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B반 기숙사 라플레아관.
이안이 모퉁이에 은신한 채로 기숙사 입구 쪽에 시선을 두었다.
동태를 살피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에 따라 녹스 또한 은밀한 몸짓으로 속살거렸다.
[아직 안 온 모양이다. 그 아이.]
-그러게. 학생회가 길어지나 본데.
고개를 쭉 빼고 있던 이안은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앞으로 실행할 계획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
그가 기억하는 한 ‘친밀하다.’란 단어를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에이프릴 슈튼하노버.’
그녀와는 본디 2학기 초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가까워진다.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는데…….
회귀하면서 접점이 된 사건이 휘발되면서 가까워질 계기를 잃어버렸다.
[……왔다.]
뚜벅.
기다리던 사람이 어스름한 배경을 등지고선 나타났다.
저에게 반가운 이만 보았다면 좋았으련만.
“에이프릴.”
드리운 석양을 밟으며 그녀의 사선에서 보드라운 목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나타난 폰투스.
그녀가 전에 없이 상냥한 표정으로 에이프릴에게 팔짱을 꼈다.
친밀한 몸짓에 에이프릴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기분 좋은 미소를 따라 푸른색 단발머리가 흐트러졌다.
짙푸른 바다와도 같은 잔상.
그걸 보는 이안의 눈가가 어쩐 일인지 파르르 떨려왔다.
그의 동요를 눈치챈 녹스의 눈빛은 반들거렸고.
‘에이프릴은…… 늘 똑같네.’
옅게 머금은 미소, 조용한 걸음걸이.
차분하고 우아한 에이프릴은 작은 새 같았다.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지는 않지만 보고 있노라면 하염없이 보게 되는.
“멜러니, 승마 모임 갈 시간 아냐?”
청초한 미인과 대비되는 폰투스, 식인 꽃이 화려한 미소를 마구 뽐냈다.
“그전에 할 말이 있어서.”
“응? 뭔데?”
“곧 ‘레기나’를 선정하잖아.”
“벌써 그렇게 됐나?”
“응. 그 일로 내일 A반 여학생들끼리 모이기로 했는데 올래?”
폰투스가 팔짱을 끼며 얽어맨 에이프릴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저러다 부러지겠다 싶은 강도.
강한 당김인데도 애교라 여긴 건지 에이프릴은 낯을 찡그리지 않았다.
“내가 가도 돼?”
“나랑 제일 친한 네가 안 오면 누가 와?”
“후훗.”
“황금 민들레 햇차도 준비해 놨어. 너랑 마시려고.”
“이번에도 새로운 차를 준비한 거야?”
“아, 네가 잠이 잘 안 온대서 일부러 황금 민들레로…….”
폰투스가 말을 하다 말고 에이프릴의 손을 들어 올렸다.
“에이프릴 너 또.”
“응? ……아.”
“또 손등을 긁었어? 요즘 부쩍 이러네. 예전엔 이런 버릇이 없었잖아.”
“그냥 좀 간지러워서.”
“간지럽다고 이렇게 긁어? 봐, 피 나잖아.”
“아. 요즘 부쩍 간지러운 게 좀 심해진 것 같긴 해.”
“그래?”
폰투스의 시선이 피딱지가 얹은 에이프릴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나붓한 눈꺼풀 위로 예리한 번득임이 찰나를 스쳐 갔다.
단순히 역광인가 싶은 순간을 이안은 똑똑히 목격했다.
“마침 황금 민들레가 가려움에도 효능이 있는데 잘 됐다.”
폰투스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이프릴의 손을 꽉 쥐었다.
가증이 수준급이었다.
그 행태를 생눈으로 목격한 이안은 입귀를 비틀며 냉소를 드러냈다.
‘저 정도면 진짜 재능 낭비지.’
연극 무대에 섰으면 대성했을 확신의 떡잎이었다, 폰투스는.
걱정하는 척하며 집요하게 상대의 감정을 해부하는 시선이라니.
게다가 상처를 교묘히 자신의 손톱으로 헤집어댔다.
그 탓에 상처가 쓰라린지 에이프릴이 인상을 찌푸리자 폰투스가 얼른 손을 떼었다.
“아. 승마 모임에 늦겠다. 에이프릴, 나 그만 가볼게.”
“넌 매번 승마 모임에 가기 전에 날 보러 와서 꼭 늦더라. 얼른 가봐.”
“너니까. 너니까 보러 오는 거야.”
“너도 참.”
“아무튼, 상처는 그대로 두지 말고 치유해.”
“으응.”
용건이 끝나자 폰투스가 화사한 자태로 생긋거리며 떠났다.
