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어쩐지…….
<미치겠다. 이걸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 말아?>
이렇게 말했을 때 보인 이안의 반응이 어딘가 의뭉스럽더라니.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자신들은 몰랐던 무한 대련의 진정한 의미를 이안은 진즉 알고 있었다는 것을.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 한마디뿐이었다.
모든 것은 각자의 선택이라는 듯이.
아이들은 제멋대로 춤추는 다리를 누르며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의뭉 떨던 이안은 어디…….”
찾으려던 이안은 단박에 눈에 띄어서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쐐애애액.
이안이 쏜 수십의 화살이 엄청난 속도로 상대의 종아리로 쇄도했다.
그 즉시.
[크륵.]
은빛 갈기 휘날린 사냥개가 화살 꽂힌 루하흐의 종아리를 할퀴었다.
살덩이가 붉게 패임과 동시에 상처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크아아아앗!”
기술의 중첩으로 파괴력이 강해진 탓에 루하흐의 종아리는 퍽 터져버렸다.
“……쟨 여전히 쌩쌩하네.”
A반조차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 이안 혼자만 처음처럼 팔딱거렸다.
하여간 저 괴물.
‘규격 외’라는 건 저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시선을 조금 더 옆쪽으로 옮겼다.
그곳엔 이안 말고도 규격 외인 녀석이 한 명 더 있었다.
“레브.”
촤악. 촤아아악.
레브가 휘두른 물의 채찍이 A반 살리카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그러자 개구리처럼 생긴 불의 정령이 혓바닥을 길게 빼서 채찍을 막아냈다.
공격이 막힌 순간.
후우우우.
물의 정령이 레브의 채찍에 입김을 불었고, 정령의 숨결을 따라 얼음 깃털이 돋아났다.
수십의 깃털은 사방으로 비산하며 살리카를 공격했다.
“젠장!”
짜증과 초조가 뒤섞인 살리카가 또 다른 불의 정령을 부렸다.
원숭이를 닮은 정령.
화르르르륵.
원숭이 정령이 공중을 휘리릭 돌며 불의 파도를 불러냈다.
파도가 부채꼴로 퍼지기 전.
“참 하찮은 재주뿐이네. 정령을 둘이나 가진 것치곤.”
한껏 비꼰 레브가 먼저 왼손을 휘저었다.
그의 신호를 따라 물의 정령이 나붓나붓 허공을 헤엄쳤다.
정령과 함께 유영하던 물줄기는 그대로 원숭이를 동그랗게 감쌌다.
쩌정.
구체가 삽시간에 얼자, 원숭이는 통째로 얼음 동상이 되어버렸다.
정령의 보유 개수가 실력의 차이라서 살리카가 압도해야 하는 건데…….
“레브가 가지고 노네.”
대련의 흐름은 명백하게 레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만으로도 대단하건만, 아이들이 경악한 건 따로 있었다.
불에 지져진 레브의 팔뚝이…… 순식간에 아물더니 새살이 돋아난 것.
“쟤, 뭐지? 자가 치유력이 직계 급인데?”
자가 치유력.
치유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몸 자체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능력.
직계에서 멀어질수록 잘 드러나지 않는 능력이었다.
“방계지만 그래도 아르데슈라고 히야.”
지금이야 현 가주 때문에 아르데슈 가가 쇠락했지만, 예전에는 방계 혈족과만 정략혼을 하던 가문이었다.
하여 그 핏줄이 직계와 상당히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힘이 강한 것은 당연지사.
그 위력을 생눈으로 목격한 아이들은 입을 떠억 벌렸다.
“쟤, 완전 좀빈데?”
루하흐를 괜히, 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에 비유할까.
그 말대로 레브는 상처 하나 없이 멀끔하게 서 있었다.
‘대련을 막 시작했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반면.
“크으읏.”
살리카는 대련이 길어질수록 넝마가 되어갔다.
얼음 깃털에 베여 몸 여기저기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뿐이랴.
시뻘건 살점들은 물의 채찍에 찢긴 채로 아슬하게 너덜거렸다.
마력 고갈이 문제가 아니었다.
출혈이 심한 살리카는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고 흐트러졌다.
정령사가 저런 상태인데 정령이라고 온전할까.
시전하는 기술이 자꾸 취소되거나, 몸이 이따금 투명해졌다.
“졌…… 습니다.”
결국은 살리카의 패배 선언으로 대련이 끝났다.
승리해놓고도 담담한 레브는 천천히 어딘가로 향했다.
