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쿠르릉.
나비의 날갯짓마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오스틴의 귓전을 쉴새 없이 때렸다.
‘이젠 정령이 뭘 해도 예전처럼 무섭지 않네.’
뿐만 아니라 괜한 질투도 나지 않았다.
질투.
예전에는 노력하는데도 제자리인 것에 항상 울분이 있었더랬다.
하지만 지금은 1성에 머물러있어도, 제 감정에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달라붙지 않았다.
노력한 만큼 나아가고 있으니까.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긴장을 덜어낸 오스틴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소의 기대감이 버무려진 몸짓이었다.
“명예롭게 싸우겠습니다.”
서로 인사를 한 후에는 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펄럭펄럭.
나비 정령이 날개를 퍼덕거리자 사방으로 분진이 퍼져갔다.
분진은 때때로 오스틴의 움직임을 막거나, 폭탄이 되어 터졌다.
어떻게든 피하려 노력해도 역부족이었다.
페이라조 1성이 발 한쪽뿐이라면 2성은 발이 두 쪽인 셈이니.
“허억. 허어어억.”
오스틴은 결국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침인지, 이마에서 흐른 땀인지가 턱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패배했다.
아깝단 말도 안 나올 대패인데, 괜스레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예전엔 분진 폭발 한방에 나가떨어졌다면 지금은 장장 50분을 버텼으니까.
50분을!
“흐흐흐.”
대련 상대였던 루하흐가 미친놈 보듯 쳐다본들 무슨 대수랴.
오스틴은 호노르관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다리 힘이 풀려 폴짝 한번, 풀썩 한번을 번갈아 하면서도.
“기분 조오타!”
10분의 휴식 시간 동안 오스틴은 취한 것처럼 헤롱거렸다.
비단 오스틴뿐일까.
C반 대개가 비슷한 증상을 보이며 헤실헤실 대련을 이어갔다.
해볼 만 하단 자신감을 빵빵하게 집어넣은 채로.
* * *
“우웩.”
오스틴이 다 죽어가는 몰골로 헛구역질을 해댔다.
노란 위액을 토해낸 녀석은 비틀대다가 꼬꾸라져 버렸다.
‘흠. 점점 버티는 시간이 짧아지는군.’
이안은 대련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다들 잔뜩 쥐어짜진 마른걸레보다 더 퍼석퍼석해져 있었다.
거의 1시간 가까이 대련을 이어 나가던 팔팔함.
그건 옛말이 된 지 오래였다.
버티는 시간이 50분이 40분이 되고 그게 또 20분으로 단축되더니…….
저녁참에 이르러선 아이들 대개가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패했다.
대련하는 건지, 허우적대는 건지 헷갈릴 즈음.
“그만.”
홀연히 스톨레 교수가 호노르관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눈을 가린 긴 안대가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화려한 천이 허공에 남긴 짙은 잔상.
“오늘의 대련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내일은 새벽 1시부터 대련을 이어가도록 하죠.”
잔상의 그림자가 지워지기도 전, 스톨레는 말을 마쳤다.
그러고는 또 금세 모습을 감춰버렸다.
배탈이라도 났나 싶게 급한 행동의 이면에는 그 나름의 배려가 숨겨져 있었다.
대련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
교수가 자꾸 서성이면 학생으로선 신경이 쓰일 테니 말이다.
“으어어억.”
대련 중지가 떨어지자마자 C반은 곡소리를 내며 한데 모였다.
땀에 절어 해초처럼 늘어진 머리카락.
볼살이 쏘옥 들어간 해골바가지 같은 얼굴.
바들바들 떨리다 못해 제어가 안 되는 몸뚱어리.
어째 하나같이 똑같은 몰골로 픽픽 엎어져 꾸물거렸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눈앞에 지급된 호밀빵이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할까.
“하, 하늘이 노래.”
“어? 땅이 울렁거리는데 나만 그러냐?”
“그냥 자고 싶다. 빵이고 뭐고.”
“야, 침 묻은 네 빵을 왜 자꾸 내 입에 쳐놓고 지랄이냐.”
호밀빵을 코로 넣는지, 입에 넣는지 얼이 빠진 아이들에.
꾸벅꾸벅.
빵을 쥐고 조는 녀석들까지 하나하나 각양각색이었다.
지나치게 고돼서 식욕이 있을까만은.
‘억지로라도 빵을 씹어 삼켜야 하는데.’
이안은 딱딱한 빵을 잘게 뜯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따악.
