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녹스가 말한 대로였다.
낌새나 징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정말로 나타났다.
다소 놀란 이안은 녹스를 흘끗 곁눈질했다.
‘어떻게 알았어?’라는 물음에 녀석이 답은 않고 ‘내 말 맞지?’라며 물컹한 배를 뚱 내밀었다.
역시나 잘난 체를 빼먹지 않는다.
뉘 집 정령인지 참.
이안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데.
“포루솔……이다.”
그보다 더 놀란 레브의 목소리가 녹스와 이안 사이를 갈랐다.
저러다 눈알 쏟아질라.
레브의 얼빠진 표정에 이안은 피식 웃으며 제 표정을 재빠르게 수습했다.
‘나는 놀란 적 없어요.’라는 듯이.
“뭘 이까짓 거 가지고 놀라.”
“포루솔이니까 당연하지.”
어디 포루솔이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정령이던가.
기적에 기적을 더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포루솔의 등장을 알고 있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웠다.
“왜, 여름까지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 했어?”
“당연하지. 단약을 구할 방법이 없는 걸 아는데.”
“훗. 내가 누구냐.”
이안은 앞머리를 멋들어지게 쓸어넘겼다.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허세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든, 순전히 멋을 위해서든.
물론 지금은 멋을 챙길 때였고.
“든든한 형님이시다. 아우님을 지극히 챙기는.”
이안의 낯짝 두꺼운 허세에.
[웃기고 자빠졌네.]
녹스의 비웃음이 이안의 말꼬리에 따라붙었다.
무척 뚜렷했지만 이안은 안 들리는 척, 턱을 치켜들고 잰 척을 이어갔다.
“동생의 곤경을 아는데 이 형님이 빨리 해결해야지.”
“그래, 내가 오늘은 동생 한다.”
“……어?”
딴죽을 걸지 않는 레브 때문에 이안은 잘난 척하다 순간 멈칫했다.
……지랄한다, 를 잘못 들었나?
평소에는 동생 소리만 해도 학을 떼던 놈인데, 웬일로 순순하게 굴었다.
포루솔을 만난 게 크긴 큰가 보다.
이안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늪지대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좋아. 레브 동생, 가자.”
“갑시다, 형님.”
한 몸처럼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포루솔 근처까지 빠르게 접근했다.
단단하던 지반이 물렁물렁해진 곳까지.
딱 거기까지만 가곤,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부턴 포루솔의 영역이라 더는 접근하면 안 된다.
이안이 허리춤 정도 오는 나무 뒤에 쪼그리자, 레브가 소곤소곤 입을 뗐다.
혹여 포루솔이 듣고 반응할까 봐 무척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여기서부턴 못 들어가지?”
“어. 포루솔이 내뿜는 빛에 닿으면 뼈째 녹아버리니까.”
“마력을 품고 있으면 무엇이든 다 녹아버린다고 하던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거지.”
“저 빛 말이야. 포루솔이 ‘지맥 다지기’할 때 나오는 거지?”
“어. 땅의 성질을 에테르계의 형질로 바꿀 때.”
지맥 다지기.
물질계에 흐르는 마력 지맥을 에테르계의 형질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정령들이 인간과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이를 위해 포루솔이 끊임없이 마력 지맥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포루솔이 진짜 중요한 존재긴 하지. 여러모로.”
“그래서 그런가……. 뭔가 신성하게 생기지 않았어, 이안?”
“확실히.”
이안의 시선이 늪지대의 중앙으로 쏠렸다.
짙푸른 대지 위에 위엄있게 서 있는 서른 마리의 포루솔.
순록처럼 생긴 포루솔은 몸통부터 뿔, 꼬리와 발굽까지 온통 새하얬다.
태양을 빼닮은 금색 동공을 제외하곤 모조리.
“어? 이안, 포루솔들이 움직인다.”
“지맥을 다지려는 건가? 저 과정에서 단약이 생긴다고 하던데.”
뿌우우우우.
무리에서 유난히 몸집이 커다란 포루솔이 울부짖자, 작은 포루솔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언제나 그래왔다는 것처럼 흐트러짐 없이 질서정연했다.
기사보다 더 기사 같다.
포루솔들은 가지런히 간격을 유지하며 고개를 짓쳐 들곤, 밤하늘을 응시했다.
달빛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새하얀 뿔 사이로 내리치는 달빛.
은색 빛을 양껏 받은 포루솔의 뿔이 크리스털처럼 금세 투명해졌다.
“와아아아. 뿔이 꼭 달처럼 보이는데?”
레브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지던 때였다.
