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아쉽게 됐네.”
폰투스가 떠난 뒤에도 이안은 혼자가 아니었다.
다들 은신과 기습을 기본으로 익힌 건지, 어쩐 건지.
어스름하게 등장해 말을 거는 건 레브였다.
“불우이웃을 도우려고?”
“불우이웃?”
“춤 신청이 쏟아지는 인기인이 쓸쓸한 이곳까지 행차하셔서 말이야.”
이안은 난간에 등을 기댄 채로 허리를 뒤로 젖혔다.
지척에 있다 느낀 하늘이 더 가까워지자 별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짓눌릴 것 같은 중력에 이안은 숨을 들이켰다.
“왜 왔어?”
“왜 오긴. 폰투스가 움직이니까 따라왔지.”
“식인 꽃과 대화한 걸 알면서 뭐가 아쉽게 됐다는 건데?”
“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폰투스 각성? 그걸 늦추고 싶었던 거 아냐?”
“아. 그건 그렇지. 파라칸시스 시합을 손쉽게 이기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아쉽게 됐다는 거야.”
레브가 이안의 곁으로 다가와 그와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짙은 바다색 동공에 비치는 또 다른 별의 바다.
녀석의 눈에 비치는 하늘은 그가 보는 하늘과는 달라 보였다.
“각성을 늦추려고 싫어하는 걸 감추고 기껏 잘해 준 건데. 아냐?”
“그런 사탕발림에 무한정 넘어갈 여자가 아니지. 이만으로도 충분해.”
학기 종료 전까지 한 달 남짓 남았다.
이 시점까지 폰투스를 원하는 대로 끌고 온 것만으로 차고 넘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안에게 레브가 다시금 의중을 물어왔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지?”
“계획은 변수 따라 바뀌는 거니까.”
“그렇긴 한데, 레기나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었던 거 아냐?”
“본래는 그랬지. 레기나는 놔두고 파라칸시스 우승만 뺏을 작정이었으니까.”
“그러니 굳이 폰투스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던 거고.”
“뭐.”
“그랬던 생각이 바뀐 게, 폰투스가 결계를 변형한 거 때문이지? 애들이 죽을 뻔했으니까.”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곱절로. 폰투스가 원하는 건 전부 뺏어서.”
이안은 서늘하게 즉답했다.
설령 폰투스가 날뛰어도 지난 생과는 결과가 다를 것이다.
예전 파라칸시스 시합은 한 마디로 ‘참혹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A와 B반의 연합에 짓뭉개진 C반.
녀석들 가운데 스무 명 남짓이 반신불수가 되고 두 명이 죽었다.
팔다리 어느 한군데 뜯겨나가 성치 못한 아이들이 다수였고.
‘이번엔 그리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터.’
이안은 다리 한쪽을 움직여 레브의 왼쪽 다리를 툭툭 쳤다.
“괜한 걱정하지 마라. 폰투스가 무슨 짓을 하든 애들 실력이 많이 늘었으니.”
“애들 실력이 는 거는 는 거고. 네가 걱정돼서 그런다.”
“나?”
“그래, 이안 너. 불면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잖아. 계획에 자그마한 변수만 생겨도 예민해져선.”
“아닌데. 나만큼 유유자적인 사람이 또 어딨다고.”
“또 헛소리하며 말을 흐린다. 그딴 능청은 이제 나한테 안 통하거든.”
“얘가 점점 거칠어지다 못해 뒷골목 왈패가 되어가네.”
“다 네 탓이거든?”
“아이고. 그래, 내 탓이다. 내 탓이야. 이 형님이 널 잘못 가르쳤다.”
“지랄.”
레브가 있는 힘껏 이안을 째려보았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인다, 가 뭔지 실감 날 만큼 거친 눈초리였다.
매섭다 못해 한기 어린 눈빛에도 이안은 히죽거렸다.
“형님을 생각하는 아우의 마음이 지극하니 기분이 좋구먼.”
“괜한 주접떨지 말고. 그간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이참에 물어볼게.”
“뭔데? 이 형님이 다 알려주마.”
