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63화 (63/214)

제63화

“1장로님은 설득했는데…….”

“어째 똥 싸다가 끊긴 표정이구나. 혹 다른 장로들을 염려하는 것이냐?”

“어. 아카데미를 옮기란 요청이 원로원의 결정이랬으니.”

원로원의 결정을 아무 때나 쓰는 말이던가.

전쟁의 참가 여부를 결정할 때, 일족에서 누군가를 추방할 때, 일족의 이익과 관련한 일일 때.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표결할 때 쓰는 말이다.

‘아홉의 장로 중 일곱 이상이 찬성해야 1장로가 움직이지.’

이는 이안의 거취에 대해 장로들의 뜻이 굳건하다는 것이다.

하여 정리든 설득이든 쉽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1장로는 이안의 가능성을 눈으로 보았지만 다른 장로들은 본 게 없으니까.

“앞으로 장로들의 등쌀이 장난 아닐 것 같다, 녹스.”

“영감탱이들의 특권이지. 고집부리는 거.”

창틀에 누워 이안의 반지를 물끄러미 보던 녹스가 대꾸했다.

녹스의 시선에 이안은 수긍의 의미로 손을 까닥거렸다.

“하긴. 우리 장로님들의 고집이 쇠심줄보다 질기긴 해.”

오죽하면.

<밥 먹은 개수만큼 고집을 키운 질긴 영감탱이들.>

<지옥불 한 귀퉁이에서 혓바닥만 단련하는지 입을 다물 줄 모르는 독사들.>

아버지가 원로원이라면 치를 떨까.

어쩌면 예측보다 더 1장로님이 고생 좀 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되었다. 너와 약조했으니 1장로가 알아서 잘 막아주겠지.”

녹스가 걱정을 사서 하지 말라며 이안의 상념을 잘라버렸다.

그러더니 더 말이 나오지 않게 아예 주제를 돌려버렸다.

“요 반지를 봐라. 본디 유연한 자가 통도 아주 큰 법이다.”

“1장로님이 좀 통이 크시긴 하지.”

“하찮은 네놈에게 9칸짜리 정령 보관석을 선물로 준 것만 봐도.”

“후훗. 9칸이라 그런가?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다.”

이안은 너스레를 떨었지만, 솔직히 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1장로가 선물까지 챙겨서 자신을 만나러 올 줄은.

그것도 9칸짜리 정령 보관석을 들고서 말이다.

보통 정령 보관석은 3칸이 기본이고, 여기서 한 칸이 추가될 때마다 저택 한 채 가격이 얹어진다.

후덜덜한 가격.

그래서 ‘워툼’이라고 불리는 9칸짜리는 대개 장로급 이상만 사용한다.

결속한 정령이 많지 않으면 돈 낭비니까.

그에 대해 모르지 않을 1장로가 선물을 주었다는 것,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날 뷔트시겐으로 인정한다는 뜻이겠지.’

이안은 충만함이 깃든 손길로 검은색 반지를 연거푸 돌렸다.

<크흠. 생각해보니 말입니다, 도련님.>

떠나기 직전, 1장로가 대뜸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헛기침해대며 내민 것.

그건 일족의 상징인 늑대 모양의 반지였다.

<이 노부가 정식으로 축하선물을 준 적이 없더군요.>

<주신 적 없다니요. 저번 연회에서 제 장단에 어울려 주신 것만으로 넘치게 받았습니다.>

<겨우 그깟 거로 되겠습니까. 눈에 뵈지 않는 허상으로.>

<1장로님의 지지가 ‘그깟 거’는 아니지요.>

이안은 넘치게 받았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1장로가 두고두고 곱씹을 증거라며 잽싸게 반지를 쥐여주었다.

‘오다 주웠다.’란 모양새로 그러더니.

<실질적으로 남는 게 있어야 두고두고 자랑하지 않겠소이까.>

올 때 마냥, 갈 때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떠났더랬다.

얼마쯤의 생색과 얼마쯤의 멋쩍음을 남긴 채로.

“하여튼.”

이안은 반지를 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뷔트시겐 가에서 내보였던 편안한 웃음.

노글노글해진 이안의 모습에 녹스는 반지를 콕콕 찔렀다.

“요놈 차암 물건일세. 1장로와 가주 사이에서 살아남다니.”

“그러게. 고래 사이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새우? 그쯤 되려나.”

“딱이구나, 그 표현.”

어제 정오, 그러니까 1장로가 이안을 만나러 오기 직전의 일이다.

1장로는 반지 함을 오른손에 들고 워프 게이트 앞에 섰다.