바쁘다면서 후딱 갈 것이지 자꾸 돌아볼 건 뭐람.
폰투스의 행동이 이안에게는 꼴값인데, 에이프릴에겐 귀여워 보이나 보다.
그녀가 연신 포스스 웃음을 흘렸다.
해사한 낯빛에 이안은 말끄러미 에이프릴을 쳐다보았다.
덧칠된 기억 속 어느 날들과 다른 미소.
<다친 거 숨기지 말라고 했잖아, 이안. 나처럼 예쁜 치유사 뒀다 뭐해.>
<……잘 생각해 봐. 널 보호해 줄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널 지켜주고 싶지만 뜻대로 안 된다. 내가 힘이 없어서.>
힘없이 웃은 에이프릴은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려고 노래를 불렀다.
다독이는 목소리가 흡사 요람처럼 따스했었다.
하루하루 쌓여가던 그의 분노를 얼마쯤은 녹여줄 만큼.
그만큼 에이프릴은 그의 세계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존재였다.
폰투스로 인해 그녀가 자살하기 전까진.
짧은 생을 자신의 손으로 잘라내 버리기 전까진.
* * *
에이프릴을 보고 돌아온 이안은 C반 기숙사 지붕 위에 올라섰다.
오늘따라 저녁 하늘이 유난하게 짙푸르다.
마치 에이프릴이 죽어버린 어떤 날처럼.
마음이 들끓는 색을 보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녹스가 말을 걸어왔다.
[까다로운 네놈의 선 안에 들인 아이였구나.]
“……에이프릴?”
[눈빛이 폭신했다. 가주와 칼브란, 클로에 교수와 올리브를 볼 때처럼.]
“어? 거기에 왜 레브는 없어?”
[고놈을 보는 눈빛은 뭐랄까-. 복잡하다. 쉬이 설명이 안 되지.]
하여튼 예리하다.
잘 감춘다고 감췄는데 종일 붙어 있다 보니 쉽지가 않다.
딱히 녹스에게까지 뭘 감추고 싶지도 않고.
“아아. 빚을 져서 그래.”
[핑계 한번 진부하구나. 걸핏하면 빚을 졌다고 둘러대긴.]
“이젠 다른 핑계를 찾아야겠다. 안 넘어가네.”
[레브 고 시커먼 놈 얘기는 중요치 않다. 큼큼. 호옥시 말이다. 에이프릴을 향한 너의 말랑한 그 눈빛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만.
[머시기한 열혈 청춘의 눈빛?]
녹스가 눈을 희게 까뒤집으며 치덕댔다.
꿈에 나올까 무섭다.
그런 거 아니라며 이안은 녹스를 발로 밀어버렸다.
힘줘서 밀었는데 녹스가 끝까지 버티며 잇몸이 마르도록 웃어젖혔다.
저걸 확!
헛소리를 지껄이는 녀석 때문에 곤란한 와중.
“이안, 미안. 우리가 늦었지?”
올리브와 레브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으로 다급히 온 티를 내며 이안을 구제했다.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온 개코원숭이 두 마리가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별로. 나도 오래 기다린 거 아니라서.”
“다행이다.”
올리브와 레브가 이안의 곁에 주저앉았다.
경사가 가파른 첨탑 구조라 엉덩이를 붙일 곳이 비좁다.
다닥다닥 붙어선 올리브가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러더니 입을 뻐끔대며 앞으로 나올 대화를 듣기만 하겠다고 표명했다.
머리 쥐어짜기 싫단 뜻.
그런 올리브를 내버려 두고 레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폰투스를 엿 먹일 수 있는 사람을 보고 오겠다더니 빨리 왔네?”
“아아. 동태만 살핀 거라.”
“그래서 걔로 폰투스가 원하는 걸 뺏겠다고?”
“어. 식인 꽃이 원하는 건 두 가지니까. 레기나와 파라칸시스 시합 우승.”
폰투스가 쥐려고 하는 레기나와 파라칸시스 시합.
이 둘은 연관성이 크다.
그러니까 1년 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공정하게 겨루는 파라칸시스 시합.
여기서 우승하면, 기여도가 높은 열 명은 중앙 아카데미 추천서를 얻는다.
폰투스로선 돌아갈 구실이 생기는 셈.
구실은 곧 명분을 뜻했다.
물론 명분만 챙기려고 폰투스가 우승을 노렸을까.
자신의 힘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었다.
우승은 곧 모든 이들의 정점에 섰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에.
‘폰투스가 살리카 가주에게 보여주려는 것도 그거지.’
더하여.
폰투스가 노리는 다른 하나, 레기나.
