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78화 (78/214)

제78화

‘어쩐지…… 소름 끼치네.’

아이들의 태도가 아니라,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안 때문이었다.

권력의 민낯을 처절하게 알고 있는 느낌이랄까.

굴곡 없는 생을 사는 귀족가 도련님이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시선.

저 밑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무엇.

설명할 수 없는 처절한 날카로움을 이안은 가지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니까.’

보통 가까워지는 만큼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안은 그 반대였다.

어떤 정보를 얻게 될 때마다 오히려 ‘물음표’가 따라붙게 된다.

뭐지?

어떻게 그런 시선과 통찰을?

능숙하게 감추고 있다고 하나 밑바닥에 깔린 인간 불신은 또 뭐고?

도무지 이안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후우.’

생각의 꼬리를 이어가던 에이프릴은 들숨을 쉬었다.

연달아 가슴팍을 들썩이며 상념들을 작은 입김에 섞어 몰아냈다.

이 이상 이안에 대해 생각하다간 다과회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해서 그녀는 마지막 숨을 크게 쉬곤, 본래 목적을 상기하며 상냥하게 입을 뗐다.

“우리 이렇게 자주 만나자.”

“자주? 나야 좋지.”

“솔직히 말하면 멜러니랑 있을 때보다 더 편하다. 너희들도 그렇지?”

“당연하지. 멜러니도 뷔트시겐에서 주는 디저트는 못 구하잖아.”

말로 내뱉는 순간 어떤 우쭐거림이 생겨난 모양이다.

여학생들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면서도 실룩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거짓된 유대.

그러나 이로써 한 집단이 나눌 수 있는 공통의 무언가가 생겨났다.

이는 투표로 이어지겠지.

물론 계획이 순탄하게 진행된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멜러니가 없다고 그 표가 모두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니까.’

끝까지 잘 해내고 싶었다.

도움을 받은 만큼 이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에이프릴은 마음을 다잡으며 금색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 * *

그렇게 분주한 사흘이 지난 뒤.

에이프릴은 보라색 브로치를 손안에 쥐고 문질렀다.

<에이프릴, 축하한다.>

<오올, 레기나. 에루리안에서 제일가는 미인.>

<도와줘서 고맙다, 에이프릴.>

그녀는 이안의 계획대로 레기나가 되었다.

그 증표가 에루리안의 종탑 모양인 이 브로치였다.

“……묘하다.”

에이프릴은 어쩐지 심장이 두근대서 브로치를 꽉 쥐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레기나가 되어도 별 감흥이 없을 줄 알았다.

애초 멜러니처럼 레기나를 목표로 삼았던 게 아니었으니까.

더 솔직해지자면 아예 관심이 없었다.

레기나는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일이 묘하게 돌아가며 여기까지 왔다.

사실 그녀는 멜러니의 본심을 알게 됐을 때 잊어버리는 쪽을 택하려 했다.

해독으로 목숨을 구했으면 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런데…….

<네 목숨을 남이 휘두르게 하지 마.>

이안의 그 말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걷잡을 수 없이…….

그렇게 그녀를 집어삼키는 해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에이프릴은 깨닫고 말았다.

쥐 죽은 듯 있다고 오빠처럼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걸.

그래서 독하게 마음을 먹고 레기나 선발에 참여했다.

“이안이 날 택한 건, 나라면 멜러니를 견제할 패가 될 거라 여긴 거니까.”

쓰임에 쓰임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단순한 이용이 아닌 호의가 녹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결국…… 해냈네.”

브로치를 보는 에이프릴의 동공이 사르라니 떨려 왔다.

왠지 모를 뿌듯함과 성취감이 들었다.

비록 혼자서 해낸 건 아닐지라도 뭔가를 제힘으로 일군 것 같았으니까.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오빠의 죽음으로 잊고 있었던 열정과 의욕이 자글자글 타올랐다.

이건 선연한 증거였다.

그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이는…… 얼마든지 꿈을 꾸어도 된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 * *

레기나 투표가 끝난 그 날 저녁.

레브는 접시에 그득 담긴 스타필리를 집어 먹었다.

이안의 방에만 오면 스타필리 같은 그라나토스의 싱싱한 과실들이 많아, 입이 즐거웠다.

“이제 한숨 돌려도 되겠다.”

“그렇지.”

“계획대로 폰투스를 잘 견제했으니까.”

“아무래도.”

어째 이안의 반응이 평소보다 더 무덤덤했다.

아마도 일이 마무리되어서 그럴 것이다.

본디 이안의 성향이 그랬다.

결과가 나와버린 일은 절대 곱씹지도, 미련을 두지도 않는다.