어찌할 수 없는 멋쩍음과 다소의 기대감.

상반된 감정을 안고 1장로가 떠나려 할 때, 가주가 불시에 들이닥쳤다.

“어디 가십니까, 1장로.”

“가주님 아니십니까. 아, 이 노부를 배웅하러 오신 겝니까.”

“겸사겸사입니다. 이안 만나러 가는 1장로를 배웅할 겸…….”

가주의 시선이 찰나, 정말이지 아주 찰나 1장로의 오른손에 머물렀다.

일순간이라 웬만해선 눈치채지 못할 속도였다.

그러나 ‘노괴’라 불리는 아주 오래 묵은 1장로는 알아채고 말았다.

가주가 왜 절 붙잡았는지.

‘허허. 아무래도 도련님에게 줄 선물이 겹친 것 같군.’

작은 정보만으로 쉬이 유추해낸 1장로는 허연 수염을 쓸며 기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손바닥에 마력을 응집하고 있는 가주.

그의 뒤쪽에서 은신한 채로 살금살금 접근 중인, 가주의 정령.

하늘을 날고 있는 칼브란의 까마귀 정령.

워프 게이트 초소를 지키는 초소병들의 긴장된 표정.

오호라!

저를 포획하기 위한 포위망이 차근히 좁혀지고 있었다.

이때 1장로는 직감했다.

여기서 잡히면 영영 도련님에게 반지를 줄 수 없다고.

“껄껄껄. 제 손에 든 것이 궁금하신가 보군요.”

“내 아들에게 갈 선물인 듯싶어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별거 있겠습니까. 그저 손주 같은 도련님께 드릴 약소한 선물일 뿐입니다. 아주 약소한.”

“약소하다, 라.”

‘그럴 거면 놓고 가지, 뭐하러 손 무겁게 들고 가냐.’란 표정이 가주에게서 스쳐 갔다.

달려들 준비가 끝난 가주와 그사이 더욱 완벽해진 포위망.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1장로는 여유롭게 가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순전히 약 올리기 위함이었다.

“배웅해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나 날이 벌써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이 노부는 바빠서 이만.”

“1장로!”

달려드는 가주에게 웃어 보인 1장로는 워프 게이트의 검은 빛에 휩싸였다.

보란 듯이 반지를 흔들면서 말이다.

“푸하하하핫.”

이안은 반지에 얽힌 비화에 눈물이 나도록 웃어젖혔다.

“귀엽지 않아, 두 분?”

“팔불출이 하나 더 늘다니. 소름 끼치도록 깜찍해서 식은땀이 날 정도다.”

“왜 난 좋은데? 예전엔 몰랐던 1장로님의 새로운 면모도 보고.”

이안은 들뜸을 감아 산뜻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탁, 타닥. 다소 고양된 리듬.

마치 빗소리 같은 그 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사뿐했다.

* * *

‘운수 좋은 날’, 딱 거기에 알맞은 기분을 유지한 채였다.

이안은 발걸음도 가볍게 호노르관으로 들어섰다.

호노르관.

오직 전투학 수업, 그것도 무한 대련만을 위한 야외 연무장이다.

여타의 연무장과는 다른 이질적인 느낌의.

일단 호노르관은 무작스럽게 넓어서 담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시원스레 뚫린 천장은 눈 오는 하늘이 끝도 없이 보였고, 지면엔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에메랄드빛 호수가 여기저기 산개해 있었다.

그라나토스를 본뜬 듯한 형태.

다만 특이점이 있다면, 보라색 군집을 이룬 별이끼 나무에 영상석이 달려 있다는 것뿐이었다.

“보기에는 참 멋진데. 막상 오니까 영.”

“어우야. 벌써 기 빨린다.”

“기만 빨리면 다행이게? 난 지릴 것 같다.”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뭐 그런 느낌?”

C반 아이들은 지레 호들갑을 떨며 닭살 오른 팔뚝을 쓸어댔다.

엄살이래도 어쩔 수 없었다.

무한 대련의 악명을 과하게 주워들어서 독이 돼버린 경우였으니까.

그 탓에 앓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연신 낑낑대는 아이들.

녀석들의 야단법석을 주워 삼키며 이안은 슬쩍 입매를 위로 당겼다.

‘말은 저래도.’

진심으로 겁먹은 꼴은 아니었다.

잘해보잔 의욕의 불씨가 살금살금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이에 레브가 감독관의 표정을 지으며 이안의 팔을 툭 쳤다.

“저 의욕이면 싸워볼 만하겠는데?”

