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그날 저녁.
대연회장 안이 비슷한 설렘을 안고 술렁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교복이 없어 학생들의 복색이 자유로운 편인데.
“와우우.”
오늘은 유독 홀에 모인 이들의 옷차림이 화려했다.
온갖 멋을 낸 그들 틈.
“오올. 레기나 후보를 정식으로 발표하는 날. 아주 좋아.”
콧구멍이 호두알처럼 커진 올리브가 고양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애들이 엄청 예뻐 보인다. 흐흐흐흐. 안 그래?”
“올리브 저거 또 시작이다. 침 닦아줘라.”
“쟤는 무시해. 쪽팔린다. 없는 사람으로 쳐.”
“근데 올해는 레기나 후보가 멜러니 밖에 없지 않아?”
“아마도? 어떤 정신 나간 애가 멜러니랑 붙으려고 하겠냐?”
“그럼 보나마나겠네.”
아이들의 수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홀의 끝에 있는 단상에 누군가가 올라섰다.
빨간 머리 여학생.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홀을 둘러보았다.
우아한 동작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시선을 끌었다.
“안녕하세요, 1학년 여러분.”
“어? 작년 레기나다.”
“아까 중앙 아카데미에서 손님이 왔다고 하더니.”
“중앙에서 와서 그런가? 뭔가 결이 다르다.”
희귀한 동물을 보듯 하는 시선이 꽂혔지만, 여학생은 시종 여유로웠다.
저 눈빛의 의미를 알기에 그랬다.
레기나에 뽑혔지. 파라칸시스 시합에서 우승했지.
기여도 높은 10인에 뽑혀 그녀는 중앙 아카데미로 진출할 수 있었다.
저들에게 있어 그녀는 살아있는 표본인 셈.
여학생은 품격 있는 태도를 유지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를 다들 아실 겁니다. 레기나 후보를 소개하기 위함이지요.”
“어차피 후보는 멜러니 밖에 없지 않아?”
“흐음. 올해는 두 명이군요.”
“두 명? 멜러니 말고 누가 등록했단 거야?”
“워어, 대체 누가?”
아이들의 눈동자가 간 큰 인간을 찾느라 요리조리 굴러갔다.
혼란한 와중에도 여학생은 덤덤히 제 할 말을 했다.
“작년엔 스무 명이나 등록해서 소개에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
“군말을 덧댈 필요 있을까요. 자, 그럼 후보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여학생은 첫 번째 후보를 호명했다.
“멜러니 폰투스, 그녀를 박수로 맞이해주세요.”
그녀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하자 1학년 전부 그곳을 주시했다.
단상의 왼편에 놓인 나선형 계단.
분홍색 뮬리 로즈로 장식해 놓은 그곳의 꼭대기에 폰투스가 서 있었다.
옅은 미소를 담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폰투스.
그녀는 화려한 외양을 부각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 하나만으로 매력을 한껏 살렸기 때문일까.
장신구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그저 착용자를 도드라지게 하는 정도로만 있었을 뿐.
폰투스가 계단을 내려와선 단상을 한 바퀴 돌았다.
존재감을 각인시킨 후 그녀는 소개자의 오른편에 섰다.
그럼과 동시에였다.
2학년 여학생은 즉각 다음 후보를 입에 담았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네요. 에이프릴 슈튼하노버, 그녀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내주세요.”
“에이프릴? B반의 그 에이프릴?”
홀의 소란스러움을 조용히 가르며 에이프릴이 우아하게 등장했다.
그녀의 청순함을 돋보이게 하는 푸른색 드레스.
뒤가 일자로 길게 늘어진 드레스는 시선을 잡아채며 긴 여운을 남겼다.
두 후보가 같은 공간에 서자.
“후보 소개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여학생은 완급을 조절하며 다음 말을 내뱉었다.
“투표는 3일간 진행되니, 맘에 드는 레기나 후보에게 투표하세요.”
“…….”
“그럼 모두에게 즐거운 연회가 되길 바라며,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할 일을 마친 여학생은 쏜살같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으려는 단호함이 엿보였다.
살리카인 그녀가 폰투스 쪽으로 몸을 기울기만 해도 말이 나올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논란 자체를 사전에 잘라버리려는 행동이었다.
