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멈춰라!”
오직 이안만을 주시하던 대장이 다급하게 수하들을 제지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각’이었다.
수하들은 내달림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움직이기 시작한 물체는 추진력이란 걸 얻는다는 거였다.
그들의 예상보다 더 나아간 발걸음이 멈춘 곳은 이안 앞.
말 그대로 눈코입이 원근감을 무시하는 코앞이었다.
씨익.
이안은 그들을 보며 반질반질한 눈웃음을 머금었다.
마치 너희들이 돌파하려는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 후, 지체하지 않고 이안은 코트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뺐다.
손에 들린 두 개의 붉은 구슬.
춤추는 불꽃을 고이 가둔 구슬은 손바닥 안에서 찬연하게 빛을 발했다.
‘저건.’
내도록 이안을 직시하던 남자의 머릿속이 일순간 복잡해졌다.
화염 구슬?
불의 정령을 대신하는 저 구슬은 전투시 보조용으로 쓰인다.
말 그대로 보조용.
정령이나 정령사가 쓰는 기술에 못 미치지만, 마력 고갈을 대비한 것.
위력이 크지 않은 구슬인데도 어쩐지 이안 손에 있으니 꺼림칙했다.
맞닥뜨림은 짧았으나 남자는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열다섯이라고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우려가 괜한 염려증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크크큿. 반갑습니다, 살리카의 탈을 쓴 ‘정령사 협회’ 감시자분들.”
“!!”
진짜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이안은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내가 맞췄지, 라는 표정.
으스대는 표정 뒤, 그는 갑자기 손에 들린 화염 구슬로 자신의 팔뚝을 내리쳤다.
화르륵.
삽시간에 팔뚝을 타고 불길이 일었고.
“!?”
왜 자해를 하나 의문이 듦과 동시에.
지글지글.
이안의 팔뚝을 삼킨 불길은 삽시간에 옷을 태우고 피부를 집어삼켰다.
시뻘겋게 엉킨 살갗은 보기 흉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상황에도 그는 홀로 태평했다.
“흠. 이 정도면 덤터기를 씌울 수 있으려나?”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곤 난데없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앗! 무방비한 날 비겁하게 공격하다니!”
‘……함정이다!’
남자가 직감함과 동시에 콰르르릇 대지의 벽이 무너져내렸다.
짠 것처럼 착착이었다.
머리통이 두 개인 사냥개와 함께 나타난 소년 둘.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안에게로 달려들었다.
“헐~~~~~. 이안, 괜찮아?”
“설마 공격당한 거야?”
“에이 설마. 카르디아가 페이라조를 떼로 공격했다고?”
공격한 게 아니라 자해였다.
점점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서, 입이 있어도 감시자들은 항변하지 못했다.
팔뚝을 잡고 몸을 옹송그린 감시 대상 이안.
이안의 상처에 분노해 감시자들을 노려보는 앳된 소년들.
이 촌극에 뭘 더 보태려는 걸까.
“도련님!”
다음 순서는 자신들이라는 양, 시커먼 복색의 누군가가 공중에서 떨어져 부복했다.
이들이 고개를 숙이는 상대는 오롯하게 이안이었다.
“저희가 있음에도 도련님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아, 알란. 오랜만이야.”
“예. 도련님을 다시 뵈어 반가우나…….”
알란이 눈알만 굴려 어정쩡하게 서 있는 감시자들을 노려보았다.
“면목이 없습니다. 도련님을 저 망나니들로부터 보호하지 못했으니.”
‘……뷔트시겐 가주의 친위대.’
친위대의 등장에 남자는 자해로 시작된 연극의 목적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명분 얻기.
전말을 가닥 잡은 남자는 짧은 감탄을 담아 이안을 응시했다.
감시 대상이 감시를 눈치챈들.
그리고 어디서 감시자를 보냈는지 알고 있다 한들.
감시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상대가 항의하면 물러나는 척하다가 다시 감시하면 되니까.
‘그러니 감시 자체를 무효화 하려는 거였어.’
다신 주변을 알짱거리지 못하게 하려고 계략을 꾸민 것이다.
감시하다 뷔트시겐의 적자를 상해 입혔다?
뷔트시겐에서 물고 늘어지면 모가지를 내놔야 할 만큼 큰 사달이었다.
한숨을 쉬고 만 남자는 이안에게서 누군가를 겹쳐 보았다.
정령사 협회장.
그가 모시고 있는 주군도 저러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심중에 무엇을 담고 있던가.
‘벗어날 수 없는 덫이라면.’
수습에 최선을 다해야 한단 판단을 남자는 내렸다.
“사죄드리겠습니다. 의욕이 앞서 뷔트시겐 도련님을 다치게 했습니다.”
“사죄?”
고개 숙인 남자에게 응대한 건 친위대의 대장인 알란이었다.
그가 가주에게 받은 명령은 이안의 보호.
목숨이 위험하지 않으면 일절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번 역시도 그러려니 했고.
‘하지만 그걸 아는 도련님께서 우리까지 끌어들이며 일을 벌이셨으니.’
장단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솔직하게 덧붙여보자면 알란은 ‘옳다구나’ 싶어 나선 것이다.
정령사 협회가 도련님을 감시하는 게 내내 불쾌했으니까.
