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73화 (73/214)

제73화

계획이 잘 굴러간다고 그게 끝일까.

잘 굴러가는 눈덩이일수록 제어를 철저히 해야 변수가 없는 법.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이안의 방에 온 레브는 새큼한 낯빛을 내보였다.

‘여긴 어째…….’

책상에 있는 성 모형의 집.

바닥에 굴러다니는 사과 모양의 인형.

왼쪽 구석탱이를 차지한, 마광석으로 만든 휘황찬란한 동굴.

‘점점 정령 소굴이 돼가네.’

사람이 산다는 흔적은 오로지 침대 한정이었다.

쥐꼬리만 한 공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정령 위주였으니까.

레브는 이곳의 비인간적 실태를 깨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령이 많은 것도 썩.”

“……어?”

“아냐. 그냥 혼잣말.”

방의 생태를 연구하려고 온 것이 아니잖은가.

레브는 대화의 물꼬를 폰투스와 소문 쪽으로 돌렸다.

“소문을 퍼트린 의도가 잘 먹히고 있어.”

“잘 먹힌다 뿐이야? 활활 타고 있지. 폰투스의 단단하고 견고한 명성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그게 레기나를 뺏기 위한 첫발이니까.”

“그게 시작이지.”

“여튼 주변을 잘 이용해 덫을 놓고, 둘을 찢어놓는 것까진 성공했다.”

“이대로 계속 친하게 지내선 에이프릴이 레기나가 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레기나 후보를 확보했다 뿐일까.

확고부동한 폰투스의 지지기반을 흔들었으니 무척 유의미했다.

계획이 순항 중이라는 의미.

이안은 창밖 너머, 다른 반 기숙사 쪽으로 눈길을 두었다.

“이 계획에 학생회 여학생들의 도움이 컸어.”

“슈튼하노버가 쓰러지자마자 소문을 퍼트린 게 그들이니까.”

“잽싸더라.”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쉽게 폰투스한테서 돌아설 줄은.”

레브가 실소를 머금자, 이안 또한 비소를 머금고서 차게 말했다.

“편? 누구라도 기회만 있다면 폰투스를 물어뜯을 하이에나들인데 편은 무슨.”

“이간질의 달인이 여기 있었네.”

“바람 불면 무너질 모래알 같은 관계라서 가능한 작전이었어.”

“하긴. 소문은 우리보다 그들에게서 퍼져야 괜한 의혹을 사지 않을 테니.”

레브는 지금까지의 성과를 차근히 정리해보았다.

순항하고 있다고 방심하다간 언제든 꼬꾸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진 순조로운데…… 폰투스가 이대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지?”

“그렇겠지.”

언제든 넘칠 수 있는 찻잔 속의 풍랑이었다.

완벽한 계획을 세워도 언제나 변수는 사람이기에.

긴장을 조이며 두 사람은 폰투스가 어찌 나올지 예측을 해보았다.

방어할지, 공격할지.

이에 대해 머리를 맞대며 얘기를 나누느라 둘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 * *

밤을 새운 다음 날이었다.

그러니까 에이프릴이 쓰러진 지 이틀째가 되던 이른 오후였다.

펑펑 쏟아진 함박눈으로 인해 발목까지 푹푹 잠기는 궂은 날.

돌아다닐 날씨가 아니었지만, 외출을 감행한 이안은 B반 기숙사로 향했다.

“몸은 괜찮아?”

이안은 침대에 기대있는 에이프릴에게 푸른 장미를 건넸다.

선물을 받을 거라곤 생각지 못해서였을까.

눈을 크게 뜬 에이프릴이 이내 향기를 맡으며 옅게 웃었다.

“바다 냄새가 나.”

“약간 짭조름하지. 맹숭맹숭한 소금처럼.”

“그리워지는 향이야. 아, 답이 늦었네. 내 몸은 괜찮아.”

푸른 장미는 루하흐 가의 상징이었다.

직계 외에는 절대 기르지 못하도록 관리를 철저히 하는 꽃.

그래서 구하려면 이것저것 절차가 까다롭다.

어렵사리 구했다는 걸 아는지 핏기없는 에이프릴의 볼에 혈색이 돌았다.

“고마워, 와줘서. 푸른 장미도 고맙고.”

“크흠. 레브한테 들었어. 깔끔하게 해독이 됐다고.”

“다 이안 네 덕분이야.”

“뭘. 서로가 각자의 몫을 한 것뿐인데.”

