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69화 (69/214)

제69화

노을이 물드는 클로에 교수실의 스테인드글라스.

이파리가 새겨진 창문에 단풍이 들자 제법 운치가 있었다.

특히 교수실 안에서 가꾸는 꽃들과 어우러지니 더욱 고아해 보였다.

“기드온 이 개자식!”

물론 공간을 채우는 주인의 언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쾅. 콰아앙.

클로에 교수가 책상을 내려치자 곁에 있던 스톨레 교수가 말렸다.

“그래서 책상이 부서지겠습니까.”

아니. 부추기는 건가?

“내버려 두세요. 기드온을 부술 순 없어서 그런 것이니.”

“그자의 멱살을 실컷 잡은 것 같은데, 아직 부족했나 봅니다.”

“예. 부족합니다. 그놈 짓인 걸 알아도 증거가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잖습니까.”

“…….”

“승질 같아선 확 모가지를 잡아 뜯어버리고 싶었는데, 참아야 하다니.”

“참기 싫다면 말입니다, 클로에 교수님.”

스톨레는 안대 끝을 문지르며 여상한 투로 말했다.

“이안처럼 행동하면 됩니다.”

“이안처럼요?”

“보십시오. 열등감 덩어리인 기드온을 제대로 구워삶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직계라는 걸 이용해서.”

“…….”

“기드온 뿐일까요. 이번에 결계 변형 사건의 범인을 처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개인적 복수를 하고도 징계를 받지 않은 것 말이죠?”

“교수들조차 이안이 벌인 일을 모른 척하기로 전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말해볼까요. 이안 저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말입니다. 항상 놀라워요.”

“무엇이 말입니까?”

“언제나 나와 같은 듯 다른 선택을 하는 게.”

클로에의 낯이 저도 모르게 씁쓸해졌다.

가뜩이나 어두운데 노을로 음영이 지자 어딘가 음울해 보였다.

보고 있기만 해도 축축 가라앉는 꼴이 보기 싫다는 듯 스톨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처져 있는 것보단 차라리 기드온의 멱살을 잡는 게 낫겠군요.”

“하하핫. 그러다 모가지 뜯을까 싶네요.”

“기드온을 죽여도 클로에 교수님이라면 면책을 받을 수 있지 않나요.”

“…….”

클로에는 스톨레의 건조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언제나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무감한 기색.

“스톨레 교수님은 참 무심한 사람이네요.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다 아시면서.”

“살리카 가주처럼 돼버릴까, 염려하는 거 말입니까.”

“……예. 직계의 힘. 전 그게 무섭습니다. 언제든 약자를 짓누를 수 있는 그 힘이.”

클로에는 살리카 가주, 그러니까 오빠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쓰임으로 나눠 등급을 매기는 괴물.

그 괴물이 힘을 휘두를 때마다 매번 시체가 쌓여 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반작용일까.

그녀는 직계가 가진 힘 자체를 어떻게든 억누르려 노력했다.

“그저 오빠 같은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 내가 가진 힘을 외면했는데…….”

“‘힘’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지요. 휘두르는 사람이 어떻게 ‘사용하냐’의 문제이지.”

“이안을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 아인 거침이 없죠.”

“맞아요. 이안은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해 지켜낼 줄 알죠.”

부러 크게 날숨을 내쉰 클로에는 중얼거렸다.

“난…… 가진 것이 있어도 지키지 못했는데. 그 아이와 달리.”

“…….”

“지금이나, 10년 전이나.”

저무는 황혼의 그림자가 길게 클로에의 발치로 늘어졌다.

본래의 그림자를 밀어낸 그것은 심지가 다한 등처럼 불길하게 일렁거렸다.

“10년 전…….”

그녀를 물끄러미 보는 스톨레의 안대 역시 어둠에 잠겼다.

싸한 공기를 둘둘 휘감은 채로 말이다.

* * *

하나의 사건, 거기에 얽힌 사람 수만큼의 사연.

제각각일지라도 확실한 건 있었다.

엄청난 수혜를 입은 자가 존재한다는 것 말이다.

빼꼼.

검은 소 로르가 기숙사 창틀 위로 머리통을 내밀었다.

“히히. 나왔다.”

“왜 또 왔어!”

“왜 오긴. 여기 살러 왔지.”

“뭐?!”

녹스는 로르의 당당한 선언에 귀히 여기는 빨간 책을 떨궈버렸다.

오죽 놀랐으면 그러할까.

녹스가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해진 사이, 로르가 당당히 창틀을 넘어섰다.

