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68화 (68/214)

제68화

“감히 누구한테!”

이전보다 한층 더 호위가 서슬 파랬다.

흉흉한 친위대의 기세에 폰투스가 손짓으로 ‘됐다’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미약한 손짓 한 번에 친위대는 꼬리 만 개처럼 순순해졌다.

견고한 통제와 아직 단단한 식인 꽃의 권위.

그것이 못내 못마땅해 이안은 미간을 짙게 구겼다.

생긋.

그런 이안에게 폰투스가 나긋한 미소를 내보였다.

꼴을 보아하니 반격할 무언가를 짜낸 모양이다.

이를 위한 전초전인지, 폰투스가 곱다랗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사태에 대해 저 또한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일이 벌어지고 난 뒤의 유감은 그저 면피용이지 않나.”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진심으로 안타까워 사과를 드리는 거예요.”

“아무래도 격이 맞지 않는 것 같군.”

“예? 제가 무엇을 하든 이안님의 성에 차지 않는다면…….”

“아, 내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켰군. 개새끼의 하. 책. 이 부른 사태와 그대의 사과가 격이 맞지 않단 거였는데.”

하책.

부러 강조한 이안의 도발에 폰투스의 입매가 푸들 떨려왔다.

바꿔 말하면 그녀가 쓴 수가 하책이라는 거니까.

여태껏 여유로운 척하던 폰투스가 입술을 깨물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단지 저는 이안님이 걱정되어서…….”

“걱정? 이 개새끼 때문에 생길 처벌에 관한?”

“예. 이안님의 분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개인적인 처벌은 징계감이 될 수 있으니까요.”

“쓸데없는 염려를 하는군.”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특별법 7항’, 그거면 차고 넘치는 명분이 되지.”

“특별법 7항…….”

제국법을 들먹인 이안은 어떻게든 엿 먹이려는 폰투스에게 조곤조곤 말했다.

네 뜻대로 되는 일 없다, 쐐기를 박는 거랄까.

“7항. ‘하나의 소속에서 일원의 목숨이 부당하게 위협당할 시 가하는 복수, 그것은 정당하다.’, 이거면 충분하지.”

“그건 힘이 약한 소속을 위한 일종의 구제조항이지 않나요?”

“힘이 약한 소속이지 않나. 에루리안의 C반인데.”

“엄밀히 아카데미와 소속은 다른 개념이 아닐까요?”

대화하는 듯 묘하게 각자의 주장만 펼쳤다.

‘기껏 쥐어 짜낸 반격이 뭔가 했더니.’

징계 건을 물고 늘어지는 거였다.

이번만큼은 천하의 폰투스라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럴밖에.

폰투스가 식인 꽃으로 악명을 날린 건 이 에루리안을 떠나고 난 후의 일.

아직은 떡잎일 뿐이라 수가 얕았다.

이안은 상대가 감질나도록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안타깝군. 영악한 그대가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이 있는 듯하니.”

“제가요?”

“내가 뷔트시겐의 적자라는 사실.”

“…….”

“세상은 내가 가진 힘만큼 재단할 수 있지.”

“재단…….”

“그러니 법은 의미가 없단 거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그저 내가 빠져나갈 구멍만 있으면 되는 거니.”

“그렇네요. 제가 어리석었네요. 이안님은 뷔트시겐의 적자이신데.”

“그러니 써먹어야지.”

아주 철저히.

이안은 뷔트시겐의 적자이자 직계란 권력을 외면할 생각이 없다.

비겁? 정정당당?

우스운 잣대일 뿐이다.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써먹어야지 않겠는가.

이런 이안의 태도에 폰투스는 물론 A반 전체가 충격을 먹었다.

뒷배를 이용할 거라 노골적으로 말하는 이안이 무진장 낯설어서였다.

그간의 행태가 어땠던가.

허섭스레기들과만 어울리면서 그저 C반의 이안으로만 살지 않았던가.

적자라는 사실조차 희석되어버릴 정도로.

쫄긴.

이안은 느른하게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내가 그것을 휘두르면 어떤 사달이 날지 그대가 더 잘 알 터.”

“그 전에 문제가 해결돼야겠군요.”

“그럼 개새끼의 뒤처리는 폰투스 그대에게 맡기지.”

“……잘 알겠습니다. 이안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죠.”

미끄덩한 폰투스의 산호색 머리카락을 이안은 빤히 보았다.

징글징글한 살리카.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강렬한 붉음을 얼마간 보다가 그는 홱 뒤돌아섰다.

용서는 없을 것이다.

저런 것들한테는 용서도 사치니까.

자비도 그게 자비인 줄 아는 인간한테 베풀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니.

.

.

.

C반 기숙사에 다다른 이안.

그는 여태까지의 꼿꼿함을 잃고선 비틀거렸다.

성치 않은 몸으로 움직였으니 예정된 결과였다.

[미련한 놈.]

이미 예상한 듯 녹스가 잽싸게 이안의 팔을 붙들었다.

복수를 말릴 순 없어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알아챈 터라 속이 탔다.