“그래도 플로시케란 극독의 해독제는 구하기 힘들잖아. 네가 아니었으면…….”

“됐어. 구할 수 있어서 구한 것뿐이니까.”

이안은 고마워하는 마음을 대충 넘겨버리려 애썼다.

누군가를 구했다는 것.

그 대상이 지난 생에 구해주지 못했던 에이프릴이라서 기분이 좋았다.

심장이 울렁거릴 정도로 좋았지만 그래서였다.

뭔가 속절없이 들뜨고 마는 게 생경하고 약간은 거북해졌다.

하여 괜스레 반지만 만지작대고 있는데, 에이프릴이 몸을 일으켰다.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한 그녀가 푸르스름해진 입술을 뗐다.

“신세 진 건 꼭 갚을게.”

“계획은 이제 시작이야.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정산해도 돼.”

핏기없는 손으로 에이프릴이 푸른 장미의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어쨌든 나는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이안 네가 원하는 걸 얻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얻었어.”

“그래? 난 또. 멜러니가 가짜 범인을 만들어내서 얻은 게 없을 줄 알았지.”

“뭐. 예상했던 바니까.”

이안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폰투스가 겨우 이 정도 공격에 꼬꾸라질 거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면 빠져나갔지.

그의 예상대로 폰투스는 기어이 ‘가짜 범인’을 만들어 희생시켰다.

없는 죄를 술술 토해낸 독서모임의 여학생.

그녀에게는 퇴학 권고가 떨어졌고, 곧 에루리안을 떠나야 한다.

이로써 표면적으론 독이 든 차 사건은 결말에 이르렀다.

“애초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신경 쓰지 마.”

“그렇다면 다행이다.”

에이프릴은 마음의 짐을 덜었다는 듯 옅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내가 레기나 후보에 등록하는 건가?”

“어. 그게 계획의 끝이니까.”

이안은 얼추 대화를 끝맺고 에이프릴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앉아 있는 것을 힘겨워하고 있었다.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걸 보니 도저히 뭉개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만 쉬게 해줘야 할 듯싶었다.

“난 이만 가봐야겠다.”

“벌써?”

“내가 더 붙잡고 있다간 네가 쓰러질 것 같아서. 몸조리 잘하고.”

“…….”

“간호 브라우니를 고용해놨으니 당분간 널 도와줄 거야.”

말을 끝내고 이안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던 차.

만지작만지작.

꽃잎이 짓뭉개지도록 문대는 에이프릴의 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뭔가 복잡하게 엉킨 생각을 풀어내지 못한 모양새였다.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서 그냥 못 본척하려 했는데…….

“왜 그랬을까? 대체 멜러니는 왜?”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뭉개진 꽃잎처럼 새어 나왔다.

이유를 들었어도 온전히 납득하진 못한 것 같다.

하긴.

마음을 터놓으며 신뢰했던 상대의 배신이 쉬이 받아들여질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자책하기 싫어도 ‘내가 잘못했나.’라는 생각을 더러는 할 터.

제 살을 깎아 먹는 게 그런 인간을 믿었단 사실보다 인정하기 편할지도.

도로 의자에 앉은 이안은 명쾌하게 답했다.

“예뻐서라니까.”

“……뭐?”

“저번에 말했을 텐데. 네 능력이 출중해서 그런 거라고.”

“그 이유 말곤 정말로 다른 게…….”

“없어.”

이안은 냉정하다 싶을 만큼 칼같이 잘라버렸다.

이 시점에 필요한 건 거짓된 달콤함보다 잔혹한 진실이었다.

당장 마음에 생채기가 나더라도 가만둬서 곪는 것보다 나을 테니.

“폰투스가 상냥하다고 했지? 화도 일절 내지 않고.”

“언제나 그랬어. 언제나.”

폰투스를 괜히 여신에 비유하는 게 아니었다.

언제, 어느 때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적이 없어서였다.

에루리안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폰투스가 어쨌는지 알기에 에이프릴은 납득할 수 없는 거였다.

그녀가 문지르고 문질러 짓이겨진 꽃잎의 탁색이 폰투스를 닮아서일까.

탁색의 꽃잎을 응시하는 이안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건 폰투스가 폰투스라 그런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어.”

“‘아랫사람에게 상냥해라.’ ‘아랫사람에게 베풀어라.’ 등등, 소위 명문가 집안이 가르치는 학습화된 교육이라고.”

“학습화된.”

“폰투스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버러지들에게 감정을 드러낼 필요 없다, 뭐 그런 거지. 그리고…….”