스윽.
우아하게 고개를 내린 포루솔이 중앙에 있는 나무로 향했다.
이안의 허리춤 정도 되는 크기.
작고 알록달록한 나무에 당도한 포루솔은 투명해진 뿔을 나무에 비볐다.
뿔을 비비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뿔은 다시 원래의 색을 되찾아갔다.
본연의 흰색이 되자, 포루솔은 또 한참 동안 달빛을 받았다.
이 과정을 무한 반복했다.
여태껏 포루솔을 조용히 지켜보던 이안은 작게 말을 흘렸다.
“……저렇게 단약이 만들어지는구나.”
“신기하다. 직접 보니까 상상했던 것보다 더.”
누가 됐든 이 과정을 본다면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루솔의 몸짓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무척 경건해 보였으니까.
마냥 바라보게 되는 광경이었다.
목적도 잊고 한없이 지켜보던 와중.
포루솔의 뿔에서 갑작스레 뇌우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빛다발. 그 빛이 터진 직후였다.
중앙의 나무가 한 뼘 자라더니 가지마다 송알송알 열매가 맺혔다.
코가 아릿할 정도의 진한 향기를 퍼트리면서.
“저게 바로…….”
이안은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중얼거렸다.
열매는 자수정과 비슷했다.
그리고 크기는 각설탕 정도?
“여름의 태양.”
마찬가지로 한동안 멍하던 레브도 냄새에 정신을 차리고 말문을 열었다.
“코가 아리다. 과일이 썩어갈 때나 나는 달달한 냄새가 묘하네.”
“그러게. 막상 사람 손에 들어오면 냄새가 거의 안 난다는데.”
“포루솔이 이미 떠나버린 자리에 남는 거라서 그런 거겠지.”
말을 이어가던 레브가 난감하다는 듯 볼을 긁적거렸다.
“근데 이안, 저걸 어떻게 얻지?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는데.”
그게 문제였다.
포루솔의 영역에선 마력뿐 아니라, 그와 비슷한 성질을 품은 어떤 것도 먹통이 돼버리니까.
[이거면 된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양 녹스가 준비한 것처럼 즉답했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날개 쪽에서 뭔가를 꺼냈다.
……낚싯대?
긴 막대기에 낚싯줄과 바늘만 달려 있는 그것은 무척 볼품없어 보였다.
그걸로 뭘 하려고?
의문을 표하는 이안의 눈빛에 녹스가 답을 주듯이 하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막대기는 나무가 맞나 싶게 낭창낭창 잘도 휘었다.
[때론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 최상의 방법일 수 있다.]
-……아.
[금방 이해하네. 마력이 안 통하면 마력을 안 쓰면 되지.]
-가까이 갈 수 없다면 가까이 안 가면 되고.
[푸흘흘. 그러니 낚시하면 된다. 그걸 위해 준비한 이 낚싯대! 이놈으로 말할 거 같으면.]
-같으면?
[내가 한땀 한땀 포루솔의 뿔을 깎아 만든 거지.]
-포루솔의 뿔? 그걸 어떻게 구했대?
[…….]
-포루솔에 관해선 영 수상하네.
[네놈은 알 거 없다. 일단 네놈이 알아야 할 건 이 막대기라면 저 빛에 닿아도 절대 녹지 않는다는 거다.]
바늘에 단약을 꿰어 몇 개 훔치…… 아니, 얻어내자는 뜻.
[자, 뭐든 열심히 하는 네놈 차례다. 두어 개 잘 낚아봐라.]
녹스가 통통한 배를 거드름 피우듯 또다시 내밀었다.
밥상은 차려놨으니 너는 숟가락만 얻으면 된다는 장한 표현이었다.
생색을 거하게 내곤, 녹스는 이안에게 건네려고 낚싯대를 높이 휘둘렀다.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을 어지러이 휘돈 낚싯줄.
“……!!”
낚싯줄은 절묘하게도 11시 방향으로 날아가 어떤 포루솔의 뿔에 걸려버렸다.
운도 없게 하필, 우두머리의 뿔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녹스는 물론 이안도 몸이 굳어버렸다.
당황도 당황이지만 무엇보다 더 기함했던 건…….
[옘병. 튀자!]
우두머리 포루솔과 시선이 딱 마주쳤기 때문이다.
흡사 심연 같은 깊음.
그 끝을 알 수 없어서,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질해지고 멍멍해져 왔다.
우두머리에게 발각된 것만도 이미 큰 사달인데, 우라질!
“…….”
우두머리의 시선에 나머지 무리가 서서히 고개를 틀었다.