“도망가기 전에 잡아야 하는 두 가지가 있어. 원수와 애인.”

[염병.]

“지랄한다. 기껏 치유해줬더니 환자가 싸돌아다니기나 하고.”

녹스의 못마땅하단 표정에 추임새를 넣듯 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레브였다.

녀석은 미간을 잔뜩 모은 채로 식은땀 흘리는 이안에게 다가왔다.

“하여튼 말을 더럽게 안 들어 처먹어. 얌전히 있으랬더니.”

“목숨값은 받아내야지.”

“애들 다 팔팔하거든? 잔말 말고 쉬어. 겁 없는 네 목숨값을 우리가 받아내긴 싫으니까.”

“오. 복수해주겠다는 건가?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죽든 말든.”

“좋네. 복수해주겠다는 놈도 있고.”

* * *

“하. 이해할 수가 없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폰투스는 깨친 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버러지들을 지키려고 드러낸 분노의 흔적.

그저 ‘꼴값’에 불과한 잔재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대체 C반, 그깟 버러지들이 뭐라고.”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직계’인 이안이 저렇게 분노하며 제게 이를 드러내는 것이.

“한낮 방계일 뿐인데 비천한 그것들이 뭐라고.”

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서?

폰투스는 깨진 창밖 너머를 사납게 흘겨보았다.

방계가 무엇이던가.

방계는 오로지 직계만을 위해 존재하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기라면 기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소모품.

쓸모는 그것뿐인데 애지중지 싸고도는 꼴이라니!

방계 혈족도 아닌 방계의 끄트머리에 있는 버러지들을 말이다.

“하!”

그녀의 상식으론 이안의 행동은 그저 괴팍한 치기일 뿐이었다.

팔불출인 뷔트시겐 가주가 싸고돌아서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의.

“그래도 직계다움을 지니고 있을 줄 알았는데…….”

기실 폰투스는 이안의 성향이 자신과 비슷한 줄 알았다.

덜떨어진 방계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도 전부 왕 놀음의 일환이라 여겼고.

“쯔읏. 성향이 이렇게 다르니 어쩐다.”

재차 머리카락을 넘기는 폰투스의 손길에 짜증이 어렸다.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안이란 먹잇감을 버리기는 아까웠다.

<세상은 내가 가진 힘만큼 재단할 수 있지.>

그의 말대로였으니까.

애초 그녀가 쥐고자 하는 것 또한 제국이 자신의 발밑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이안이란 힘이 필요했다.

이안 뷔트시겐, 뷔트시겐의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그녀가 가문에서 내쫓겨 에루리안으로 밀려왔을 때 얻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폰투스의 계획은 딱 하나였다.

이안을 꼬드겨 뷔트시겐의 안주인이 되는 것.

까놓고 말해 설령 다른 직계가 있었다고 해도 목표는 이안이 되었을 것이다.

핵이 없으니까.

무능한 도련님은 적당한 먹잇감이었다.

얼치기를 대신해 일을 처리하면 뷔트시겐을 제 뜻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되면 제국을 쥘 초석을 다질 수 있을 터.

“순탄할 줄 알았는데 내 예상과 다른 놈일 줄은.”

일이 꼬였다.

그러나 낙담할 정도는 아니었다.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아예 망한 건 아니니까.”

그녀는 좁아터진 에루리안으로 만족할 생각 따윈 없었다.

버러지들을 다스리며 얻은 권력이 달콤할지라도 말이다.

“목적을 위해선 선택을 해야겠지.”

살아남으려면.

당분간은 이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용히 지내야 할 것 같다.

수그리는 모양새라 지금껏 쌓은 명성에 금이 가겠지만.

완벽한 그녀를 추종하는 자들의 마음에 균열이 가겠지만.

“그것들은 부스러기보다 못한 하찮은 것들이니.”

폰투스는 당분간 이안의 장단에 어울려 줄 심산이다.

도저히 그의 성향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 * *

【기드온 교수실.】

기드온은 나무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혔다.

거센 손길에 이음새에선 듣기 싫은 소리가 났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따로 있었으니까.

교수 회의 내내 저만 응시하던 스톨레.

놈의 미끈한 낯짝이 아직도 뇌리를 떠나질 않고 아른거렸다.

“하! 더러운 위선자. 대체 무슨 속셈으로 날 탐색하는 거지?”

기드온은 뻑뻑한 눈두덩이를 누르며 티 테이블로 다가갔다.

요 며칠 골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이럴 때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특효약이 그에겐 있었다.

바로 이안이 준 아케랑코.

티 테이블에서 아케랑코를 우리며 기드온은 눈가를 좁혔다.

“왜, 스톨레 그 자식은 별말을 않는 걸까? 마력의 흔적을 읽었을 텐데.”

분명 스톨레는 알고 있었다.

그가 결계를 변형시켰다는 사실을.

결계에 남은 마력의 흔적을 스톨레가 아무도 모르게 지우지 않았던가.

그뿐일까.

