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75화 (75/214)

제75화

수업이 끝난 후.

연무장을 나서는 에이프릴의 걸음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에이프릴-.”

절친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는 올리브의 것이었다.

한없이 해맑은 들뜸.

팔딱팔딱 뛰어오는 모습에 에이프릴의 뇌리로 순간, 이안의 말이 튀어 올랐다.

<하아아. 그냥 강아지 같은 녀석이야. 칠레팔레 하긴 해도 착한 녀석이니까, 잘 봐줘.>

중요한 것은 말의 첫머리, 한숨이었다.

작전을 짤 때도 한숨을 쉰 적 없던 이안의 깊은 한숨.

발가락 끝에서부터 끌어올린 것 같은 한탄의 의미를 에이프릴은 알 것 같았다.

깨발랄한 올리브를 보고 나니 절로 수긍이 갔다.

‘이안도 저 발랄함은 어쩌지 못하나 보네.’

에이프릴의 입가에 저절로 포스스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사이 올리브가 그녀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오올. 오늘 수업의 주인공.”

“민망하니까 그만해.”

“반응 보니 애들한테 많이 시달렸나 봐?”

“평생 받을 관심을 오늘 다 받았어. 이안 덕분에.”

“녀석의 계획은 실패한 적이 없지. 진짜 대단하지 않아?”

“음. 넌?”

“나? 갑자기 이안 얘기하다가 나?”

올리브가 레몬색 동공을 크게 뜨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자기를 왜 언급하냐는 의미였다.

티 없이 맑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 에이프릴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작전을 짤 때마다 보이지 않던 올리브가 내내 걸렸던 탓이다.

“항상 따로인 것 같아서.”

“따로?”

“주제넘은 말일 수 있는데…….”

“괜찮으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뭐든 해. 속에 담아두면 병나.”

“그게 어제 계획을 짤 때도 그렇고, 줄곧 너만 안 보여서.”

“아. 그게 왜?”

“혹…… 그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는 건 아닌가 싶어서.”

“아.”

마냥 밝던 올리브의 신색이 차분해졌다.

극과 극의 변화라 이중인격인가 싶을 정도였다.

“네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

“난 소외 같은 거 안 느껴. 내가 참여를 안 하는 거니까. 난 걔들처럼 머리 쓰는 데 소질이 없거든.”

“아.”

“머리가 둘이나 있는데 나까지 끼어서 뭐 해?”

변명도, 변호도 아닌 진실이었다.

실제로 걸핏하면 회의하자 부르는 이안에게 딱 잘라 말했다.

<캬캬캬. 이안, 내 성격 알지? 나 골치 아픈 거 질색이야. 그냥 진짜로 내가 필요한 거 아니면 결과만 알려줘. 난 묻어갈 거니까.>

당당히 묻어갈 거란 선언.

이후로 올리브는 정말로 진행되는 사항만 주워들었다.

“그러니까 이 부분만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원해서 그런 거니까.”

“아. 그런 거였구나.”

“어허. 마음 약하고 예쁜 우리 주인공께서 그걸 내내 신경 쓰셨고만?”

“…….”

에이프릴이 침묵하자 올리브는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

어쩐지 속내가 시끄러워 보였다.

“근데 에이프릴 네가 왜 그랬는지는 알겠다. 누군가가 생각난 거겠지.”

“…….”

올리브의 직설에 에이프릴은 살포시 입술을 깨물었다.

올리브가 콕 집어 말한 누군가, 그는 그녀의 오빠 헤이든이었다.

무리에서 따돌림당하다 그들의 질시로 끝내 생을 마감한.

이제야 에이프릴은 괜한 오지랖을 부린 이유를 깨달았다.

겹쳐 보인 거겠지.

그녀는 제 속내를 감추려는 듯 양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어쩐지 안간힘 쓰는 것 같은 모습.

그게 안쓰러워서 올리브는 에이프릴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엉클었다.

“너 진짜 귀엽다. 내 동생 같아.”

“…….”