“…….”

“그리고 그런 버러지가 저와 대적할 만한 기미가 보인다면.”

“…….”

잔혹한 진실 앞에서 에이프릴은 꽃잎을 뭉개던 손을 말아쥐었다.

새파란 물이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하. 왠지 허탈하다. 그래도 멜러니가 날 질투한다고 했을 땐…….”

그녀는 뒷말을 생략했다.

‘사람을 질투했다.’

이것과.

‘버러지 중에 나와 겨룰 수 있는 자가 있어 밟으려 했다.’

이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폰투스의 질투는 까놓고 말해 후자에 해당했다.

에이프릴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거지 같은 상황인데, 눈치 없는 눈물이 새어나려고 했다.

배신감 때문일까.

아니면 겨우 그 정도 취급받은 것에 대한 분노일까.

뒤엉킨 감정으론 명확한 선을 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는 에이프릴을 이안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어떤 위로도 건네지 않은 채로.

* * *

‘독이 든 차.’ 사건 이후 에루리안의 분위기가 격류에 휘말린 것처럼 어수선해졌다.

‘뒤통수 뚫리겠군.’

그리고 파란을 일으킨 장본인, 이안은 뼛속까지 쑤시는 살기를 느꼈다.

범인은 폰투스의 친위대들이었다.

최소 둘 이상의 정령을 보유한 놈들이라 그런지 기백이 넘쳐났다.

살벌함만으로 검은 소도 때려잡을 지경.

‘폰투스가 수모를 당한 게 나 때문이라고 여기니 그렇겠지.’

그들은 폰투스를 똘똘 에워싸고 있었다.

어떻게든 여왕벌을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상태였다.

아주 광신도가 따로 없다.

광신도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선 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충성에도 가치가 있는 줄도 모르고.’

용을 쓴들, 주인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저들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폰투스는 도도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명성에 금이 가기 전과 하등 다르지 않은 모습.

‘과연.’

폰투스다웠다.

어느 때건 어느 상황이건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는 걸 보면.

하긴 저러니, 식인 꽃이니 살인귀니 하는 악명에도 무수한 추종자들이 있었겠지.

지금 이 에루리안에서처럼 말이다.

‘저런 식인 꽃을 상대하려면 물렁해선 안 되는데…….’

이안의 시선이 폰투스의 왼편으로 움직거렸다.

에이프릴은 여전히 폰투스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거기다 우아한 자세로 약제학 수업을 경청하고 있었다.

폰투스의 기세에 일절 눌리지 않았다 뿐일까.

담담하게 흘려보내며 제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어제의 흔들림은 온데간데없네.’

예상보다 더 에이프릴은 의연했다.

막상 폰투스를 만나면 갈무리하지 못한 마음을 전부 드러내 버릴까 걱정했었는데.

약간의 걱정이 무색해지게 잘 해내고 있었다.

실상 독에 관해 폰투스에게 따져봐야 득 될 게 없었다.

가짜 범인이 확정된 마당에 들이대봤자, 여왕벌을 모함하는 꼴밖엔 안 될 테니까.

그렇기에 지금은 최대한 본심을 감춰야 할 때였다.

‘잘 해내고 있네.’

이안의 시선이 에이프릴에게 잠시 정체된 사이, 무어라 재단할 수 없는 눈길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시선의 주인은 멜러니 폰투스였다.

씨익.

눈 마주침에 미소를 쪼갠 이안은 머리카락을 멋들어지게 쓸어넘겼다.

폰투스와 친위대들 보란 듯이.

“훗. 피곤하군. 인기인의 숙명이란.”

“지랄한다.”

이안의 자뻑에 곁에 있던 레브가 즉답했다.

칼 같은 대꾸에 이안은 능글능글한 낯빛을 하곤 레브의 팔을 밀었다.

“질투는 추한 거라네, 친구.”

“이렇게 자꾸 헛소리할 땐 한 대 치는 게 특효약인데.”

두 사람이 시시덕거린 잠깐의 틈.

“레브 아르데슈, 내 수업이 시시한가?”

기드온 교수가 불쾌하단 감정을 드러낸 채로 레브에게 물었다.

잘 보여야 하는 이안에겐 뭐라 할 수 없으니 만만한 레브를 표적 삼은 것이다.

“아닙니다.”

“안타깝구나. 한미한 방계일수록 책잡히기 쉽다는 걸 모르나. 매사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했는데 그걸 잊다니.”

하아, 기드온은 보란 듯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