‘어차피 중앙 아카데미로 갔으니 개입을 안 하려는 거지.’
이안은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반면, 그를 제외한 아이들은 자유로운 연회의 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서로 마음에 드는 학생끼리 짝을 이루기도 하고.
레기나 후보에게 다가가 춤 신청을 하는 이들도 있고.
평소 호감 가졌던 상대에게 먼저 대화를 걸기도 하고.
너나 할 거 없이 웃고 떠들며 왁자지껄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밤늦도록 연회는 유리알처럼 매끄럽게 잘도 굴러갔다.
‘물론 이런 순간에도 예외는 있지.’
남들이 다 ‘그렇다.’라고 할 때 혼자 ‘아니오.’를 외칠 폰투스 말이다.
이안은 폰투스의 화사한 미소에 걸린 짜증과 분노를 쉬이 읽어냈다.
아마도 단독 후보가 아니라 그럴 것이다.
거기다 상대 후보가 자신이 경계했었던 에이프릴이라 더욱 언짢을 것이고.
‘제대로 엿을 먹였군.’
얼추 돌아가는 상황도 확인했겠다.
더는 연회장에 죽치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이안은 슬그머니 테라스로 나갔다.
그를 가장 먼저 반기는 건 하늘이었다.
눈발이 거세진 흐린 날씨에도 희한하게 선명한 밤하늘.
이안은 눈이 쌓인 난간에 팔을 걸친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많네.”
결말에 이른 심상을 돋우려는 걸까?
밀알처럼 흩어진 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짓누르는 것 같다.
해서 헛숨을 들이키고 있는데, 그 숨을 헤집기라도 하듯이 조용하게 드레스 스치는 소리가 났다.
테라스 입구로 누군가가 들어온 것이다.
* * *
“이안님.”
딱 한 번의 부름.
이만으로 존재를 각인시키는 이는 드물 것이다.
이안은 고개를 내려트려 정면을 직시했다.
“멜러니 폰투스.”
“이제 보니 알겠어요.”
“…….”
“아무 말 없는 걸 보니, 제 얘기가 궁금하지 않나 보네요. 후훗.”
폰투스는 재미있다는 듯 옅은 웃음을 내보였다.
고혹적인 자태와는 어울리지 않게 얄궂은 모습이었다.
“언제나 그러셨지요.”
“…….”
“거기다 ‘멜러니 폰투스’, 이안님은 언제나 절 그렇게 딱딱하게 불렀고요.”
“격식을 갖출 필요가 있었으니까.”
“격식……. 제가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네요.”
“그대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도 정반대였지.”
“아, 혹시 C반 버러지들을 말하는 건가요?”
그간 내숭을 떨던 폰투스가 드러낸 발톱.
이안은 늦추고 싶었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식인 꽃의 독니를 어떻게든 파라칸시스 시합 전까진 피하고 싶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
어쩔 수 없긴 했다.
에이프릴을 끌어들인 그 순간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
폰투스의 계획을 훼방 놓은 셈이니까.
최악이었지만, 예상한 범위라면 최악이 아닌 게 된다.
이안은 난간에 팔을 걸친 자세 그대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지적해봐야 쓸모없는 일에 낭비하긴 싫은데. 폰투스, 내 앞에서는 입조심 해야 할 거야.”
“이게 이안님의 본심이겠죠.”
“버러지니, 뭐니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이안의 한쪽 입귀가 위로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이 일더니, 폰투스에게로 쇄도했다.
무자비한 바람은 검날이 되어 폰투스의 심장을 겨눴다.
기꺼이 드러낸 살기.
단순 위협용이 아니라서 폰투스의 산호색 동공이 요동쳤다.
두려움이 그득 넘쳐도 그녀는 결단코 주저앉지 않았다.
“내가 참지 않을 테니까.”
“조심…… 해야겠네요. 이런 천박한 곳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
“알아들었다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날 찾아온 용건은?”
“별거 없어요.”
“별거 없다, 라. 그대가 지금껏 상대한 머저리들은 그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겠지. 그대의 미소에, 외양에 넘어가.”
“…….”