“감춘다고 뭘 감추는데 항상 나한테 들키거든. 도토리 감추는 다람쥐처럼.”

차라리 도토리면 낫지.

사람의 감정이란 건 감추려 할수록 더 심하게 속에서 곪게 된다.

에이프릴도 그럴 테지.

이런 성향이 걱정돼서 올리브는 솔직하게 언급했다.

“뭐든 혼자 안고 있지 마. 그러면 상해. 마음도 몸도 전부.”

“그런 거 없어.”

“어쨌든 혹시라도 얘기할 사람 필요하면 언제든 나 불러.”

올리브는 한참 주절거리다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그를 기다리고 있는 C반 아이들의 불퉁한 얼굴이 보였다.

시간이 지체돼선지 불만이 차오른 볼따구가 두꺼비 같았다.

저러다 독을 물고 튀어 올라.

올리브는 서둘러 에이프릴에게 양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젠 그만 가보겠다는 신호였다.

“애들이 기다려서 나 가볼게. 다음에 웃으면서 보자.”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인사를 끝내자마자 올리브는 개구리처럼 튀어갔다.

조금 전의 진지함이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는 뒤태였다.

경망스러울 정도로 발랄한 뒤태는 곧 무리의 지척에 이르렀다.

그때쯤, 피식 웃은 올리브가 난데없이 날아오르더니 지면을 내리쳤다.

후드득.

허공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흙덩어리들.

올리브의 장난기에 아이들이 돌 맞은 개구리처럼 폴짝거렸다.

“야, 이 미친놈아!”

“캬캬캬. 꼬라지 봐라.”

어느 쪽이든 한 점 그늘 없이 즐거워 보였다.

보는 사람이 다 웃고 싶어질 만큼.

‘오빠랑은 달라.’

소외되지 않았다.

올리브뿐 아니라 C반 그 누구도.

그 광경을 고스란히 눈에 담은 에이프릴은 괜한 말을 꺼냈단 자책을 하며 느리게 돌아섰다.

* * *

한편 이안은 수업이 끝난 즉시 제1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였다.

도서관 끄트머리, 구석져 시야가 가려지는 곳.

“X발. 내가 똥개냐? 왜 자꾸 오라가라야?”

첫마디만으로 정체가 이렇듯 쉽사리 짐작되는 이가 또 있을까.

욕부터 박고 보는 이는 세작인 트란 카스티야였다.

카스티야는 쪼그려 있다가 이안을 보자 즉각 몸을 일으켰다.

올려다보기 싫다는 의사가 명백하게 보이는 행동이었다.

단순무식한 녀석에게 이안은 짙은 미소를 내보이며 느물거렸다.

“왜긴. 말 자알 듣는 똥개가 걱정돼서 불렀지. 잘 지내나 싶어서.”

“……X팔.”

“오. 같은 욕도 억양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군.”

“멀. 쩡. 한. 거, 봤으니 됐지? 나 간다.”

카스티야가 이를 으드득 갈며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똥개가 성질을 팍팍 내도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카스티야를 물끄러미 직시할 뿐.

‘솔직히 약속을 이 정도로 잘 지킬 줄은 몰랐는데.’

염탐하고 보고 하랬대도 그렇지.

결계 변형 때 전서구를 날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뿐이랴. 뭔 일만 있으면 자잘한 거라도 즉각 즉각 잘도 보고했다.

적어도 책임감은 있다는 뜻.

‘그러니 그에 부합하는 보상을 줘야겠지.’

걸맞은 일을 했으면 거기에 걸맞은 보상을 줘야 한다.

비록 레브로 인해 원한 관계는 얽혀있더라도 말이다.

이안의 지론이라 그는 코트 주머니에 있던 뭔가를 꺼냈다.

그런 뒤 노려보고 있는 카스티아야게 내밀었다.

“이건 보상, 임무를 잘 해냈으니까.”

“야 이 새끼야. 내가 따까리 노릇한다고 진짜로 네 따까리라도 된 줄…….”

