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81화 (81/214)

제81화

예상하지 못했다.

레브가 이 기술을 얻었던 시점이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그보단 소름이 돋은 것에 가까웠다.

과거일 뿐이라 여겼던 일들이 되살아나서 그만…….

잘 싸매두었다 여겼던 심처의 무엇에 균열이 일어났다.

이안은 혹여 제 표정이 이상할까 봐 얼른 입가를 가렸다.

티가 나지는 않았겠지…….

그러고는 잡티 하나 없는 레브의 매끄러운 오른쪽 뺨을 응시했다.

예전엔 눈가까지 뒤덮는 화상 자국이 있었다.

충분히 치유할 수 있는데도 녀석이 부러 내버려 둔 상처가.

“어때, 이안? 이 기술 굉장하지?”

안개가 옅어지며 지금껏 보이지 않던 레브가 모습을 드러냈다.

낯이 밝았다.

눈가까지 접으며 환히 웃는 걸 보니 만족감이 큰 모양이다.

재차 입가를 쓸어내린 이안은 표정을 관리하며 여상하게 답했다.

“고작 이 정도에서 만족하려고?”

“쳇. 이걸 보고도……. 독한 놈.”

“하핫. 솔직히 말하자면 대단하다. 이 기술만으로도 무적이겠는데?”

“그 정도까진.”

“와, 내숭 봐라. 수많은 기술 중에 환술 종류가 제일 희귀한 거 알면서.”

“부럽냐?”

“그래. 부럽다.”

이안은 시시껄렁한 말을 주고받으며 끓어오르는 뱃속을 억눌렀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비명이 터질 것 같아서.

상대의 자비를 바라야 했던 물고기 신세, 그때의 참담함이 자꾸 짓눌러와서.

손톱이 생살을 파고들 만큼 억세게 그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파리하게 질린 그 손에 녹스의 진득한 시선이 머물렀다.

접착제라도 붙은 양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 시선에 이안이 녹스 쪽을 보았을 텐데, 이안은 레브의 볼만 직시할 뿐이었다.

그저 물끄러미.

“…….”

녹스의 눈길에 무엇이 어리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저 이안은 덧칠돼는 어떤 기억을 침잠하듯 더듬을 뿐이었다.

현재는 깨끗한 레브의 오른쪽 볼.

그 볼을 뒤덮은 상처는 미망의 안개와 연관이 깊다.

그러니까 살리카 가주가 레브를 가지려 자행했던 아르데슈 가 몰살사건.

그 참상 당시 아이든 노인이든 할 거 없이 도륙당했다.

그런데 이게 또, 참 모순적이게 레브가 ‘미망의 안개’를 발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적을 교란해서 죽이고, 아르데슈를 한 명이라도 살려보기 위한 발악의 결과물.

그 과정에서 레브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오른쪽 눈이 실명됐었다.

‘하아.’

지난 생을 되짚던 이안은 치미는 한숨을 도로 꾹꾹 삼켰다.

무언가를 지키고자 애썼던 레브나.

무언가를 지키지 못하고 잃으며 무력했던 저나.

서로가 대척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제게 주어진 것들로 발버둥 쳐야만 했던 한 인간.

그러니 이제는 모두 과거일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버려두고 가야 하는.

“야, 한판 붙자.”

이안은 입술을 가린 손을 치우고, 말아쥔 주먹을 폈다.

그런 뒤 발치에 있는 사냥개를 내려다보았다.

전투를 준비하란 신호.

이에 엎드려 있던 사냥개가 늠름하게 고개를 짓쳐 들었다.

“내가 특수 기술은 없어도, 내 사냥개 기술이 또 보통은 넘지.”

“특수 기술 없으면 뭐, 하룻강아지지.”

“허. 이것 봐라? 누구 덕에 그걸 얻었는데 안면을 몰수하고 그러네?”

“훗. 내가 잘나서 얻은 거거든.”

“와아.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거 아니구나.”

“내 머린 푸른색이란다.”

아웅다웅하며 이안과 레브는 대련에 임했다.

이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레브.

이안은 사냥개에게 ‘그걸’ 사용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크륵.]

사냥개가 허공에 앞발을 샥 휘둘렀다.

연거푸 두 번.

그러자 교차한 은색 실선을 중심으로 안개가 쫘아악 빨려 들어갔다.

‘천공 할퀴기.’

할퀴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기술.

공간을 긁어서 그곳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천공 할퀴기는 미망의 안개를 파훼할 수 있는 천적기술이다.

‘사냥개를 얻었을 때부터 염두에 두고 이 기술만 판 보람이 있네.’

성과가 확실히 보이자 이안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지난 생에선 아무것도 못 했지만, 현재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룻강아지가 누군지 알려줘야지. 이 형님이.”