“너 말이야. 네가 폰투스를 적대할 이유가 없거든. 의외로 폰투스는 네 구미에 맞는 유형이니까.”
“와. 어마어마한 욕을 처먹었더니 정신이 멍멍해지네.”
“네가 뭘 판단하는 기준은 딱 하나야. ‘내 것을 지킬 수 있냐, 아니냐.’ 거기에 선악은 존재하지 않잖아.”
“그래서 폰투스가 구미에 맞다?”
“어. 만약 폰투스가 네 것을 건들지 않았다면 이대로 공존했을걸. 아니야?”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런 네가 왜 처음부터 폰투스를 적대했을까, 이건 여전히 의문이란 말이야.”
“참 복잡하게 산다. 말했을 텐데. 식인 꽃이라 싫다고.”
“다른 이유는 없고?”
“식인 꽃이라 싫다는데 왜 싫냐 묻는다면 식인 꽃이라서…….”
“알았다, 알았어. 대답하기 싫으면 그만해. 나도 답을 들은 거란 생각은 안 했으니까.”
레브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만하잔 항복의 신호에 이안은 다시금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반절의 진실만을 말했을 뿐이지.
진심으로, 그는 폰투스가 식인 꽃이라서 싫었다.
불꽃의 마녀.
뷔트시겐에서 폰투스를 부르는 악칭이었다.
사람을 채찍으로 찢고 난도질한 뒤에는 반드시 한데 모아 불태웠으니까.
그게 시체든, 아직 숨이 붙어 헐떡이는 자든.
비명과 살려달란 애원, 시체가 타는 냄새와 그것들을 태우는 불길.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이글거리면 마치 거대한 꽃 같았다.
생을 태우는 모양새가 그러했더랬다.
‘그래서 식인 꽃이지. 사람을 잡아먹으니까.’
* * *
A반 기숙사 글록시아관의 소 연무장.
폰투스는 드레스를 벗고 연무복의 소맷자락을 정돈했다.
레기나는 텄다.
이안이 손을 댄 순간부터 정해진 결말이었다.
굳건하게 충성한다고 믿었던 친위대마저 흔들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레기나는 포기해야 한다.
물론 파라칸시스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를 내줬다고 남은 하나마저 내줄 순 없는 노릇.
“오랜만에 대련을 시작해볼까?”
폰투스의 손에는 불의 채찍이, 그녀의 앙 옆에는 인간 남자 형태의 불의 정령이 서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사각의 단상 위에 폰투스의 친위대가 서열 순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녀의 첫 대련 상대가 첫 번째 줄의 친위대인 건 당연지사.
멀끔한 인상의 친위대는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솜씨지만 최선을 다할게.”
친위대와 그의 정령들은 불의 창을 꼬나 쥐었다.
그러고는 사선으로 힘껏 내던지며 폰투스에게 달려들었다.
대련의 신호탄인 셈.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렇게 열 명의 친위대.
“허어억. 허억.”
그들과 대련을 마친 폰투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땀에 흠뻑 젖은 연무복이 천근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척척하게 젖은 머리카락 또한 엉클어져 주체가 되지를 않았다.
“후우.”
폰투스는 얼굴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렇대도 꾸며서 멋을 내던 때와는 다르게 상당히 추레했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보던 친위대는 도리어 눈을 반짝거렸다.
최선을 다하는 폰투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으니까.
“수고했어.”
“최선을 다해줘서 고마워.”
생긋 웃은 폰투스는 친위대에게 수건을 건넸다.
감격에 젖은 친위대.
그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친 폰투스가 나긋하게 말했다.
“내가 오롯하게 믿는 건 너희들이야. 날 배신하지 않을 너희들.”
“뭐든 분부할 일이 있으면 명령을 내려줘.”
“별거 없어. 내가 에루리안을 비우는 동안 조용히 있어.”
“C반, 아니, 이안을 건들지 말란 거지?”
“응. 괜히 뷔트시겐을 거슬러 전력을 낭비할 필욘 없으니까.”
“알았어.”
고분고분한 친위대로 인해 폰투스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이 정도면 편히 집을 비워도 될 것 같았다.