“하나 난 아니니, 솔직해지는 게 나을 텐데.”
“정말로 별거 아니라면요?”
“폰투스 그대가 생각 없이 움직인다? 그야말로 질 나쁜 농담이군.”
“어쩐지 기쁘네요. 이안님의 말은 저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나 다름없으니까요.”
두려움을 갈무리한 폰투스가 눈꼬리를 접었다.
아쉬움과 후회가 범벅된 눈웃음.
‘무엇에?’란 의문에 답하는 것처럼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그렇기에 더욱 안타깝네요. 이안님을 유약하고 어리숙한 직계라고 여긴 제 판단이.”
“쉬운 먹잇감이라 여겼겠지. 그대의 껍데기에 홀리는 병신들처럼.”
“후훗. 그러게요. 제가 이안님을 과소평가했네요. 병신들 따위와 같은 선상에 놓아선 안 됐는데…….”
폰투스는 반 묶음 된 머리카락 끝을 문질렀다.
이번 역시 후회와 속 시원함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지금 와서 보니 이안님을 상대할 땐, 전력을 다 했어야했어요. 그랬다면 아군이 되었을지도.”
“그랬다면, 그대를 조금 더 존중했겠지. 물론 아군은 못 됐겠지만.”
“여지없이 희망을 박살내네요.”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지 않아서. 달콤한 거짓으로 눈속임하는 것은.”
“그런 것에 속아 넘어갈 단계는 지났죠.”
“그래서 용건은?”
“……미련을 정리하기 위해선 이안님을 뵈어야 했어요. 적을 아군이라며, 절 속이는 짓은 그만할까 해서요.”
폰투스는 여과 없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목적을 위해 필요한 이안 뷔트시겐이란 도구.
아주 적당한 도구가 도리어 자신을 상하게 한다?
도구를 손에 쥐었을 때의 결과가 달콤해서 미련을 두었을지언정, 그 미련이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폰투스에게 있어 폰투스 자신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기만하다간 놓칠 것 같아서요. 이 하찮은 에루리안에서 이룬 명성이라도. 제겐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그댈 내친 폰투스 가로 돌아가기 위해?”
“예. 제가 원하는 것을 움켜쥐기 위해서요.”
“나 또한 마찬가지지. 내 모든 행동은 내 것을 지키기 위함이지.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하니까.”
“합의할 수 없는 평행선이라는 거네요.”
“그대의 목적과 내 목적이 충돌하니 별수 있나.”
“같은 A반이라면 달랐을 텐데…….”
폰투스는 아쉬워했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그가 멜러니 폰투스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이유는 따로 있으니까.
말을 아낀 이안은 물끄러미 폰투스를 쳐다보았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그녀에게서 어떤 모습이 겹쳐졌다.
불의 채찍을 휘둘러 어린 뷔트시겐을 난자하던 괴물의 모습이.
<뒈져! 뒈져버리라곳! 지긋지긋한 뷔트시겐 버러지들!>
폰투스를 막을 수 없었던 나약한 머저리에 등신.
지난 생의 자신을 잊을 수 없어서 폰투스를 증오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현재의 그가 과거를 잊는다면 또 모를까, 폰투스와의 공존은 ‘절대 불가’였다.
시선과 침묵을 불편하지 않게 넘긴 폰투스가 입을 벙긋거렸다.
“후회든 무엇이든, 곱씹기만 해선 나아갈 수 없죠.”
“나아가기 위해선 그것마저 씹어 삼켜야지. 내장을 녹이는 맹독일지라도.”
“이번만은 이안님과 통했네요.”
“나와 그대가 비슷한 구석이 좀 많아. 그댄 모르겠지만.”
“후훗. 정말 아쉽지만 나아가기 위해 당분간 에루리안을 떠날까 합니다.”
“당분간……. 에르그 승급 시험을 보려는 건가?”
“예. 제가 돌아오는 그때쯤엔 이미 레기나가 정해져 있겠네요. 이안님이 바라는 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 그대 것을 다 뺏진 못했으니.”
“욕심도 많으셔라. 제겐 남은 것이 별로 없는데.”
너스레를 떤 폰투스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
작별인사였다.
미련을 끊어낸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테라스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