레기나는 추천서를 얻은 열 명에게 불의 가시를 수여하는 수여자를 말한다.
이게 뭐 그리 중요하겠냐 싶겠지만.
레기나가 되려면 학생들의 ‘절반’이 넘는 지지를 얻어야만 한다.
얻기가 녹록지 않은 감투인즉.
이 감투로 폰투스는 지배력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때든, 어느 장소든 사람을 아우르고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저는 증명해 보였습니다. 현재의 가능성을, 그리고 저를 어떻게 쓸 수 있을지에 대한 것까지.>
폰투스가 살리카 가주 앞에서 당당히 내보였던 것들.
그리하여 그 여자의 토대가 되었던 레기나와 파라칸시스 시합 우승.
이것들을 빼앗아 싹을 자를 작정이다.
이안은 엄지에 끼워진 정령석 반지를 천천히 돌렸다.
“우선은 레기나부터 손대야 하는데.”
“그건 여학생만 참여하는 거니까 이안 네가 만난 여자애가 필요하단 거지?”
“어. 폰투스를 인기로 밀어낼 수 있는 유일한 애니까.”
“하긴. 조용하긴 해도 예뻐서 인기가 좀 있긴 하더라.”
이안의 손끝을 보며 레브가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근데 인기라면, 누굴 키우기보다 차라리 이안 네가 여장하고 후보 등록하는 거 어때?”
“허. 저거 아군이야? 적이야?”
“왜? 가능성이 충분한 건 이안 너니까 그렇지. 크크큿.”
“그럴 거면 차라리 네가 하지 그러냐. 머리카락도 길어서 가발을 안 써도 되겠구만.”
“난 키가 커서.”
“레브 너나, 나나 별 차이 안 나거든.”
“6피트(182Cm)와 그 이하는 하늘과 땅 차이란다, 이안.”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난 네 어깨에 팔을 거칠 수 있는데 넌 안 된다는 거? 뭐 그 정도.”
심각한 척하던 레브가 끝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방이 지뢰고, 사방이 적이었다.
듣고만 있다가 캬캬캬 거리는 올리브나, 배꼽 빠지게 폭소하는 녹스나.
이것들과 뭘 도모하려는 내가 미친놈이다.
기운이 빠진 이안은 아련하게 저녁 하늘을 쳐다보았다.
* * *
다음날 제1 약제실.
직접 채집한 케르도스로 정령 치료제 만들기.
이를 주제로 한, 합동 수업이 있어 1학년 전체가 약제실에 모였다.
약제실의 오른쪽 구역엔 A반이, 중앙엔 B반이, 왼쪽엔 C반이.
사이에 가림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서로가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어딘가 껄끄러운 분위기.
누구도 입을 열지 않으니 약제실엔 온통 꽃을 찧는 소리만 울렸다.
쿵쩍쿵쩍.
이안은 케르도스를 집어 들다가 흘끗 B반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에이프릴과 폰투스가 같은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대화를 나눠봐야 하는데.’
좀체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회 임원이라 그런지 에이프릴이 예상보다 더 바빴으니까.
“흐음.”
이안은 꽃대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손길을 멈칫했다.
이거라면…….
아마 케르도스라면 가능할 듯도 싶다.
씨익 미소를 쪼갠 이안은 검은 꽃잎에 찬 마력을 집어넣었다.
그러자마자 꽃잎에 새겨지는 금빛 늑대.
늑대를 슥 문지른 이안은 발치에 엎드려 있는 사냥개에게 케르도스를 건넸다.
-코르키, 알지?
[크륵.]
-너만 믿는다.
[크르륵!]
꽃대를 입에 문 사냥개가 거침없이 출발했다.
하달받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연함을 대롱대롱 매단 채로.
그만큼 힘찬 걸음 따라,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라붙는 건 당연지사였다.
“야, 쟤 봐봐.”
“꽃 물었다, 꽃 물었어. 이야.”
“큭큭. 꽃 물고 춤까지 추는데?”
“미친다. 어, 어, 어? 코르키 쟤, 사라 물 정령 앞에서 멈췄는데?”
“뭐야. 구애하는 거였어?”
“캬아. 이안 정령. 우리보다 낫다. 여기서 연애라니.”
시선이 많아질수록 사냥개의 엉덩이가 더욱 위로 들렸다.
깨발랄함의 극치.
사냥개는 물 정령의 주위를 한 바퀴 돈 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다시 나아갔다.
정확하게 폰투스가 앉아 있는 그곳으로.
이에 폰투스가 머리카락을 도도하게 쓸어넘겼다.
사냥개의 걸음이 자신에게 향하는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