그러곤 굳이 이안 앞에 서선.
“어흠.”
이안에게 ‘봤지?’라며 턱을 치켜들었다.
너보다 내가 잘남.
단언하는 몸짓에 이안이 비소로 응수했다.
‘훗. 겨우 그깟 걸로.’라는 찰진 비웃음이 입매에 매달려 늘어졌다.
둘의 신경전을 보고 있자니…….
아이들의 뇌리로 ‘일곱 살짜리 내 동생도 저것보단 덜 유치하겠는데?’라는 결론이 번개처럼 스쳐 갔다.
* * *
하는 짓이 유치한들.
이안과 레브는 괴물이란 명성대로 전승을 거두었다.
둘의 승리는 곧 C반의 승리이며 자부심으로 자리했고.
그렇게 4일 차의 야밤이 저물어갔다.
“흐음. 내일은 이걸 써볼까?”
이안은 1장로가 준 정령 보관석, 워툼을 만지작거렸다.
워툼이 단순히 정령을 보관하는 용도라서 비쌀까.
보관석에 있는 정령의 ‘마력’을 결속자가 꺼내 쓸 수 있는 술식이 걸렸기 때문에 비쌌다.
하여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
“이거면 녹스의 마력을 빌려 쓸 수 있어.”
무한 대련엔 보관석을 사용하지 말라는 규칙이 없다.
즉, 꼼수도 아니다.
중앙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마력 고갈 없이 일주일을 버티는 것도 이 보관석 덕분인 셈.
“그래도 끌어쓸 수 있는 양엔 한계가 있으니.”
이안은 마지막 날에 무얼 할지 면밀하게 점검했다.
그런 연후 느지막이 눈을 감았다.
말소리가 사그라든 천막에선 이내 고른 숨소리만 퍼져나갔다.
이렇게 밤이 깊어가고 새벽이 오나 싶었는데…….
펄럭.
이안은 천막이 열리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잠을 잔 것 같지 않은 명료한 동공에 맺힌 건 불길이었다.
불덩이에 가까운 작은 도마뱀.
“……전서구?”
드물게 화들짝 놀란 이안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리카가 다루는 불도마뱀이 왜 여기에?
“결계 때문에 다른 반의 마력이 기어들어 올 수가 없는데.”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거기다 전서구를 보낸 게 트란 카스티야, 세작이라니.
왠지 불안해진 이안은 무릎께에 있는 불도마뱀을 집어 손바닥에 올렸다.
그런 연후 불도마뱀을 손바닥으로 으깼다.
형체가 으그러지자 불꽃이 살갗에 침투하며 어떤 글자를 만들어냈다.
〔결계. 변형.〕
“……결계가?”
이안은 천막 밖으로 재게 눈길을 돌렸다.
우우웅.
투명한 결계가 대기를 진동시키며 요동치고 있었다.
심지어 결계를 이루는 술식의 배열이 꼬이더니 탁한 황갈색이 덧입혀졌다.
뒤엉키는 고어와 도형들.
파지직.
급기야 서로 충돌하다가 정전기까지 일어났다.
그냥 넘길 수 없는 징조들.
이안은 잽싸게 일어나 옆에 있는 오스틴을 깨웠다.
“오스틴, 일어나 봐.”
“으응?”
“빨리 애들 깨워.”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결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까 빨리.”
“뭐?!”
이안은 천막 밖으로 나가며 간략하고 짤막하게 요약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봐야 하니까.
전엔 들어본 적 없는 이안의 빠른 어조.
이에 오스틴은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뜨며 황급히 아이들을 깨웠다.
‘결계 이상’이란 말에 놀란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는 일어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진짜 저거, 왜 저래?”
“결계가…… 쪼그라들고 있는 거야?”
“왜 우리 것만?”
인상을 찌푸린 아이들은 결계 대신 이안만 쳐다보았다.
‘어떡해?’라는 물음에도 이안은 결계의 변색이 심한 부분만 노려보고 있었다.
약간의 금색 끼가 도는 눈동자.
뭔가를 탐색하는 것 같아 아이들은 숨까지 죽이며 기다렸다.
짧은 틈.
탐색을 끝마쳤는지 이안이 말문을 열었다.
“우선 다른 천막의 애들도 깨워.”
“알았어.”
이안은 어느 때든 차분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 했다.
그가 허둥대면 지금도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이 더 당황할 테니까.
결계 변형은 아직 진행 중이었고, 무슨 일이 더 생길지 예측할 수 없으니.
