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79화 (79/214)

제79화

살리카의 중심 도시에 있던 연구소를 급습했던 어느 날.

폭발로 연구소 주변은 구덩이가 패고, 그 여파로 건물들이 폭삭 주저앉았다.

귓가를 멍멍하게 하는 폭발음과 하늘을 뒤덮은 잿빛 가루.

음울한 장송곡처럼 희뿌연 시야 속, 들리는 거라곤 절규뿐이었다.

끄억. 끄어억.

사람이 내는 소리인지, 짐승이 우는 소리인지.

모호한 경계는 이 전투의 승패를 가늠키 어렵게 했다.

“당장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도련님.”

“아직 칼브란이 오지 않았다.”

“추적자들이 코앞까지 왔습니다. 겨우 막고 있으나 시간을 얼마 벌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 도련님까지 잡히시면…….”

한시라도 지체하면 안 된다며 알란이 억지로 이안을 떠밀던 때였다.

“미망의 안개.”

나직하게 뇌까리는 듯한 음색이 스멀스멀 퍼지더니.

데구루루.

이안의 발치로 피에 절은 몸뚱어리 한 구가 굴러들어왔다.

“……!!”

“수호검님!”

놀란 알란이 거무죽죽한 칼브란을 붙잡고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숨소리.

그제야 안도의 숨을 토해낸 알란은 굳어버린 이안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살아있습니다.’라는 신호에 잘게 들썩이던 이안의 목울대.

그 파리한 목울대가 숨을 토해내긴 아직 이르다고 압박하는 듯.

저벅.

잿가루를 가르며 붉은 발자국이 이안에게로 다가왔다.

“예언자 너였어? 살리카한테 엿을 먹인 게?”

“레브…… 아르데슈?”

“크하하하핫. 재밌는 새끼였네. 이런 놈인 걸 에루리안에 다닐 땐 왜 몰랐지?”

“…….”

“내가 말이야. 예언자님 덕분에 아주 생똥을 싸고 있어요. 너덜거리는 연구원들을 살려내느라.”

“…….”

“왜 말이 없으실까? 내가 널 찾아내서 놀랐나 봐?”

놀랐다.

은신 술식이 걸려있는데 그걸 찾아내서 놀랐고.

칼브란을 죽이지 않고 데려와서 더 놀랐고.

마지막으론 적이 포진해 있는 곳에 혈혈단신으로 왔는데, 그게 위협적이란 사실에 가장 놀랐다.

“별로.”

그의 무감한 표정이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화상이 있는 볼을 실룩거린 레브가 칼브란을 사납게 훑었다.

“내가 살렸어. 알아? X발. 내가 살려서 데리고 왔다니까? 뷔트시겐의 수호검을?”

“그래서……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해달라면 해 줄 건가? 하긴. 해야겠다. 네 목숨도 나한테 달렸으니.”

그 말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레브의 주위로 푸르게 번져가던 안개가 옅어졌다.

그러자 여태껏 조용하던 공간에 균열이라도 온 듯 기척이 덧입혀졌다.

코앞에 있는, 살리카 가주의 직속 정령 기사들.

“찾아내라, 반드시!”

“뷔트시겐 망할 늑대 새끼들을 찢어 죽여야 한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특히, 수호검 나부랭이와 예언자라고 지껄이는 반푼이 새끼는.”

“…….”

정령 기사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코앞에서 이안을 지나쳤다.

그를 보지 못한 양.

공간 자체를 분리하는 미망의 안개, 레브가 시전한 기술이 주변에 깔린 탓이었다.

스으윽.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던 알란이 이안 곁에 바투 붙었다.

이 자리서 사지가 찢긴대도, 설령 칼브란을 포기해야 한대도 이안만은 살려 보내겠다는 결의.

그의 날 선 각오가 생생하게 찔러오자 이안은 이를 악다물었다.

무력감에 차오른 분기를 알아챘기 때문일까.

아니면 눈에 어린 절망을 보았기 때문일까.

이안을 빤히 본 레브의 주위로 또다시 푸른 안개가 자욱해졌다.

안개의 색이 진해지자 기척이 지워지며 공간이 유리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생사여탈권을 가졌다는 레브의 협박은 협박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

“큿.”

이안은 염통에서부터 치받치는 덩어리를 누르려 주먹을 말아쥐었다.

희뿌연 공간을 장악하는 섬뜩함.

내 목숨이 내 목숨이 아닌 무력감.