경쾌한 리듬에 졸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서 이안을 쳐다보았다.
멍한 시선들을 잡아채듯 이안의 어조가 한층 높아졌다.
“힘들어도 먹고 자. 내일 지옥에서 눈뜨기 싫으면.”
“으으. 빵을 먹는 건지, 돌가루를 먹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웅얼대면서도 토를 달지 않고 억지로 빵을 씹어 삼켰다.
솔직하게 말해 이안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었다.
지금 힘들다고 굶으면 내일 대련할 힘이 나겠는가.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이 뭔지 절감하면서 아이들은 꾸역꾸역 배를 채웠다.
‘저 상태면 어디 내놔도 죽진 않겠다.’
전쟁터에선 그랬다.
힘들다고 밥숟갈 놓는 자들은 필히 죽었다.
하지만 피 묻은 맨손으로 풀뿌리라도 씹어 삼키는 자들은 살았다.
그 차이를 만든 건 생에 대한 갈구와 의지였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단 마음은 질긴 목숨줄을 이어 붙이는 동력이니까.
뭐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긴 그렇지만 무튼.
‘밥은 중요하지.’
그리 여기는 이안의 강제 권고로 인해 왠지 저녁은 자못 치열해졌다.
전투와 같은 시간이 지난 후, 아이들은 비칠대며 잠잘 준비를 했다.
마력 연료가 닳아진 골렘 같은 꼴.
곧 방전될 것 같은 몰골로 취침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이안은 C반 구역을 세세하게 둘러보았다.
그의 정찰병 같은 시선 때문일까.
레브가 이안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네.”
“습관 같은 거지 뭐.”
“나름 볼 만하지 않아? 10인용 천막 수십 개가 반별로 뭉쳐 일렬로 늘어선 거.”
“올망졸망 보기 좋긴 하다.”
불과 몇 달 전에 전장에서 지겹게 봐온 풍경인데, 오늘따라 새삼스러웠다.
……새삼스럽다.
같은 풍경에 다른 심상, 왠지 모를 생경함이 밀려들자 이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처한 상황 따라 이토록 다르게 보이다니.
‘사람 마음이 참 그렇다.’란 생각을 하며 가만히 보고 있는데.
투웅.
난데없이 허공이 애벌레의 주름처럼 너울거렸다.
그 파동 따라 이안의 시선이 붙따르듯 왼편으로 이동했다.
“하여간 저것들은.”
장난치듯 연거푸 허공을 두드리고 있는 A반 무리가 그의 시야에 잡혔다.
어째서 매사 가만있질 못하는지.
살리카의 손길이 닿자 투명한 막이 재차 파르르 떨렸다.
“이안, 쟤들도 방어막이 신기한가 보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저만큼 투명한 결계는 보기 힘드니까.”
“하긴. 결계 짜기에 있어선 열 손가락에 꼽히는 스톨레 교수님이 만든 거니 뭐.”
“진짜 차원이 다르다. 초보자가 만든 건 ‘나 여기 있어요.’ 하듯이 색이 진한데.”
“후. 난 언제 저렇게 결계를 짜보냐?”
“아무리 레브 너라도 결계학은 어렵지?”
“나나 이안 너나. 비슷한 것들끼리 건들지 말자. 상처만 는다.”
“오, 발끈하는 천재.”
“하아. 올리브 그놈한테 쓰는 말을 쓰게 될 줄은. 닥…….”
“닥치라고? 하하핫.”
정해지지 않은 얘기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흘러갔다.
그래도 대체로 주제는 결계에 관한 거였다.
뒤치기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자라는 스톨레 교수의 배려가 담긴 결계.
그런고로 각각의 반들은 다른 반 구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에 대해 튀어 오른 공처럼 자유분방하게 말을 나누길 얼마쯤이었을까.
“흠. 다들 자는 것 같으니 우리도 들어가서 자자.”
“그래. 들어가자.”
레브는 가운데 천막으로, 이안은 첫 번째 천막으로.
둘은 각자의 자리로 깔끔하게 헤어졌다.
느긋하게 천막 안으로 들어가 모포를 덮고 드러누운 이안.
몸을 곧게 펴니, 귓가에 닿는 거라곤 바람의 속삭임과 야밤의 적막뿐이었다.
‘조용……하네.’
그제야 안심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누르는데.
“이안, 자?”
옆자리의 오스틴이 말을 걸어왔다.
저녁 먹으며 계속 졸더니, 지금은 상태가 약간 말똥해져 있었다.