거리낄 게 무에 있으랴.

이안을 도와 변형된 결계를 깨면서 ‘대가’를 받은 것뿐인데.

“이제 이곳이 내 둥지인 건가?”

“아니 왜? 그 넓은 동굴을 두고 뭐 때문에 여길?”

“여긴 이안이 있잖아. 수호자 너도 있고.”

“지금까지처럼 놀러만 오면 돼지, 굳이.”

“굳이. 이곳이 좋다.”

“그럴 리 없다. 뷔트시겐 화장실보다 좁은 이곳이 뭐가 좋다고.”

“히히. 좋다, 아주 좋아.”

“그건 네 착각일뿐이야. 그만 가. 응? 네 덩치에 답답할 거 아냐.”

녹스가 로르의 꽁무니에 졸졸 붙어 어르고 달랬다.

소름 끼치게 살가운 말투였다.

아마 녹스가 로르에게 내비치는 첫 친절일 것이다.

거기에 담긴 속내야 어떻게든 쫓아내겠다는 거지만.

겉은 촉촉하고 속은 버석한 녹스의 수작질에도 로르는 꼼짝하지 않았다.

제 덩치의 다섯 배나 되는 보따리를 주섬주섬 내려놓을 뿐.

흥미로운 공방전에 이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리한 소환에, A반을 패느라 끌어쓴 마력까지.

최소 보름은 정양해야 하는 환자 신세지만 눈까지 먼 건 아니었다.

이리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잖은가.

“로르, 잘 생각해 봐. 사람은 즉흥적으로 살면 안 되는 거야. 그렇게 살다 패가망신, 몰라?”

“난 사람이 아닌데?”

“아, 비유가 그렇다는 거잖아. 비유가! 이 똥멍청아!”

“히히. 그런가?”

“허이구. 속 터져. 뭔 말이 통해야 뭘 해 먹지.”

그랬다.

수작질도 상식이 통해야 먹히는 거였다.

답답함에 가슴을 치던 녹스가 구원병을 부르듯 시선을 옮겼다.

칼브란이 장만해준 사과 모양의 베개, 그것에 턱을 괴고 있는 사냥개에게로.

역시 하나보단 둘이 낫고, 믿을 놈은 저것뿐이었다.

솔직히 저 아둔한 놈을 믿어야 하는 암담한 현실에 회의감이 들었지만.

“어이, 졸개. 이안은 하나뿐이고 쪼갤 수 없는 거 알지?”

[크륵!]

“진짜 쪼개겠다는 건 아니고. 사랑을 독차지하려면 경쟁자는 미리미리 ‘쓱싹’해야지.”

[캬앙!]

“옳지.”

녹스의 시원찮은 언변이 이번엔 빛을 발했다.

은색 눈을 반개한 사냥개가 질풍처럼 로르에게 달려들었으니까.

깨물.

로르의 발꿈치도, 로르의 팔도, 로르의 머리통도.

여기저기 깨물어댔지만 로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재롱이 심하구나, 그런 반응 정도?

코르키가 송곳니로 살갗에 이 자국을 숭숭 남기든, 침 범벅을 하든.

깡깡.

로르는 보따리에 그득 챙겨온 아메디스트 마광석을 발굽으로 펼 뿐이었다.

평평하게 만든 후에 조각 하나하나를 매끄럽게 이어붙이기.

무한 반복이었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자신의 둥지를 완성해 나가는 로르.

‘훌륭한 개판이군.’

셋이 발광하는 걸 지켜본 이안은 총평했다.

저 사이에 끼어들어 봐야 불똥만 튄다.

특히 녹스와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질기게 시달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모른 척하자.’

결론을 내린 이안은 곱게 침대로 기어들어가 잽싸게 누웠다.

시트를 목 끝까지 꼼꼼히 덮은 후.

녀석들이 치댈 가능성을 없애려 아예 눈까지 질끈 감아버렸다.

깨물깨물. 깡깡. 주절주절.

불협화음이 자장가처럼 퍼지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밤이었다.

차암, 평화롭구나.

* * *

정령도 혈압이 올라 죽을 수 있나?

연신 씨근덕대는 녹스를 보며 이안은 순수한 궁금증에 휩싸였다.

벌써 사흘째 저 상태였다.

로르 곁을 떠나지 못하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군 것이.

어떻게든 로르를 쫓아내려던 악착같은 시도, 녹스 혼자만의 고군분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니지.

……정확하게 따지자면 그걸 실패라 할 수 있나.