그야말로 어부의 손에 잡혀 횟감이 될지, 방생될지 처분만 기다리는 물고기 신세지 않은가.

이로 인해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구역감이 찍어누르듯 이안을 집어삼켰다.

그때 느꼈던 오만 감정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모가지가 잘리지 않았던 까닭이 그저.

<크크큿. 예언자 널 살리면 살리카한테 쌍엿을 멕일 수 있는 건가?>

적의 변덕에 의한 것이기에 더더욱 치가 떨렸었다.

하여 그 분기는 손톱 밑 가시처럼 이안의 역린이 되었다.

‘그때 맹세했었지.’

다신 적의 선택에 내 목숨을 맡기지 않겠노라고.

다신 그날처럼 무력해지지 않겠다고.

제 선 안에 둔 자들에게 절대로 이런 절망을 안겨주지 않으리라.

이 악물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쓰라린 그때의 맹세를 반드시 지키기 위해 말이다.

* * *

며칠 후.

“뭘 찾고 있다며, 이안.”

도서관 사서인 드리아스가 발굽을 경쾌하게 굴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흥이 돋아나는 리듬이었다.

“아아.”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만날 수 있다는 정령 포루솔, 그 환상종을 만나려 한다고 들었는데.”

“참 소문 빠르다.”

하여튼 이 에루리안엔 비밀이 없다.

레브와 대화한 지 고작 3일 만에 모두가 다 알다니.

이안이 기막혀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리아스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구미가 당기는지 다소 높은 어조로 말이다.

“한데 그 정령은 떠돌이잖아. 마력의 지맥을 따라 이동하는.”

“그래도 반달이 뜰 땐 정착하니까. 혹시나 출몰 지역을 알아낼 수 있을까 해서 이 책을 한번 봐 보려고.”

이안은 『정령 철학: 희귀 정령들의 생태와 습성』이라는 제목의 책을 흔들었다.

망치 대용으로 써도 될 것 같은 두꺼운 책.

이 책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포루솔’에 관해 자세히 나열되어 있다.

무려 100페이지에 달하는 양이니 오죽할까.

이안은 책을 넘기며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여기에도 별거 없네.”

“후훗. 인간들이 단약을 발견했다는 장소만 몇 군데 찍혀있는 게 다지?”

“응. 아무래도 ‘포루솔의 발자국’을 봐야겠는데?”

포루솔의 발자국은 총 5권에 달하는 연대기이다.

그들의 태어남과 죽음, 살아가는 과정, 그들의 존재 이유 등이 적힌.

이른바 학자용 설명서.

“그거 봐도 소용없어. 내가 책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데 분포가 제국 전체야. 게다가 대중도 없어.”

“그럼 포루솔의 이동 경로는?”

“적혀 있지 않아. 그에 대해선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흐음. 경로를 알 수 없다면 잠복도 불가능하겠네.”

포루솔의 이동 경로만 정확하다면 사람을 풀어서라도 구해볼 텐데…….

방법이 없었다.

아쉬워하는 이안을 보며 사서가 녹색 발굽을 느리게 굴렸다.

“그런데 이안, 왜 굳이 포루솔의 이동 경로를 알려고 하는 건데? 수호자가 기다리라 하지 않았어?”

“아. 혹시 놓치면 다음 출몰 지역으로 가볼까 하고.”

“하여간 고생도 사서 한다.”

“그게 내 매력이잖아.”

“매력이긴 하지. 아슬아슬 걱정하게 만드니까.”

사서의 염려 어린 타박에 이안은 눈웃음 지으며 책을 그녀에게 건넸다.

사서는 별말 하지 않고 책을 받아 표지를 문질렀다.

양장본의 가죽이 매끄럽지 않고 왠지 꺼끌꺼끌했다.

이안의 고생길을 대변하는 것처럼.

“쉬엄쉬엄해.”

“……더는 책에서 건질 자료도 없는 것 같고,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응. 뭐 더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러 와.”

“알았어.”

“아, 이안. 다음엔 레브 그 아이도 데려와. 한번 보고 싶으니까.”

사서와 헤어진 이안은 곧장 기숙사로 향했다.

얻은 정보가 없어도 일단은 레브와 상의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하며 걷고 있는데.

[참견쟁이. 참견쟁이 이안!]

발길을 붙드는 소리가 이안의 코트 자락에 달라붙었다.

“너희들…….”

눈의 정령 치오난이 이안의 발치에서 폴짝거렸다.