이안은 안개가 옅어지자 곧장 바람 화살을 겨눴다.

유달리 일렁이는 어느 지점을 향해.

쏴아악.

그러고선 지체하지 않고 묵직한 화살을 날렸다.

이는 과거를 털어버림과 동시에 다짐이기도 했다.

다신 무력하게 그 무엇도 잃지 않겠다는.

* * *

나름 평온한 일상이었다.

레기나도 끝났겠다, 레브 문제도 해결되었겠다.

순탄하고 매끄럽게 하루하루가 굴러갔다.

잔잔한 물웅덩이 같은 일상, 여기에 돌멩이 하나가 던져지기 전까진.

“거슬리는군.”

이안은 창밖 너머, 어둠을 틈탄 미약한 일렁임에 눈가를 좁혔다.

“깔짝깔짝 에루리안 주변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들 때문에.”

흔적을 교묘히 감춘 침입자들.

그들 자체에서 나오는 파동 때문에 그라나토스의 공기가 요동쳤다.

그로 인해 마력의 흐름이 스산해졌다.

달라진 숲의 공기는 곧장 바람에 실려 이안에게로 전해졌다.

=여기도 감시진을 새길 수가 없습니다. 벌써 며칠째 허탕인지.

그의 귓가로 침입자들의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흐음. 아무래도 진 자체를 무효화 할 수 있는 술식이 이곳 전체에 새겨진 것 같군.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려면 ‘수베르노의 서’가 있어야지 않습니까.

=그 정령서는 ‘왕’급 정령이 아니면 만들지 못하는데.

=게다가 그런 정령이면 가주들 외엔 결속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가주들조차 이 정도 규모의 술식을 구현할 수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현장에 없어도 소리만은 생생하게 들려왔다.

‘바람의 속삭임.’

일정 범위 내의 소리를 바람으로 전해 들을 수 있는 기술이다.

뷔트시겐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기본 기술.

총 5현의 단계 중 현재 이안의 단계는 2현이었다.

그라나토스의 중앙 숲, 그 범위까지는 잡음 없이 들을 수 있다는 뜻.

‘좀 더 자세히 들어볼까?’

이안이 바람의 속삭임에 한껏 집중하던 때였다.

그라나토스 초입에서 고개를 돌린 녹스가 미간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대체 며칠째 저러는 건지.]

“참 끈질긴 놈들이야. 거기다 실력도 상당한 것 같지?”

[마력 속성까지 교묘히 감춘 걸 보면 상당하다.]

“감시자들이 다 그렇지. 소속이 불인지, 물인지 모르게 하려고 마력 배열을 혼동시키는 술식을 심장에 새기니.”

이는 철저하게 정체를 감추기 위함이었다.

자신에 대한 건 숨기면서 무엇을 알아내려 그를 감시하는 걸까.

저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계속 감시를 당하면 결국 곤란해지는 건 나지.’

이안은 바람의 속삭임을 들으며 눈으로는 녹스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녹스만은 아직 들켜선 안 된다.

그것만큼은 진심으로 피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더는 감시자들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할 터.

일단은…….

‘저들의 행동을 제재할 명분부터 얻어야 할 것 같은데.’

이안은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필요했다.

묘책…….

곱씹다 보니 얼마 안 가, 그의 머릿속에 선명히 ‘덫’이란 글자가 그려졌다.

“녹스, 코르키. 산책가자.”

[산책?]

“어. 레브와 올리브도 데리고.”

[오호. 보아하니 내 차폐 실드가 필요할 것 같구나. 푸흘흘.]

“스승님도 계시겠다, 이제 저것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러 가볼까.”

이안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반짝거렸다.

그만큼 신이 난 손길로 그는 오랜만에 가죽 가방을 열심히 뒤적였다.

* * *

30분 후.

C반 기숙사가 잘 보이는 그라나토스 어느 경계선.

보라색 별이끼 나무가 군락을 이룬 그곳이 줄곧 수선했다.

나무 주변을 얼쩡거리는 붉은 두건을 쓴 무리 때문.

샤샤샥. 샤삭.

부산한 이들 중, 제일 앞줄에 서 있던 남자가 붉은 눈알을 굴렸다.

뭔가 느낌이 싸했다.

턱밑에 검이 겨눠진 것처럼 으스스하달까.

괜스레 솜털이 서는 기분에 감각을 끌어올린 찰나.

‘……뭔가가 온다!’

본능적으로 뭔가를 감지한 남자는 피하란 손짓을 수하들에게 보냈다.

그와 동시에.

쏴아악.

남자의 반지에서 튀어나온 불의 정령이 한 그루 나무로 화했다.