“뭔지나 보고 화내.”

이안은 자신 있게 턱짓했다.

그의 자신감에 절로 카스티야의 시선이 이안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뷔트시겐의 문양이 새겨진 담녹색 패.

방계라면 어떤 누구라도 가지고 싶어하는 패.

그 패가 떡하니 이안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주인은 너, 빨리 가져가.’라는 듯 반질거리니 어떻겠는가.

줄곧 인상만 팍팍 쓰던 카스티야가 눈가를 갸름하게 좁혔다.

“……이거.”

“가문의 부단주급 이상만 가지는 패. 받아.”

“왜, 이거 처먹고 계속 따까리하라는 거냐?”

“그러면 좋고. 너, 의외로 따까리에 소질이 있거든.”

“씨ㅍ…….”

“욕은 집어넣으시고, 그런 김에 이것도 챙기시고. 나중에 이 에루리안을 나갔을 때,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때 사용해.”

“…….”

“그럼 뷔트시겐에서 도울 테니까.”

“……이딴 걸 왜 주고 지랄이야! 살리카인 나한테.”

굉장히 좋은 걸 받고서도 카스티야는 되레 화를 냈다.

일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걸 무척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고슴도치가 따로 없다.

놈의 까탈을 이안은 어깨 한번 들어 올리는 것으로 흘려넘겼다.

“목숨값이니 그만한 걸 내어줘야지 않겠어?”

“목숨값?”

“네 전서구 아니었으면 결계 변형에 더 늦게 대처했겠지. 너도 알다시피 저주까지 걸려 있어서 대응이 1초라도 늦었다면 아마.”

아마 C반 아이들 누구 하나는 ‘질식사’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런 참사를 막아내지 않았던가.

이안은 당연하다는 듯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대가.”

“…….”

“진작 주고 싶었는데, 이거 받느라 좀 늦었다.”

“아씨.”

“크크큿. 너도 이건 거절하기 힘들지? 이걸 보는 네 눈빛이 떨리는데?”

“이딴 거 필요 없어. 가지고 꺼져.”

“에헤이. 알았어, 알았어. 팔까지 떨고 있는 건 비밀로 할게.”

“사람 가지고 노니까 좋냐?”

“또, 말을 삐딱하게 한다. 무튼. 줄 건 줬고. 우리가 서로 얼굴 오래 볼 사이는 아니잖아? 그러니까 나 먼저 간다.”

“…….”

“아! 혹시 감격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도 내가 모른 척해줄게.”

“하. X발!”

얼굴을 와그작 구긴 카스티야가 패를 집어던지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필요 없다는 시위였다.

뭘 할지 알면서도 말리지 않고 이안은 느긋하게 돌아섰다.

그의 손을 떠난 패의 소유주는 카스티야였다.

버릴지, 사용할지 정하는 것은 놈의 몫이라는 거다.

점차 거리가 멀어져가는 중에도 뭔가가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버리기는 아깝겠지.

피식 웃은 이안은 느슨한 걸음으로 도서관 입구를 향해 걸었다.

홀로 남겨진 트란 카스티야.

그는 한껏 들어 올린 팔을 내리고선 꽉 쥔 손을 폈다.

담녹색 광석이 영롱함을 뽐내는 패.

“대가…….”

누군가가 지시한 일을 해주고 보상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목숨값.”

자신의 것을 지켜줬다고 인사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왠지 발뒤꿈치를 누가 문 것처럼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싱숭생숭해지는 감정을 자각하자 카스티야는 괜스레 짜증이 솟구쳤다.

“거만함이 하늘에 걸린 직계 따위가 주는 이딴 거.”

어쩐지 카스티야의 목소리에는 매가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패를 쓰게 만든, 이안이 지키려는 자들 말이다.

* * *

“이안 뷔트시겐.”

막 출구를 벗어나려던 이안의 걸음을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붙잡았다.

나긋하면서 힘 있는 음색.

상대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챈 이안은 눈가를 접으며 뒤돌아섰다.