개구쟁이들이 웬일로 친근하게 구나 했더니.

[수호자가 널 데려오라 했다. 꺄르르. 들창코를 이렇게 벌름거리면서.]

구미가 당기는 일이 생긴 모양이다.

[꺄르르. 수호자가 미쳤다. 미쳤어.]

“미쳤다니?”

[보면 안다. 직접 보면.]

치오난은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계속 움직거렸다.

[아. 친구도 데려오라고 했다.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그놈.’이라고 수호자가 그랬는데.]

“……레브?”

[난 몰라. 말만 전하는 거니까. 빨리 숲의 중앙으로 가자.]

튀어 오른 공처럼 폴짝대며 치오난이 앞장섰다.

무척 신이 난 뒷모습.

동글동글한 형태가 유난하게 반들반들해서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저 개구쟁이들은 ‘장난’이 될 수 있는 것에만 흥미를 보였다.

그 외에는 무관심한 성향.

분명 그러한데, 전령까지 자처하며 구경꾼이 되려 한다?

대체 녹스가 무슨 짓으로 저들의 관심을 끌었을까.

호기심이 일어서 이안 특유의 어슬렁거리는 걸음이 약간 빨라졌다.

* * *

치오난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긴 얼마 후.

“달빛이 조쿠나아아아아.”

“…….”

중앙 숲에 다다른 이안은 달밤에 취한 정령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저게 뭔 일…….”

눈이 풀린 녹스가 숲의 정령들과 광란의 춤판을 벌이고 있었다.

짧은 팔다리를 격하게 휘적대며 빈약한 골반을 꿀렁대는 녹스.

녀석의 현란한 몸부림을 따라 퉁실한 뱃살이 사정없이 출렁거렸다.

어찌나 하찮게 물결치는지.

만취한 녹스의 몰골에 이안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허.”

그의 헛숨을 알아챈 걸까.

[이아아아안. 반달이 떴다. 반달이.]

녹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안에게로 도도도 뛰어왔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한 뜀박질이었다.

[포루솔 만나러 가자.]

“지금?”

[곧 있으면 이곳에 도착할 거다.]

녹스가 드물게 흥분하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이때가 여름의 태양, 고 단약이 가장 맛있……. 아니, 효과가 좋다.]

맛있다고 하는 거 들었는데?

이안의 눈빛에 불신이 깃들자, 녹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고얀 놈. 이 스승 말 듣고 손해 본 적 있었느냐?]

“없었지.”

[한데 고딴 불손한 눈빛으로 쳐다 봐?]

“너무 갑작스레 포루솔이 그라나토스에 온다고 하니까 그렇지.”

포루솔의 이동 경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녹스는 그 경로를 훤히 꿰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들에게 방문하겠단 언질을 받은 것처럼.

[잔말 말고 가자. 동쪽 숲으로.]

* * *

녹스와 함께 도착한 동쪽 숲 화산지대.

일대가 용암이 들끓는 탓에 공기가 메마르고 후텁지근했다.

열기로 살이 익을 것 같아 이안은 바람을 일으켜 제 주위를 휘돌게 했다.

그렇게 더위를 몰아내고 있는데…….

[지각한 놈 온다.]

뒤늦게 도착한 레브가 이안을 보고 씨익 웃었다.

별일이 다 있다.

저를 보자마자 녀석이 치열까지 내보이며 웃다니 말이다.

“미안. 또 늦었다.”

“기드온이 견습생이라고 엄청 부려 먹으니 뭐. 그럴 거라 예상했다.”

“크큿.”

겸연쩍다는 듯 다시금 웃어 보인 레브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거라곤 죄 암석과 용암뿐이었다.

척박한 지형 탓에 사냥할 거리가 없어서 이안은 이곳에 잘 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여길 왔을까?

“여기서 뭐 할 일 있어?”

“반달 떴잖아.”

“반달?”

레브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려던 찰나.

화아아아악.

일대를 메우는 빛이 섬광처럼 터지며 시야를 가렸다.

얼마나 쨍한지 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잠깐 굳어있는 사이, 이내 사위가 어둑해지더니 묘한 냄새가 났다.

하여 레브와 이안은 슬며시 눈을 떴다.

“……어?”

저 멀리 용암이 흐르던 자리에 커다란 늪지대가 생성되어 있었다.

늪지대 안에는 포르솔 서른 마리가 거닐고 있었고.

‘진짜로…… 나타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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