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72화 (72/214)

제72화

일명 일곱 여왕들.

자신들이 포식자인 줄 아는 이들은 항상 시선을 내리깔고 상대를 보았다.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듯이.

그러고는 험담을 수시로 입에 달고 살았다.

누구누구의 정령은 쓰레기라는 둥.

누구누구랑 스쳤는데 소름 끼쳤다는 둥.

이들의 민낯을 알면서도 에이프릴은 폰투스 때문에 참았다.

그저 폰투스와 함께 있는 게 좋아서.

폰투스와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기뻐서.

마냥 참아내던 것들인데 오늘은 너무나 속이 울렁거렸다.

에이프릴이 오른손을 왼손등에 가져다 대자 폰투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왜 말이 없어, 에이프릴?”

“……그냥 좀 기운이 없네.”

“요즘 부쩍 그러는 것 같다, 너.”

염려를 한껏 머금고선 폰투스가 다관을 들어 홍차를 나눠 담았다.

하얀 찻잔을 손수 나눠준 뒤.

“에이프릴의 잔에는 특별히 내 맘을 담아야겠다. 기운 내라고.”

사막의 모래를 닮은 꽃잎을 폰투스가 찻잔에 떨궜다.

하나, 둘, 느리게 떨어지는 마음들.

그것이 호의인지 악의인지 가늠하기에는 폰투스의 표정이 지나치게 상냥했다.

<네가 더는 슬퍼지지 않을 주문을 여기에 담았어. 마셔봐.>

악몽을 꾸다 일어난 그녀에게 처음 꽃차를 건네주었을 때처럼.

아직 오빠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그녀의 슬픔을 나눠질 때처럼.

‘……여기에 플로시케의 독이.’

에이프릴은 하염없이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차의 빛깔이 보기 좋게 붉어서 절로 입맛을 당기게 했다.

하지만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려 에이프릴은 손에 쥔 각설탕을 문질렀다.

표면이 까끌까끌했다.

<네가 독서모임 때마다 마신 차에 극독이 들었어.>

이안은 진실을 폭로하며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각설탕을 건넸다.

독의 유무를 판별하려고 은침을 쓰는 건 티 나는 방식이었다.

상황에 맞춰 유동적으로 쓸 수 있는 ‘독 감별’ 마도구 중 하나인 별 모양 각설탕.

이 하얀 걸 찻잔에 넣어 차 색깔과 같아진다면.

‘독이 있는 거야.’

<이 각설탕, 꽤 비싸게 샀다. 네 목숨만큼의 값어치를 할 거야.>

“……에이프릴, 에이프릴.”

“으응?”

누군가가 손을 흔들자 에이프릴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다정하게 걱정하는 폰투스가 시야에 그득 찼다.

저 얼굴.

저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꽃 같은 저 얼굴은 여전히 상냥했다.

여전히 무척 다감했고.

그래서 언제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라 여겼는데…….

아니지.

하나뿐인 자매라고 여겼는데.

무한한 믿음에 되돌아온 답이, 이 차였다.

독이 들었을 리 없다고 이안의 추측을 부정해야 하는데, 그녀의 목구멍이 조여왔다.

각설탕을 쥔 손이 마구 떨려와 주체가 되질 않았다.

만약, 만약…….

“진짜 무슨 일 있어, 에이프릴?”

“…….”

“식은땀 좀 봐. 어디 아픈 것 같은데.”

어딘가로 흘러가는 에이프릴의 의식을 폰투스가 다시 한번 잡아챘다.

다정하게 이마로 뻗어오는 손.

열을 재려는 행동을 에이프릴은 몸을 뒤로 빼 피해버렸다.

“…….”

그리 크지 않은 동작이었지만 상대가 하필 폰투스였다.

여왕의 호의가 거절당했으니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버렸다.

‘대체 왜 저래?’라는 여학생들의 의아한 눈빛에 에이프릴은 벌떡 일어섰다.

“미, 미안해.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이안은 진실을 확인하라고 했지만, 도통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무지 이 상황 자체가 믿기지 않았으니까.

대체 멜러니가 왜?

무슨 이유로 자신을 해치려 하는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먼저 가볼게. 멜러니 미안해.”

“아니야. 아픈 사람을 내가 귀찮게 했네. 푹 쉬어.”