<히히. 내 둥지에 들어오고 싶은 거야? 자꾸 얼쩡거리는 게 그런가 보네.>

로르의 철면피 공격에, 시도도 전에 매번 무산되어 버리는 것을.

[로르 이 망할 자식!]

“이성을 이기는 건 역시, 무논리지.”

[내 살다 살다 그렇게 말이 안 통하는 놈은 처음 본다.]

“내 스승님 천적을 만나셨네.”

[헹. 고깟 까만 소가 내 천적?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인데 무슨.]

녹스는 허세가 담뿍 녹은 콧김을 토해냈다.

탱천해서 벌름대는 콧구멍이 어찌나 볼만 한지.

그걸 관람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가뜩이나 느린 이안의 걸음이 멈추다시피 했다.

“큭큭. 잘해보셔.”

이안은 철저하게 구경꾼의 입장을 취했다.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라지 않던가.

구경할 생각 만만인 이안의 행태에 녹스의 콧김은 차게 식어버렸다.

[단순무식한 소 얘기는 재미없다. 그만할란다.]

“오늘은 생각보다 짧게 끝내네.”

[다 됐고. 며칠째 잠도 안 자고 고민한 거, 그거나 털어나 봐라.]

녹스는 저 멀리 보이는 B반 기숙사를 보며 발을 통통 굴렸다.

이안이 기숙사 지붕 위에서 매일 보고 있던 곳.

녹스의 시선이 멈춘 곳에 이안의 눈길 또한 머물렀다.

“결계 변형의 주동자를 어떻게 처리할까, 뭐 그런 생각?”

[폰투스 말이냐?]

“어.”

[호오. 어떻게 하려고?]

“그 여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아야지.”

[권력?]

“어. 그게 그 여자의 전부이니, 싹 도려내려고.”

[흐흐흐. 듣기만 해도 속이 다 시원타.]

이안은 한껏 입귀를 비틀었다.

대갚음할 생각에 녹스도 활기가 도는지 날개를 퍼덕거렸다.

몇 달 동안 붙어 있으면 짚신벌레라도 정이 드는 법.

하물며 은근히 신경 쓰던 아이들이 죽을 뻔했으니 오죽할까.

[한데 말이다. 폰투스를 처리한다면서 B반 기숙사에는 왜 갈꼬?]

“아, 그러려면 필요한 아이가 있거든.”

[그래?]

“그 앨 만나기 전에 알아볼 게 있어. 그래서 일단 동태부터 살펴보려고.”

이안은 대꾸를 하며 다시금 머릿속을 정리했다.

폰투스 처리, 이는 이번 사건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다가올 먼 미래를 위해 필요한 작업이었다.

‘지금 잘라내지 못하면.’

악의 떡잎이 무럭무럭 자라나 대성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폰투스가 살리카 가주를 만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학기 말에 있을 파라칸시스 시합에서 A반이 우승한 뒤엔 돌이킬 수 없다.

<가주님, 전 수렁에서 제힘으로 탈출했습니다. 쓸만한 도구란 증명을 한 셈이니 절, 써주십시오.>

다소 당돌한 폰투스의 요청.

그에, 다들 폰투스가 가주 손에 죽을 거라 예상했지만 웬걸.

줄곧 무표정이던 가주가 ‘재미있군.’이란 말을 내뱉고선 폰투스를 거뒀다.

괴물과 괴물의 만남.

가주를 등에 업은 폰투스는 사자의 등에 날개를 다는 형세가 된다.

가주의 그림자로 살면서 저지른 악행이 얼마던가.

그중 압권은 단연 인체 실험이었다.

두 가지 이상의 원소를 다룰 수 있는 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실험.

그를 위해 폰투스는 정령사를 닥치는 대로 납치했다.

뿐이랴.

연구란 명목으로 팔다리 힘줄을 자르고, 배에 구멍을 내고, 심장을 조각내는 등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잠자리 날개 뜯듯 괴롭혔었지.’

고문이 취미였으니.

고문관이었던 폰투스의 악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성치 않은 실험자들의 생명을 놓고 내기 도박을 벌이는 도박장의 주인.

정령사가 아닌 자를 다수의 마물이 있는 우리에 넣고 싸우게 하는 격투장의 주인.

여자든 아이든 가리지 않고 성 노예로 삼은 포주.

폰투스의 다채로운 악행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러니.

‘막아야지.’

과거의 참상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그래야 한다.

인두겁을 쓴 괴물, 그 여자를 절대 에루리안이란 우리 밖으로 풀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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