영상석에 담긴 결계 변형 당시의 장면도 깡그리 없애버렸다.

“……그놈이 날 도와줄 리 만무한데.”

의도가 뭔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교수 회의서 물고 늘어지는 일도 없었기에 더더욱.

“당최 왜 가만있는지 모르겠군.”

꿍꿍이속이 명확하지 않으니 기드온은 되레 짜증이 솟구쳤다.

도와줘도 싫었다.

그냥 놈의 존재 자체가 그랬다.

같은 방계인 스톨레는 항상 손톱 밑 가시 같은 존재였다.

스톨레 바르푸니.

방계면서 능력이 뛰어나 중앙 아카데미 교수직에 천거 받은 놈.

그런데 주제도 모르고 귀한 교수직을 찬 머저리.

기드온은 스톨레의 그 멍청한 오만이 싫었다.

진절머리나게 나게 싫은데, 그런 놈에게 약점을 잡혔으니.

“10년 전에도 지금처럼 약점을 잡아 물고 늘어지더니만.”

그가 이곳으로 좌천당한 것도 스톨레 탓이었다.

놈의 질시만 아니었다면 여즉 존경받는 중앙 아카데미 교수로 살고 있을 텐데.

그래서 더러운 똥인 스톨레와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한데 이번 결계 변형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이안을 위한 일이었다.

자신을 존경한다는 녀석을 위해 꼭 처리해야 할 게 있었으니까.

직계의 곁을 맴도는 간악한 방계들을 처리하는 것 말이다.

거머리들을 일거에 치워버릴 계책을 고심하던 차.

<기드온 교수님.>

폰투스가 찾아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사근사근 부탁했다.

그것이, 전투학 수업이 있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이번 전투학 수업과 관련해 고견을 청하고 싶습니다.>

핵심은 ‘기어오르는 버러지를 벌하고 싶다.’였다.

마침 그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폰투스에게 힘을 보태줬더랬다.

저주 술식뿐 아니라, 스톨레가 결계 변형을 늦게 알도록 차단 술식까지 짜 넣으며 정성을 들였다.

완벽할 줄 알았는데…….

“쯔읏. 이안이 말려들 줄은 몰랐군.”

자칫했다간 황금 동아줄을 제 손으로 태울 뻔했다.

속 좁은 스톨레의 질시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인데 말이다.

“날 흠모하는 도련님을 이용해먹지 못 할 뻔했어.”

기드온은 아케랑코를 음미하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아마 그의 생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결과일 것이다.

이안이란 황금 동아줄은.

뷔트시겐의 후계자를 뒤에서 조종하는 책사, 기드온.

이 얼마나 멋진 명패던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걸 이안의 졸업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번 결계 변형 사건으로 영영 잃어버릴 뻔했다.

“무얼 하든 앞으론 조금 더 신중해야겠군.”

마냥 폰투스의 부탁을 들어줄 게 아니었다.

영악하고 예쁘긴 해도 이안보다 가치는 떨어지니까.

어차피 폰투스는 가문에서 버림받은 터라 그에게 줄이 되어주진 못한다.

그럴싸한 보석인 폰투스와 황금인 이안.

둘의 차이가 명백히 두드러지자 기드온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위로 올라가야지.”

그가 방계라고 무시하는 직계들을 눌러주려면.

실력이 미천하다고 얕잡는 것들을 눌러주려면.

그리고…….

같은 방계인데도 자질이 뛰어나다고 그를 무시하는 것들, 이를테면 스톨레 같은 자들을 제 발밑에 두려면.

“내게 어울리지 않는 방계란 껍데기를 버리고, 내게 어울리는 자리로.”

낮게 중얼거린 기드온은 아케랑코의 서늘한 향을 맡으며 의자에 앉았다.

짜증이 풀린 손길로 찻잔을 내려놓는데…….

제법 기분이 괜찮아진 시야로 책상에 놓인 서신이 들어왔다.

일순 멈칫한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밀랍의 인장이 푸른 장미인 것을 보니 수장 직속의 명령서였다.

저들은 방계를 개 취급한다.

물라고 하면 언제든 물어야 하고 짖으라고 하면 싫어도 짖어야 하는.

또 무슨 시답잖은 명령이 내려왔는가 하고 서신을 펼쳐보니.

《이안 뷔트시겐을 지켜보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올려라. 되도록 객관적으로.》

루하흐 교수들에게 일괄적으로 보내진 거였다.

일방적인 통보.

흥, 콧방귀를 뀐 기드온은 서신을 구겨버렸다.

루하흐 가주?

차기 뷔트시겐 가주를 주무르는 자리에 오르면 그자도 우스워진다.

더는 굽신거리지 않아도 될 터.

그날을 떠올린 기드온은 히죽이며 깃펜을 쥐었다.

아직은 계획이 진행 중이라 윗선에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영양가 없는 보고서를 올릴 것이다.

사각사삭.

성의 없이 움직이는 펜촉이 종이의 표면을 긁는 소리가 났다.

청명한 하늘에 노을이 얼룩지는 동안 줄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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