“……응.”

어설프게 답한 에이프릴은 빠르게 B반 기숙사를 향해 내달렸다.

도망치듯 뛰다가 종내는 엎어질 듯 위태해진 뜀박질.

어딘가 절박한 에이프릴의 뒷모습을 폰투스의 시선이 집요하게 뒤쫓았다.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고 의견도 곧잘 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에이프릴이었지만.

‘감히 내 손길을 피해?’

분명, 마음에서 끄집어낸 거부였다.

심지어 경계와 의심이 그득 들어있었다.

사람이 급작스럽게 태도를 바꾸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폰투스는 에이프릴의 찻잔을 느릿하게 손끝으로 두드렸다.

재밌네.

* * *

도망온 에이프릴이 해답을 구할 곳은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이안.

독을 먹인 범인을 놔두고 엄한 사람을 닦달하는 모양새일지라도.

“후우.”

그녀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초조하게 밀실을 서성이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배불리 먹은 짐승의 여유로움.

뭔가를 열심히 하는 이안과는 묘하게 어긋난 듯 어울리는 걸음이었다.

발걸음이 멈췄고, 그렇게 마주한 두 사람.

이안의 말투는 상황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단정적이었다.

“도망왔나 보네. 진실은 확인도 못 하고.”

“이해할 수가 없어서.”

“뭐가?”

“왜 멜러니가 날 죽이려 하는지. 이유가 없잖아. 날 죽이려는 이유가.”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굳이 이유가 필요하나?”

“…….”

“이유가 필요한 건 에이프릴 너 같은데. ‘사정이 있겠지’, ‘내가 뭔가 잘못했을지도’ 이런 것들로 폰투스를 이해하고 싶어서.”

이안은 말을 거르지 않고 에이프릴의 정곡을 찔렀다.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어서 에이프릴은 손을 마주 잡았다.

상황을 자꾸 부정하는 건 폰투스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인정하는 게 무서운 거였다.

현재를 받아들이면 그간 쏟아부은 마음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녀를 지탱하던 관계가 허상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에루리안에 막 입학했을 학기 초.

오빠를 떠나보낸 때라 우울해하던 에이프릴에게 폰투스가 다가왔다.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항상 혼자서 도서관에 있더라.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목 끝까지 차오른 슬픔에 질식해 죽을 것 같던 그 당시.

갈가리 찢긴 마음을 붙들어 준 것은 폰투스였다.

단순히 친구라는 말로 정의될 수 없는 관계.

그녀를 구해준 다정함을 도저히 내다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갈팡질팡하는 에이프릴에게 선고를 내리듯 이안이 말문을 열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볼까? 별거 없어.”

“응?”

“그냥 네가 예쁘고 똑똑해서라고. 폰투스가 에이프릴 슈튼하노버를 죽이고 싶은 이유가.”

“단지…… 그거라고?”

“폰투스 입장에선 그보다 중대한 사유는 없지.”

“…….”

“만인의 위에 군림해야 하는 폰투스로선 네가 걸림돌이니까.”

다른 무엇도 아닌 그런 거라면.

진짜 그것 때문이라면, 수많은 가정 중에 최악이었다.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에이프릴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는 게.”

“고작? 정말 ‘고작’이라고 생각해?”

“…….”

“질시만큼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것도 없는데. 너도 알잖아.”

‘또’다.

뭔가를 아는 투다.

처음 대면했을 때도 느꼈지만, 대화 사이사이 그런 기색이 짙게 묻어나왔다.

그래서일까.

이안의 단정에서 에이프릴은 자신도 모르게 ‘오빠’를 떠올렸다.

천재 소리를 듣던 유능한 정령사.

그녀의 우상이자 동경이었던, 상급 빛의 정령과 결속을 앞둔 정령사.

헤이든 슈튼하노버.

그는 실력이 월등한 탓에 줄곧 질시의 대상이 되곤 했다.

방계가 주제넘게 가질 수 없는 자질을 가져서.

오빠의 재능이 부각 될수록 그에 따른 악의도 몸집을 부풀렸고 기어이.

<전신의 혈맥이 회복 불가하게 끊어졌습니다. 마력 회로를 돌리지 못하니 더는 정령사로서 활동하는 건…….>

임무를 나갔다가 오빠는 그를 질시하던 자들에게 배신당했다.