총 서른 마리의 직시.
올무에 걸린 것처럼 이안은 눈꺼풀 한 번 깜빡일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꼼짝도 못 하길 얼마쯤.
다각.
처음 눈을 마주친 우두머리 포루솔이 이안에게로 다가왔다.
천천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곧은 걸음을 따라, 나머지 포루솔도 위엄있게 뒤따라왔다.
* * *
하루 뒤.
[흐항항항.]
녹스의 양 볼이 술 먹은 것처럼 불그죽죽했다.
뿐일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춤사위를 선보이며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어젯밤에 벌어진 달밤의 생지랄, 그것의 재현이었다.
그땐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현재의 녹스를 보니 알 것 같았다.
포루솔이 일대에 나타난 것, 그리고 단약.
이 두 가지가 정령의 기분을 한없이 끌어올리는 것이다.
특히 단약.
에테르계의 기운이 농축되어선지, 정령의 고양감을 극대화하는 것 같다.
아침이슬과 비교하면 한 스무 배 정도의 효과?
저것 보라지.
포루솔이 준 단약 2개 중 하나, 그걸 섭취한 녹스의 저 되먹지 못한 흐느적거림을.
상태가 정말 별로였다.
저걸 교양과 상식이 실종된 몸부림이라고 하는 건가.
‘못 봐주겠구만.’
허덕이는 춤사위가 해괴해서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저대로 고이 갖다 버릴까?
그런 음침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안의 고막으로 상기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안.”
레브였다.
녀석 또한 어젯밤부터 녹스만큼이나 감정이 풍부해진 상태였다.
오늘 완벽하게 그 정점을 찍었고.
“이안 네 덕분에 특수 기술이 개방됐어. 별문제 없이.”
기분이 꽤 좋은지 레브가 연신 뺨을 실룩거렸다.
“다행이네.”
사실 어젯밤엔 단약이고 뭐고 골로 가는 줄 알았다.
포루솔이 다가왔을 땐 꼼짝없이 뭣 됐구나 싶었으니까.
그런데.
‘다짜고짜 내게 인사할 줄은.’
처음엔 우두머리가 영역의 경계선 끝자락까지 와선 세찬 울음을 토해냈다.
두개골이 쪼개져 버릴 것 같은 울음.
영락없이 공격하겠구나 싶던 순간, 갑작스레 우두머리가 이안에게 고갯짓을 했다.
막 인사를 받았을 땐 솔직히 그 의미를 해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그리운 향을 맡은 듯한 친애의 몸짓이었다.
<…….>
일순 당황했지만 이안의 머리통이 절로 수그러졌다.
그의 인사에, 투레질하던 우두머리가 ‘너를 만났으니 되었다.’라는 듯 찬찬히 뒤로 물러났다.
덩달아 영역도 함께 움직였고.
‘그렇게 떠났지.’
그리고 늪이 있던 그 자리에 단약 2개가 남겨져 있었다.
마치 이안 일행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안은 녹스를 한번 쓱 본 뒤 레브를 쳐다보았다.
레브의 얼굴에선 상기된 표정이 도통 가시질 않고 있었다.
“그 기술, 생각보다 멋지다?”
“오. 천재의 등에 날개를 단 격?”
이안은 특수 기술이 뭔지 먼저 묻지 않았다.
상대가 공개하거나 전투 중이라면 모를까, 무례한 짓이었다.
주인장이 알몸 상태로 있는 집에 쳐들어간 것과 같달까.
이안이 말이 아끼자 레브가 웃으며 물의 정령을 쳐다보았다.
정령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제 팔로 레브의 팔을 칭칭 휘어 감고 있었다.
“크큿. 특수 기술이 뭔지 보여 줄게, 이안.”
당연하다는 투였다.
이안에게 알려주는 건 괜찮다는 식으로 레브가 굴었다.
그러더니.
“미망의 안개.”
“……!!”
자신에 찬 어조로 특수 기술을 읊었다.
레브의 읊조림을 따라 정령이 서서히 옅어지며 안개화 되었다.
마치 해무가 낀 것 같은 푸르스름한 안개.
소금기 짙은 안개의 냄새에 이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이거…….’
이안 그의 무력감을 칼날처럼 찔러오던 그 기술이다.
그리고 그때의 기분을 내내 짓씹게 만든 기술이기도 했다
미망의 안개.
공간 자체를 분리해 이곳에 있되 이곳에 있지 않게 만드는 환술.
안개에 닿은 자들의 감각을 교란해, 눈앞에 시전자가 있어도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이번에 개방된 특수 기술이…… 이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