“그리고 오스틴 넌 스톨레 교수님을 찾아서 모시고 와.”
“어. 근데 오늘 숙직 교수님은 기드온 교수님 아냐?”
“무조건 스톨레 교수님을 찾아.”
“……응.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
아이들이 각자의 할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후.
-녹스, 저 결계…….
쪼그라드는 결계를 따라가며 이안은 계속 분석을 시도했다.
[네가 짐작한 대로 충돌 난 거다. 누군가가 결계를 변형하려다 사달이 난 성싶은데.]
녹스의 눈매가 바늘인 양 가늘어졌다.
[눈대중만으론 알 수가 없다. 가까이서 분석해봐야지.]
-해제는 가능해?
[단순 충돌 현상이면 쉽다. 꼬인 거만 풀면 되니까.]
일순 녹스의 호언장담을 비웃듯.
출렁.
결계가 격하게 물결치더니 검붉은색으로 치환되었다.
[어, 어? 저거 또 왜 저래?]
“제길!”
불길한 변화에 이안의 낯빛이 차게 굳는 동안.
“야, 일어나 봐. 지금 큰일 났어.”
“결계가 이상하다니까.”
“잘 때가 아니야. 헛소리 그만하고 정신 차려.”
임무를 하달받은 아이들이 다른 천막의 아이들을 두드려 깨웠다.
다들 피곤해서 비척거리면서도 심각한 분위기에 군말 없이 움직였다.
“멀쩡하던 결계가 뭐 어쨌다는 건데?”
“어? 결계 색이 왜 저래?”
“검붉은색?”
“야, 지금 색이 문제냐. 이안이 결계로 들어가려다 튕긴 것 같은데?”
점점 수축하다가 C반의 마지막 천막 끄트머리에서 멈춘 결계.
그 앞에 서 있는 이안의 뒷모습이 흉흉했다.
아무래도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난 것 같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아이들은 서둘러 이안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 * *
“커헉.”
“컥, 커흐흑.”
검붉은 결계 안에서 아이들의 고통스러운 헐떡임이 들려왔다.
결계에 갇혀버린 올리브외 대여섯 명.
아이들은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괴로워하며 바닥을 긁어댔다.
입을 연신 뻐끔거리는 것이, 물 밖에 던져진 생선 같았다.
저러다…… 곧 죽겠다.
“어, 어떡해?”
“들어가려면 술식부터 해제해야 하는데.”
“교수님들은? 왜 아무도 안 오셔?”
아이들은 결계 안의 아이들을 구하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막다른 벽인 양 발가락 하나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
아이들이 애타서 동동거리는 동안 이안은 나직하게 뇌까렸다.
“엑사마티오.”
짐작한 것을 끄집어낸 순간, 이안의 평정심은 손쉽게 깨져버렸다.
핏물 같은 저 검붉은색.
저건 ‘어떤 저주’의 상징색이었다.
사람을 질식시킨 뒤 몸 안의 수분을 전부 증발시켜 미라화시키는 저주의.
전쟁이 격해질수록 가장 많이 쓰였던 술식 중 하나라 굉장히 낯익었다.
‘어떤 개새끼가!’
이안에게서 뻗어 나온 칼바람이 대기를 날카롭게 짓눌렀다.
호노르관을 휘돌던 바람이 아예…… 소멸해버린 양.
메말라 버린 대기로 인해 뼛속까지 저릿해져서 아이들은 몸을 옹송그렸다.
더러 위압감을 견디지 못한 페이라조 1성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고.
[이안, 진정해라.]
-앞으로 5분이면…….
[염려 말래도. 저주든 뭐든 술식에는 시작점이 있다. 그 시작점의 꼬인 선만 풀면 금방이지.]
녹스가 재빠른 날갯짓으로 술식을 읽어내려갔다.
5분.
저주가 완성되어 사람을 죽이는 마지노선이다.
이론이 그렇다는 거고, 숨구멍이 막힌 인간이 5분이나 견딜 수 있을까.
이를 까드득 가는 이안의 어깨를 누군가가 꽉 잡았다.
몸을 흔드는 세찬 진동에 고개를 틀어보니 희게 질린 레브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엑사마티오면 사람을 질식사…… 시키는 저주?”
떨림을 다독이듯, 이안은 ‘곧 풀 수 있어.’라며 레브의 어깨를 꽉 쥐었다.
하나 쉬이 진정이 되질 않는 모양이다.
레브가 거칠게 잇새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X발. 대체 누가.”
분노에 찬 레브의 귓가로 들쑤시듯 조롱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