아깐 팍 쉰 감자 같더니 지금은 반만 쉰 감자 정도?
“아니.”
“어째 잠이 안 온다, 이안.”
“조금이라도 자둬. 내일은 아침 7시까지 쭉 대련이니까.”
“에휴. 내일도 죽어 나가겠다. 오늘은 그나마 아침 9시부터 시작해서 버텼는데.”
오스틴이 과장되게 한숨을 푹푹 쉬었다.
오죽 크게 나달거렸으면 모포까지 들썩거릴까.
먼지가 계속 날리는 게 녀석은 도통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뻔히 죽어 나갈 거 아는데……. 근데 말이야. 왜 이럴까, 이안?”
“뭐가?”
“5일간 연무장 밖으로 못 나가, 임무 나가 뒤치다꺼리했을 때처럼 딱딱한 빵만 먹어, 찬 바닥서 모포 덮고 쪽잠을 자, 되게 힘든데…….”
초췌한 오스틴의 눈이 찰나 기이한 열기를 품었다.
“아니지. 뭣보다 한 판도 못 이겨서 엄청 지치는데……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왜 이러지?”
“인정받아서 그런 거 아닐까.”
“인정?”
“스톨레 교수님한테 말이야.”
“아.”
“무한 대련에 참여시킨 것만 봐도, 우리가 이 수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셔서 그런 것일 테니.”
“하긴. 스톨레 교수님 성격은 아닌 걸 아니라고 하시지.”
“봐. 무의식이 그걸 알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던 거겠지.”
“흐흐흐. 그런가?”
“…….”
“와아. 우리가 인정받았구나. 드디어.”
오스틴이 모포를 머리끝까지 덮고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악기에 화음을 넣듯 뒤이어.
“흐크크큿.”
자는 것 같던 아이들의 억눌린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아무래도 죽은 척 굴며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식.
기분 좋음이 전염되자 이안은 입꼬리를 휘었다.
이런 상황…… 나쁘지 않았다.
마냥 힘들어도 좋고, 속없이 웃고 떠들 수 있어서 좋은.
전쟁 당시의 군용 천막에선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다.
그땐 노상 피비린내와 죽어가는 이들의 절규만 맴돌았으니까.
죽어가는 자나 아직 산 자나 늘 목숨줄 걱정하기 바빴지.
이안은 과거를 되감으며 흘끗 밖을 보았다.
투명한 방어 결계가 안심하라는 것처럼 세차게 일렁거렸다.
모가지 날아갈까 밤새 불침번 설 필요가 없으니.
‘나도 이제 잠을 청해볼까?’
이안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내일을 위해 눈을 감았다.
* * *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기분 좋은 전투학 수업은 잘도 굴러갔다.
아이들이 좀비가 되든 스켈레톤이 되든.
영지민을 수탈하는 영주의 뱃살처럼 차올라 어느덧 4일 차.
“허억. 허어억.”
C반 대개가 후들거리는 무릎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숨을 내뱉어도 질식할 것 같았다.
그래서 크게 입을 벌리면, 그땐 또 내장이 역류할 것 같아 죽을 맛이었다.
여기가 연무장인지, 지옥인지 모르겠다.
이 지경에 처해 지고 나서야 아이들은 깨닫게 되었다.
설렘과 기대를 품었던 자신들이 사자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다는 것을.
‘과연, 명성처럼 악랄하다.’
마력 고갈에 대처하기 위한 감각 기르기?
그전에 황천길부터 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었다.
욕이 절로 나오는데, 그래도 나흘간의 대련으로 깨달은 건 있었다.
‘결국, 정신력 싸움이구나.’
마력이 마르지 않는 특이체질이 아니라면 마력 고갈은 반드시 일어난다.
대련을 열 번 했든 스무 번을 했든 반드시.
비어가는 마력을 어중간하게 채우며 버티는 것도 한두 번이다.
그조차도 여의치 않게 되면, 결국 남는 건 정신력 싸움의 영역이 된다.
악과 깡으로 버티며 한계선을 꼴딱꼴딱 넘기든가, 그냥 포기하든가.
그런데 포기해버리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된다.
오롯 버티는 자만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뜻.
포기와 나아감.
어떤 선택지를 고르느냐는 결국 자율이지 않던가.
지금에서야 아이들은 스톨레 교수가 말한 ‘무한 대련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감각 기르기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성장을 자신이 정하는 것.
무한 대련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