끝끝내, 오빠를 자살로 밀어 넣은 질시.

그 시커먼 악의를 에이프릴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쥐죽은 듯 살리라 결심을 했다.

납작 엎드려 살면 들풀처럼 관심에서 멀어질 줄 알았으니까.

에이프릴은 씁쓸해지는 감정을 감추려고 고개를 숙였다.

스윽.

땅만 보는 그녀에게로 이안이 가까이 다가와 눈을 마주치려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에이프릴 슈튼하노버.”

“……어?”

“폰투스가 너한테 어떤 존재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네 목숨보다 중요해?”

“내 목숨…….”

“그게 네 목숨보다 중요했다면 차를 마셨을 테지. 그게 아니라서 나와 얘기하고 있는 거고.”

“…….”

단언에 반박이 따라붙지 못했다.

“상황 정리는 끝난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

“누구도 널 휘두를 수 없게 해. 네 목숨을 남한테 맡기지 말고.”

이안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헤이든, 네 오빠처럼 되기 싫다면.”

“참 쉽게…… 얘기한다.”

“어려울 거 있나.”

가벼이 말한 이안이 숙였던 허리를 펴자 거리가 멀어졌다.

행동이든 말투든 무게감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네 목숨을 남에게 맡기지 마.’라고 할 땐 꾹꾹 누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러한 경험을 해본 것인 양.

폐부 깊숙한 곳을 건드는 울림에 에이프릴은 마주 잡았던 손을 뗐다.

마음의 헤멤을 한쪽으로 기울여야만 했으니까.

“그럼……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내 목숨을 챙기겠다고 하면 말이야.”

“다음?”

“어떤 계획이 있어서 나한테 정보를 줬을 거 아냐.”

기민하고 영민하다.

조용히 살겠다며 자신을 절제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

본디 에이프릴 또한 그녀의 오빠만큼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그게, 질시를 부풀린 원인이었다.

고작 방계의 가문을 이끌 후예들이 워낙 특출났기에.

“이안 넌, 네 선 밖의 사람에게 섣불리 호의를 베풀지 않잖아. 그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하핫. 들켰네. 그렇다면 얘기가 더 쉽겠다.”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일단은 연기부터 해야지.”

“연기?”

“어. 폰투스를 한 방 먹일 수 있는 연기.”

이안의 얼굴은 맛있는 뼈다귀를 흔들며 꾀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뼈다귀를 얻으려면 잘 따라와야 한다는 것처럼.

* * *

이안과 에이프릴의 작당 모의가 있은 지 며칠 후.

교실을 부술 모양인가 보다.

우당탕.

오스틴이 힘차게 문을 열고선 헐떡이며 뛰어왔다.

“야, 너희들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오스틴은 침을 연거푸 삼키다가 입을 벙긋거렸다.

“케에엑.”

사레가 들려서 말 대신 침만 다량 분포하고 말았지만.

“그게, 그러니까, B반 에이프릴이 피를 토하면서 쓰려졌대.”

“아, 그거. 나도 좀 전에 들은 건데, 에이프릴의 찻잔에 누가 독을 타서 그런 거라며.”

“누가가 아니라 멜러니가 범인이라잖아.”

“야, 솔직히 그게 말이 되냐? 착하기론 천사 뺨을 후려치는 멜러니가?”

“그러게. 에헤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이지.”

“얼굴 예뻐, 똑똑해, 집안 좋지, 뭐하나 부족한 게 없는 앤데 뭐하러?”

“하긴. 그치? 이유가 전혀 없지.”

“이유야 만들면 수천 개라도 만들 수 있지. 네가 멜러니를 알아?”

“그거야…….”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른다. 나쁜 짓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속된 말로 그렇게 웃으면서 속에 가시를 품고 있을지 누가 알겠냐?”

아이들의 반응은 둘로 갈라졌다.

폰투스가 범인이라더라.

천하의 폰투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하냐.

이런저런 말이 오가는 속에 단 세 사람만은 입을 붙이고 있었다.

이안과 레브, 그리고 올리브.

그들은 입 한번 벙긋거리지 않고 눈빛으로 같은 말을 내뱉었다.

‘소문이 제대로 잘 퍼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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