이들의 흔들림을 다시 잡아놨으니 말이다.
안심한 폰투스는 에르그 승급 시험을 치르기 위해 주저 없이 에루리안을 떠났다.
* * *
레기나 투표일까지 총 3일.
이 기간에 후보는 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한다.
에루리안 청소, 토론하고 논문 쓰기, 정령 보살피기 등등.
일종의 선거유세를 하면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 다과회.
에이프릴은 학생회의 임원들과 함께 정원의 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입만 털며 탐색하는 분위기라도 명색이 다과회일진데.
그런데 아무도 예술 작품에 가까운 디저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잿밥에 관심이 많아서였다.
“이안이랑은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야?”
“얼마나 친해?”
“부탁하면 막 들어주고 그러는 사이?”
“그럼 에이프릴 너, 뷔트시겐에는 가봤어? 가주님이 사는 본가 말이야.”
질문인지, 수다인지 빽빽해서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옅은 미소를 내보인 에이프릴은 여유롭게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뭐가 됐든…… 얘네들부터 휘어잡는 게 우선이겠지.’
호랑이 없는 굴에는 여우가 왕이라고 했다.
폰투스가 떠난 에루리안에선 학생회의 여학생들이 실권자였다.
하여 이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얘들을 잡으면 다른 아이들의 표는 자연히 따라올 테니까.’
계획대로만 되면 문제없겠지만…….
이게 또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왜냐면 학생회의 여학생들은 아쉬울 게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없다는 얘기기도 했다.
원하는 게 없는 이들만큼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가 또 있을까.
도저히 저들을 구워삶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이안이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대체 무엇으로?
몹시 당당한 이안에게 의구심을 가득 담아 질문을 던졌더니 글쎄.
<나란 존재만으로 도움이 될 거야. 이안 뷔트시겐, 그것만으로.>
이런 뻔뻔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에이프릴은 그것이 속 빈 강정마냥 허세 부리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뷔트시겐 일족.
확고부동한 히에로스 제국의 권력 집단.
거기의 끄트머리에라도 편승 되고 싶은 자들은 넘쳐난다.
아마 줄 세우면 제국의 국경선을 다 채울 수 있을지도.
실제로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이곳의 아이들만 봐도 알만했다.
여학생들이 기대와 질투를 숨기며 에이프릴을 채근했다.
“에이프릴, 대답 좀 해봐.”
“으응?”
“이안 말이야. 많이 친해?”
“아, 그 질문엔 답하기가 좀 모호하네.”
“뭐가 모호한데?”
“이안이랑 친하기보다 레브 때문에 알게 된 거라 아직은 좀.”
에이프릴은 준비된 답변을 늘어놓았다.
이안과의 친분은 여지를 두되, 살짝 거리를 두기.
이 전략은 이안의 머리에서 나온 거였다.
명성을 빌리는 건 좋지만 지나치게 가깝단 인상은 소외감을 조성할 수 있댔다.
그냥 레브 때문에 뷔트시겐에 한 다리 걸친 정도?
딱 그 정도 거리가 아이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적당한 선이라고 했다.
이안의 말대로 흘러가는 분위기 속.
에이프릴은 산뜻하게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래도 친구의 친구라고 이안이 꽤 신경을 써주긴 하더라.”
“그래?”
“실은 이 디저트도 내가 다과회를 연다니까 이안이 준비해 준 거야.”
“뭐? 이 디저트를?”
놀란 여학생들은 관심도 두지 않던 디저트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더니 저마다 하나씩 쥐고 입에 넣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내일이면 이안이 준 걸 먹었다고 소문이 퍼질 것이다.
“어쩐지 디저트가 고급스럽더라.”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이게 본가 사람들이 먹는 건가?”
우습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연민이 들기도 하는 대화들.
양가의 감정 사이에서 에이프릴은 씁쓸함을 차 안에 녹여 삼켰다.
방계가 살아가는 방식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며 권력에 아예 관심이 없다면 모를까.
방계의 권력이라는 건 결국 직계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차등이 심했다.
이 속성이, 이안이 가진 계획의 핵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