이미 레기나 건은 털어버렸으니 말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이번만은 온전히 성향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레브는 눈썹 머리가 내려간 이안의 표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썹이 내려간 각도가 거의 직선인 걸 보니 뭔갈 꽤나 신경 쓰는 모양이다.

그게 뭘까 싶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려고 했더니만.

“레기나는 예상대로 끝났으니까 그만 신경 쓰고.”

대화의 주제를 싹둑 잘라버린 이안이 레브 쪽으로 팔을 뻗었다.

이안의 검지 손끝이 톡톡 두드린 무엇.

그건 레브의 오른 손목에 걸린 팔찌, 정확히는 꽃잎 부분의 정령 보관석이었다.

“지금 어때?”

“뭐가?”

“수련 말이야.”

“아, 난 또 뭐라고.”

레브는 괜스레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너도 알겠지만 가주님과 얘기한 후로 진척이 상당해. 이제 마력을 과다하게 사용하는 건 많이 줄었어.”

“감을 잡은 건 알고 있어. 노상 붙어 있으니.”

“응? 그럼?”

“내가 말한 건 지배력에 관한 거야.”

“…….”

“너 요즘 정령 보관석을 보며 자꾸 한숨을 쉬던데.”

“……하여튼 눈치 빠른 새끼.”

“눈치만 챙기면 수도원서도 고기를 얻어먹는다는 말, 몰라?”

“모르거든.”

“괜히 말 돌리지 말고 얼른 불어. 대체 무슨 고민이 있는지.”

이안은 물렁하게 굴지 않고 압박을 가했다.

이렇게 해야 녀석이 조금이라도 속내를 끄집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다 저놈이 가진 못된 버릇 탓이다.

무슨 쌈짓돈도 아니고 속에 든 것을 꽁꽁 싸매두기만 한다.

푹푹 썩어가게.

“얼른.”

“……너한테 숨겨서 뭐하겠냐. 후우. 이안, 너도 알지? 페르나에 걸리면서 내 첫 정령이…… 소멸한 거.”

“알고 있지.”

첫 정령을 지키지 못했던 무력감과 절망이 원인이었을까.

레브는 지난 생에서 정령을 고작 둘만 데리고 다녔었다.

물의 정령과 빛의 정령.

녀석이 가진 자질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정령의 수.

이는 레브의 상처가 아물지 못할 정도로 깊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키지 못해서……. 소멸한 정령한테 미안해서, 다시 정령과 결속한다는 게 망설여졌었는데…….”

“…….”

“그런 마음을 품었던 게 우스울 정도로 정령이 있으니까 좋더라.”

“단순히 전투를 위한, 그것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니까.”

“응. 좋아서, 정령의 기술을 매일 분석하고 연구하며 조합을 했더니…… 열흘 전에 지배력이 다 찼다.”

“근데?”

“결속을 망설였다고 실컷 밑밥 깔고 이런 얘기 하기 민망한데…….”

“사설이 길다.”

“특수 기술이 개방이 안 돼.”

“안 된다고? 지배력이 만숙이 됐는데?”

“어. 그래서 이것저것 정령학과 관련한 논문도 찾아봤거든. 근데도 원인을 모르겠더라.”

“흠. 그렇다면 교감력은 어때? 지배력이 다 차도 그게 낮으면 소용없잖아.”

“교감력도 한 달 전에 만숙을 찍었지.”

“교감력에 비해 지배력이 늦게 차긴 했네.”

이안은 책상에 올려진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전쟁터에선 왕왕 레브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더랬다.

지배력 수치와 교감력 수치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이는 마력 고갈이 올 정도로 끊임없이 싸우다 보니, 정령의 불만이 쌓인 게 대부분이었다.

이에 빗대보기엔 레브는 전혀 경우가 달랐다.

녀석의 정령은 레브를 무척 좋아했으니까.

“흐음. 아무래도 강제로 뚫어야겠는데?”

“강제로?”

“응. 원인을 모르니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면 마력 회로가 꼬여서…….”

“그 문제라면 해결할 수 있어. 포루솔의 ‘여름의 태양’으로.”

“아, 그 단약이라면.”

“회로가 꼬이지 않게 않게 해주지. 지배력을 강제로 뚫으면서도.”

“근데 그 단약은 여름에만 나잖아. 지금은 겨울이라 절대 구할 수가 없는데.”

“그게 또 문젠데…….”

이안은 눈썹머리를 내려트리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방도가 있을 것 같았다.

태고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이 그라나토스라면.

“분명 해결책이 있을 듯…….”

[응. 그라나토스에 해답이 있다.]

