“설산을 감상하며 마시는 차도 좋지만, 녹음 짙은 숲에서 마시는 차도 그만이랍니다.”
“어디든 마음먹기 나름 아니겠소이까.”
호록.
1장로는 우아하게 차를 들이켜 깔깔한 목구멍을 축였다.
단비가 내린 땅처럼 성대가 금세 물렁물렁해졌다.
이때쯤 되자, 1장로는 질질 끌지 않고 품고 있던 속내를 꺼내 보였다.
“하나, 무엇이든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1장로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디든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그것처럼 자리야 만들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더 빛나는 자리가 있다면 그것을 쥐어야지요.”
“아무래도 1장로님께서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 봅니다.”
“옳게 보셨습니다. 말을 빙빙 돌려 무엇 하겠습니다. 도련님께 원로원의 의견을 전하려 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중앙 아카데미로 가십시오.”
이안이 대답을 하기도 전.
“헉!”
외마디 외침이 아이들에게서 굴러 나왔다.
소리가 난 쪽으로 1장로의 시선이 반듯하게 향했다.
조금 떨어진 거리, 그를 보는 아이들의 눈이 큼지막하게 벌어져 있었다.
당혹과 놀람 어느 사이.
안절부절못했으나 그래도 올 게 온 거 아니냔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 정돈 각오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이들은 급격히 풀이 죽어 시들시들해졌다.
그들의 모습이 등을 돌리고 있는 이안에겐 보이지 않으련만.
“원로원의 요청은 거절하겠습니다.”
불안을 달래려는 것처럼 이안은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미련이 묻어난 투도, 아쉽단 투도 아니었다.
이에 아이들의 안색은 되살아났지만 1장로는 눈썹을 꿈틀했다.
“내가 아는 한, 누구보다 이성적인 사람이 도련님입니다.”
“…….”
“그렇기에 이 노부는 연유가 궁금해지는구려. 단지, 정에 이끌려 그런 결정을 한 것 같진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곳에서 얻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얻어야 할 것들이라……. 그게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힘입니다. 누군가를 지킬 힘.”
“그것이라면 더욱더 중앙으로 가는 것이.”
“고집부리는 것 같겠지만, 반드시 이곳이어야만 합니다”
이곳이어야만 한다.
이 그라나토스만이 가지고 있는 짙은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선.
4대 원소를 담을 그릇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선, 여기여야만 한다.
‘아무래도 직접 보여줘야 할 것 같군.’
이에 대한 단면을 보여줘 단호한 1장로를 설득해야 할 때였다.
하여 이안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백 마디 말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듯합니다.”
“이 노부를, 나아가 원로원을 설득시킬 수 있는 정도이길 바라겠소. 도련님께서 내게 보여줄 것이 말이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안은 자신감을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움직이자, 덩달아 1장로의 고개도 따라 올라갔다.
“그러려면 일단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1장로님, 자리를 옮길까요?”
* * *
말로의 탑 결계 근처.
이안은 하얀 탑을 응시하며 운을 뗐다.
“이 정도는 되어야 1장로님을 설득할 수 있겠지요.”
“자못 궁금해지는군요. 자신만만하니.”
“당장은 마력핵이 깨질까 욕심껏 흡수하진 못하고 있습니다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어진 마력 회로를 열어젖혔다.
제어하던 것을 풀어버리자 그의 몸은 거대한 바다가 되었다.
“…….”
깊고 무한한 그릇을 당장 채우려는 듯.
묵묵히 고요하던 그라나토스의 짙은 마력이 그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유성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무작스럽게.
쏴아아악.
밀려드는 마력의 폭압적 흐름에 이안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빨아들이는 양이 초속의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그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검은 불길처럼 보일 정도일까.
“크읏.”
아직은 제가 감당하기 힘든 마력의 양.
하여 지금껏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흘려 보내버린 것들이었다.
그 흐름조차 억지로 잡아채 흡수하자 이안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뇌수를 직접 손으로 주무르는 것 같은 작열감이 일었고.
“이, 이건.”
이안의 형세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1장로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정수리의 백회혈부터 발바닥의 용천혈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마력 회로.
“……히파르코스.”
이는 만 명 중 하나꼴로 나타나는 특이체질을 일컫는 단어이다.
이 체질을 가진 자는 마력을 ‘외부’에서 흡수할 수 있다.
내부에서 생성해내는 남들과 다른 그릇을 가지고 있다는 뜻.
“이 체질 때문에 가주님께서도 열 살 때까진 무누스 설산에서 사셨는데.”
1장로는 감회에 젖어 중얼거렸다.
히파르코스가 특별한 건 자신과 상성이 맞는 환경만 찾으면, 그곳의 마력을 무한으로 빨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서 가주는 성지라 불리는, 역대 가주들이 잠든 무누스 설산에서 살았었다.
가주가 다섯 살에 페이라조 2성이 될 수 있던 비결이었으니.
“이렇게 여신의 축복이 또 한 번 뷔트시겐을 굽어살피시는군요.”
1장로의 음색은 감격에 절어 사르르 떨려왔다.
이안이 돌아갈 수 없다 했던 사정을 이해한다는 뜻이 배어있는 음색.
그가 쉬이 고집을 꺾자 이안은 찬찬히 마력 회로를 닫았다.
“후우.”
가쁜 호흡을 가다듬은 뒤.
이안은 조금 느린 말투로 한 가지 부탁을 끼워 넣었다.
“장로님들의 말을 무시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계속 머무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
“학기 말까지입니다. 그때까지만, 다른 장로님들의 결정을 막아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기간을 언급하는 걸 보니 혹 또 다른 연유가 있으신 겝니까?”
“파라칸시스 시합에서 불의 가시를 얻고자 합니다.”
“불의 가시를……?”
* * *
1장로는 소나기 같았다.
예고 없이 왔다가 난데없이 떠났으니까.
<도련님이 정진할 수 있게, 이 노부가 원로원을 정리하겠습니다.>
1장로의 마지막 말.
그의 단호함을 떠올린 이안은 창가에 앉아 엄지에 끼워진 반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때마다 검은색 반지 위로 이른 아침의 남색 빛이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