상체는 인간의 형태인데 하체는 말의 형태인 드리아스.

이 도서관의 하나뿐인 사서였다.

보다시피 모습을 잘 안 드러내서, 학생은 물론 교수들조차 사서의 존재를 잊어버린 지 오래지만.

‘도서관에 사서가 있다고?’

오히려 당황해서 반문할 정도라면 말 다 하지 않았는가.

전설 같은 존재를 지난 생의 이안은 꽤 자주 만났더랬다.

“오랜만이군.”

“그러게. 요즘은 도서관에 네가 잘 오지 않으니.”

사서가 눈꺼풀을 끔벅이자 에메랄드빛 동공이 감춰졌다가 드러났다.

거기에 어린, 녹음 닮은 반가움.

그 감정은 에메랄드빛 머리칼과 입술에도 선연하게 녹아있었다.

물론 새하얀 얼굴에도.

사서의 새하얀 피부는 천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잘게 부서졌다.

아름답다, 아니다보다는 왠지 모르게 신비로운 분위기.

일개 도서관 사서라 칭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에겐 있었다.

역시나.

“뜸한 이유가, 네가 원하는 걸 찾았기 때문이니?”

웃는 낯으로 사서가 무언가 떠보는 물음을 던졌다.

뭘 알고 저러는 건지, 아니면 뭘 캐려고 그러는 건지.

언제나 의뭉스럽게 굴었던지라 이안은 유연하게 받아넘겼다.

“찾았지. 마력핵을 얻었으니까.”

“흐음. 핵이라……. 뭐 이안 네가 그렇게 얼버무린다면.”

“뭐 사서 네가 내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이안과 사서, 둘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남들이 보면 왜 저러나 싶은 전개였다.

하지만 둘은 자주 했던 놀이라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근데 예전처럼 자주 놀러 오면 안 돼? 나 심심해.”

“알았어. 근데 나도 억울한 게 여기 와서 널 몇 번이나 찾았어. 그때마다 안 보이던데.”

“아아. 힘이 약해져서 잠이 늘었어.”

“힘이? 숲의 정령이라 그라나토스의 정기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후훗. 그것에 대해선 비밀이야.”

“숙녀의 비밀은 묻지 않는 게 예의지. 더는 캐묻지 않을게.”

“후후훗. 이러지 말고 예전처럼 내 공간에 가서 얘기하자.”

사서가 제안에 대한 동의도 구하지 않고 녹색 발굽을 세게 굴렸다.

그녀에게서 생성된 에메랄드빛 마력이 일순간 이안을 감쌌다.

그러더니 그의 모습을 증발시켜버렸다.

사라진 육신이 도착한 곳은 도서관의 꼭대기였다.

그리 높지 않은 3층인데도 에루리안의 정경이 다 보이는 곳.

“여기도 여전하네.”

창가에 앉아 이안은 몇 달 사이 벌어진 일들을 사서에게 들려주었다.

케케묵은 먼지를 털어내듯이.

까발릴 수 없는 몇 가지만 빼곤 미주알고주알이었다.

그렇게 입에 단내나도록 떠든 몇 시간 후.

“흐음.”

사서는 도서관에서 멀어지는 이안을 시선으로 뒤쫓아갔다.

단숨에 커버린 아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잘 해내고 있네. 아무리 예언서를 얻었다 해도 쉽지 않을 텐데.”

그녀는 이안이 감춘 것을 손쉽게 들춰냈다.

숲의 정령이자 사서인 드리아스.

그녀의 존재는 이곳에 있는 무엇, 그러니까 ‘예언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책.

그 책이 온전하게 주인의 손으로 들어가야 했으니까.

사명을 끝낸 사서는 늘어지는 몸을 가누며 팔로 턱을 괴었다.

“네가 가는 길에 항상 여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그리하여 은색 달을 움켜쥔 최초의 독수리처럼 찬란한 영광을 거머쥐기를.

“빌어줄게. 몇십 년 만에 만난 나의 벗, 이안 뷔트시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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