골몰하고 있는 이안에게 녹스가 단정을 들이밀었다.

-어?

[이안 너, 어딜 가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고민하고 있던 거 아냐?]

-하여튼 귀신 같다니까.

[긴말 필요 없고. 조금만 기다리면 다 해결된다.]

뭐 저리 자신감이 충만한지.

[대신 겨울이라 ‘반달’이 뜨는 날에 가야만 단약을 구할 수 있다.]

-반달?

녹스가 호언장담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더는 묻지 않고 이안은 밤하늘부터 확인했다.

애석하게도 초승달이었다.

“하필…….”

* * *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끝은 나기 마련이다.

드물게 수다를 떨던 레브는 쉬어야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말소리가 사그라든 이안의 방.

[참 희한하단 말이지. 눈빛이 복잡한 것치곤 저 아이를 몹시 챙기니 말이다.]

일순간의 정적을 몰아내려는 것처럼 녹스가 말문을 열었다.

“또 그 얘기야?”

[사실인 걸 어쩌누.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이번 일?”

[네가 레기나 후보로 슈튼하노버를 택한 게 레브 때문이지 않누.]

녹스가 단정 지으며 말했다.

확고한 말투와 확신하는 태도, 이 때문일까.

창틀에 앉아 은색 달빛을 쬐는 녀석의 모습이 흡사 현자처럼 보였다.

이안의 머릿속을 모조리 꿰뚫고 있는 듯한 기색.

[그 여자애가 슈튼하노버 가의 유일한 후계자니까.]

“맞아. 슈튼하노버인 게 중요했지.”

혜안이 어린 녹스의 눈빛에 이안은 입매를 위로 당겼다.

슈튼하노버, 본디 보잘것없는 방계였다.

땅의 지형이 여우 모양인 아르데슈의 귀에 붙은.

있는지도 몰랐던 가문이 급부상한 것은 10년 전이었다.

정확히는 현 가주로 인해 아르데슈 가가 쇠락하면서부터였다.

루하흐 서부 지역의 패권자.

현 가주의 철저한 관리 아래 루하흐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가문.

이에 대해 익히 아는 녹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슈튼하노버가 패자여서 그런 건 알겠다만. 그것들은 현 가주의 개 아니냐?]

“겉보기엔.”

[오호. 비사가 있다?]

“좀 쫀득한?”

썰 좀 풀어 보자면 7년 전, 현 가주는 전대 가주를 치면서 일족 전체를 물갈이했다.

전대 가주의 친파였던 자들을 모조리 잘라내 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아르데슈 가였다.

최대 항구 도시란 지리적 이점.

루하흐의 안정을 지탱하는 한 축인 막강한 부.

아르데슈 가가 쥐고 있던 이 이점들은 현 가주에게 있어 불안 요소였다.

그들을 바탕으로 친파가 뭉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가주는 서부 지역의 이권을 슈튼하노버에게 강제로 이관시켜 버렸다.

“현 가주가 주무르기 쉬운 표적을 고른 거지. 한미함의 끝인 그들이라면 개처럼 말을 잘 들을 거라 여겨서.”

[한데?]

“그건 가주의 대단한 착오였지. 아르데슈만큼 슈튼하노버 역시 전대 가주의 골수분자였으니까.”

[오. 현 가주는 그걸 모르고?]

“철저하게 감췄으니까.”

[쯔읏. 살아가려면 뭐.]

“것보단. 추방돼버린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등잔 밑이 어둡다 하지 않던가.

슈튼하노버를 필두로 결집하고 있는 전대 가주의 세력.

그들은 가주가 독살당한 이후, 현 루하흐 가주를 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그 규모가 꽤 커진 상태이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웅크린 채 기회를 노리는 이 세력이 훗날 레브의 훌륭한 발판이 돼줄 것이다.

레브가 루하흐에 입성할 때가 오면.

이안은 뻗어가는 생각의 타래를 끊고 녹스를 마주 보았다.

“어차피 레브의 정체는 언젠가 드러날 수밖에 없어. 그러니 미리미리 준비해 놔야지. 죽지 않으려면.”

[네놈 말처럼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려면?]

“어. 남의 손에 내 목숨을 맡기는 것만큼 엿 같고 X 같은 일은 없으니까.”

그건 무척이나 기분이 더럽고 치가 떨리는 일이다.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 신세.

어느 때건 이런 신세는 참 뭣 같지만, 특히나 적진 속이라면…….

‘진짜 그때엔.’

이안은 그때의 심상이 되살아난 듯 입가를 비틀었다.

그러고는 아득히 먼 어느 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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