“포기만 안 하면.”

“지금껏 하던 게 있으니까 뭐. 근데 말이야. 저긴 3일 굶은 살쾡이들 같지 않아?”

레브의 눈길이 고정된 곳으로 이안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게. 아주 독이 올랐다.”

눈치를 살살 보는 B반이든, 오만한 A반이든.

저번에 A 학점을 뺏겨 자존심 상한 걸 만회할 심산인 모양이다.

낯짝에 분기가 탱천해 있었다.

특히 폰투스를 에워싸고 있는 친위대들의 기세가 만만찮았다.

독침을 쏘듯 어찌나 눈알 빠지게 노려보는지.

“참 열의가 넘치는군요. 대련 시작도 전에 벌써 이렇게 과열되다니.”

달아오른 공기의 흐름을 타고 스톨레 교수가 ‘불쑥’ 등장했다.

늦은 등장치고, 그는 대번에 흐름을 잡아챘다.

왜 이런 분위기인지 다 안다는 표정.

“지금부터 진을 뺄 필요가 있을까요. 앞으로 5일간은 이곳에서 물리도록 대련할 텐데.”

“…….”

“여러분을 보아하니 이번 대련은 더 흥미진진할 것 같군요.”

스톨레 교수는 독버섯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흐름을 명확히 끊는 듯한 화사함이었다.

아무래도 이 분위기에 관해 더는 언급하거나 개입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무한 대련의 방식을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죠.”

“예.”

“기본적으로 50분 동안 전투를 진행합니다. 전투 후 휴식은 10분이고. 밥을 먹는 시간은 30분, 수면 시간은 3시간이 주어집니다.”

극한으로 몰아가도 적정선은 있다.

“아. ‘못 해 먹겠다.’ 싶으면 ‘대련 포기’를 선언해도 됩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최하점을 받겠죠.”

“…….”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톨레 교수가 양 손가락을 맞부딪혀 튕겼다.

그러자 별이끼 나무가 보라색 빛을 뿜으며 영상석이 작동되었다.

“여러분들의 모든 행동은 저장됩니다. 이는 교수들이 이곳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전투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바로 곁에서 지켜보진 않는다.

하지만 절대 게으름을 피울 순 없는 구조였다.

만약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10분의 휴식마저 삭제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고를 어길 시엔 잠까지 잘 수 없고.

“말이 길어 뭐할까요. 그럼 사랑스러운 제자 여러분, 건투를 빕니다.”

학생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간략히 설명한 후였다.

스톨레 교수는 거치적거리지 않겠다는 것처럼 재빠르게 퇴장했다.

그렇게 교수가 홀연히 떠난 뒤.

1학년들은 각자 호노르관 여기저기에 산개해 대련 진영을 취했다.

무질서해 보여도 규칙이 있었다.

C반의 우선적인 대련 상대는 B반이었다.

A반을 상대했다간 수업의 목적이고 뭐고 내일부터 드러누워야 할 테니까.

‘부딪혀보자!’

의지를 다진 C반은 마치 짠 것처럼 이안을 쳐다보았다.

승리의 기원 토템을 보는 듯한 눈빛.

열렬한 눈빛들 가운데 몇 명은 이안과 유독 눈을 길게 마주쳤다.

감독관이자 페이라조 3성 장을 맡은 레브.

2성 장을 맡은 올리브.

1성 장이자 서기관인 오스틴 나루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특히 오스틴은 이안의 단단한 눈빛을 마주 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괜스레 마음이 들끓어서였다.

그때도 그랬다.

이안이 그를 1성 장으로 추천할 때도.

1성 중에서 가장 침착하고 실력이 출중하다면서 지목할 때도 이렇듯 마음이 술렁거렸었다.

“후우.”

누군가가 믿어주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잘해보자는 결의 때문일까.

<전투는 별거 없어. 최후의 최후까지 침착하기만 하면 돼.>

이안의 나직한 음색이 곁에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

<냉정한 시선으로 상대를 끝까지 봐. 상대의 기술이 네 심장을 겨눠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러면 승산이 있댔다.

막상 대련을 앞두자 어째 스톨레 교수의 가르침보다 이안의 조언만 떠올랐다.

몇 번이나 날숨을 뱉은 오스틴은 상대를 직시했다.

B반 루하흐의 면상엔 ‘저런 거는 한방이면 이기지.’가 얼룩져 있었다.

놈의 곁에 있는 정령도 마찬가지.

나비……라기엔 거대한 몸집의 물 정령이 그를 깔보듯 퍼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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