만개한 나무에서 낙화하는 무수한 불의 꽃잎들.

그 새빨간 꽃잎들은 곧장, 자신들에게 쇄도하는 수십의 바람 화살들을 모조리 막아냈다.

꽃의 방패에 막혀 순식간에 사그라든 화살.

공격을 매끄럽게 막아내고도 남자는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이안 뷔트시겐.’

감시 대상이 찾아온 것이다.

바꿔말하면 대상에게 들켰다는 의미인즉.

‘저쪽에서 꼬투리 잡을 명분을 줘버렸군. 더는 감시가 무의미하다.’

튀어야 한다.

정체만 탄로 나지 않으면 감시했다고 물고 늘어질 수 없잖은가.

뷔트시겐 쪽에서도 항의할 수 없을 터.

삽시간에 판단을 끝낸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쥐었다가 옆으로 꺾기를 두 번.

정체가 들통나기 전에 철수하라는 신호였다.

=신속하게 에루리안을 벗어나라.

기민하게 뜻을 알아챈 감시자 셋은 즉각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다.

콰콰괏.

하지만 홀연히 나타난 노란 머리 소년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소년이 별이끼 나무 주변에 거대한 벽을 생성했으니까.

일거에 감시자들을 밀폐시켜버린 대지의 벽.

퇴로가 막혔다.

눈가를 꿈틀한 남자는 빈틈이 없는 벽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위는 뚫렸다.’

그는 불의 꽃잎으로 발판을 만들어 수하들과 함께 위로 향했다.

대지의 벽, 그 끝이 가까워져 갔다.

탈출하겠다 싶던 그때.

츠즉. 츠즈즉.

물의 채찍이 날아오더니 거기서 돋아난 얼음 깃털들이 비산했다.

여기에 덧대.

후우웅, 거세게 부는 바람이 얼음 깃털의 회전력을 더 빠르게 만들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았다.

“크읏. 아래로 내려간다.”

남자는 재빨리 꽃의 발판을 줄이며 얼음 깃털의 범위에서 멀어졌다.

다시 밟은 지면.

“허억.”

무거운 대기로 인해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고작 초급 기술을 시전했을 뿐인데 지치는 속도가 상상이었다.

이 상태로 벽을 뚫는 건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처한 상황이 자못 짜증 나서 남자는 재차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이 모든 움직임을 철저히 계산한 양.

쿠구궁.

정면의 벽이 지옥문처럼 느릿하게 아가리를 벌렸다.

‘사냥할 줄 아는 자다.’

카르디아는 그라나토스에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고로 감시자들이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이용했다.

이뿐 아니었다.

설령 싸울 수 있어도, 감시자들은 싸워선 안 된다는 것까지 계산에 넣었다.

감시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던가.

정체를 들키지 않으면서 상대의 정보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할지니 본분을 잊고 신나게 싸울 순 없었다.

만약 감시가 들통날 시 이들이 해야 할 행동은 단 하나.

엉덩이에 불화살 맞은 멧돼지처럼 꽁무니를 빼는 것뿐이었다.

‘도망가려면 기술을 써야 하는데, 함부로 쓸 수도 없고.’

마력 속성은 감춰도 기술을 쓰다 보면 들통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등급이 어느 정도인지.

직계인지 혹은 방계인지.

아니면 감시 등을 위해 특수한 기술을 습득했는지, 곧 소속이 어딘지.

‘곤란하군.’

남자의 사정은 그만의 것이었다.

자비를 베풀려는 것인지, 아니면 숨통을 끊으려는 것인지.

대지의 벽 한쪽의 열린 틈.

작은 틈 사이로 들어선 건 감시 대상인 이안이었다.

“내가 왔습니다.”

이안은 코트에 양손을 넣은 느른한 자세로 말을 건넸다.

유들유들한 아는 척에도, 당연하지만 감시자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런. 감격스러워서 말들을 잃으셨나?”

“…….”

“며칠째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추종자들이라 직접 만나러 온 건데.”

“…….”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는 감시자들은 이안 너머를 노려보았다.

열린 틈.

그리고 자신들이 상대할 소년의 등급은 페이라조 3성.

충분히 뚫고 나갈 실력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자신감을 보이는 감시자들에게서 이안은 눈을 떼지 않았다.

“붉은 두건을 쓰는 건 살리카 가주의 친위대뿐인데.”

“…….”

“거기다 붉은 동공에 불의 정령과 결속을 맺었고.”

혼잣말하던 이안이 ‘살리카에서 왜 날 감시하지?’란 의문을 드러냈다.

그가 느슨해진 이때가 기회다 싶어.

타다닷.

대장을 제외한 감시자들이 이안 쪽으로 내달렸다.

뚫고 나갈 작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