그런데도 저지할 명분이 없던 차, 끼어들 기회가 생긴 것이다.
“도련님께서 크. 게. 잘못될 뻔하셨습니다. 한데 말로 때우겠단 겁니까?”
“차후 이런 일이 없도록…….”
“차후? 가주님을 닮아 훤칠한 도련님께서 이리 상하셨는데 차후?”
“예?”
“가주님과 도련님은 우리 뷔트시겐의 자랑입니다. 용모마저 뷔트시겐의 기상을 닮았지요. 그게 손상되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바로 뷔트시겐의 품위가 손상되는 겁니다.”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어질함을 느낀 남자의 눈에 실실거리는 이안이 들어왔다.
푸른 머리 소년에게 상처를 치료받고 있는 이안이 눈빛으로 말을 전했다.
친위대 또라이들을 잘 상대해보쇼.
‘……아!’
남자는 악담을 건넨 이안을 스쳐 다시 진중한 알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심각한 척하는 모양새가 더 웃긴 친위대 대장 알란.
알란은 여러모로 유명한 친위대 소속답게 똘끼가 충만했다.
뷔트시겐 가의 친위대.
철저히 가주와 일족의 후계자 바라기인 광신도 집단이다.
험담이라도 들으면 게거품 물고 달려드는 미친놈들.
둘 중 누구라도 다치면 눈깔 까뒤집고 살풀이하는 악귀들.
충성도가 남다른 저들을 들쑤시면 엿 되는 건 한순간이다.
‘하아. 때려치우고 싶네.’
남자는 감시자 인생 20년을 통틀어 최초로 임무를 관두고 싶어졌다.
“크흠. 품위를 손상시킬 의도는 없었습니다.”
“의도가 있었냐, 없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도련님께서 다친 순간 이미 엎질러졌으니.”
“즉각 치유사를 파견해 품위를 복구하면…….”
“그렇게 빠져나가겠단 겁니까? 섬약한 우리 도련님께서 얼마나 놀라셨을지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섬약.”
“예, 섬약. 마음이 원체 약하셔서 우리도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얼마나 노심초사하는데.”
알란의 순도 높은 열연에 이안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아주 비련의 남자 주인공이 따로 없다.
남자는 코가 막히고 기가 막히는데, 알란이 목청을 높였다.
“보십시오. 이미 마음의 상처를 입은 도련님의 처연한 이 얼굴을. 그건 무엇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습니다.”
섬약의 기준이 언제부터 자해하고 사람 협박하는 놈에게 쓰였을까.
남자는 골이 지끈거렸다.
이안의 의도인 ‘다신 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는 제대로 먹히는 중이었다.
협회로 복귀하는 즉시 협회장님을 설득시킬 것이다.
감시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당분간 그냥 멀찍이 떨어지는 게 좋겠다고.
* * *
제국의 수도 라에라트의 남쪽 기르타브 구.
흔히들 정령사 협회 거리라 불리는 그곳의 공중정원에 긴장이 감돌았다.
원인은 길쭉한 탁자에 마주 앉아있는 두 사람 때문이었다.
바로 칼브란과 협회장 말이다.
협회장은 호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반면, 칼브란은 혈혈단신이었다.
적진에 홀로 있는 셈.
그런데도 외알 안경을 추켜올린 칼브란의 미소는 우아했다.
“과연, 명성대로입니다. 죽기 전 봐야 할 절경 중 하나가 협회의 공중정원이라더니.”
“허허허. 겸양을 떨 수가 없군.”
칭찬을 넙죽 받은 협회장은 평소처럼 딱딱하지 않았다.
단답으로 그치지도 않았고.
“이곳의 풍경을 보고 나면 누구나 진솔해질 수밖에 없으니.”
“그렇습니까.”
“이견이 없을 걸세. 때때로 소문은 과장되거나 다소 축약된다지만.”
“과장이나 축약,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참으로 한가로운 건 확실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 풍경을 아껴 마지않는다네.”
“그리 아끼시니 참견하고 싶지 않으나.”
아래로 휘는 칼브란의 눈꼬리가 반들반들했다.
안경의 유리를 반사한 탓인지, 그도 아니면 속내가 드러난 것인지.
“정경을 바꿔보셔야겠습니다. 이 한가로움에 젖어 애먼 생각만 하시는 것 같으니.”
해석하면 이랬다.
노상 똑같은 풀떼기를 보고 있으니 정신이 돈 거 아니냐.
그러니 이안 감시니, 뭐니 그딴 명령을 내렸겠지.
헛발질하지 말고 주변을 정리하며 그 김에 네 머리통도 좀 정리해라.
돌려 깎는 솜씨가 일품이라 협회장의 미소 또한 진해졌다.
“협회의 일은 내 소관일세. 오지랖은 사양하고 싶군. 남을 신경 쓸 바에야 집안 단속이나 잘 하시게.”
“저희 뷔트시겐은 잘 돌아갑니다. 누가 건들지만 않는다면.”
칼브란은 뜨끈한 재스민 티를 한 모금 마셨다.
꽃을 넣어선지 떫은 홍차의 맛이 달콤했다.
누구나 즐기는 대중성.
하지만 칼브란은 떫어도 본연의 맛을 즐기는 걸 선호했다.
입맛만 버렸단 생각을 하며 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한가한 시간에 정령사 협회를 걱정해 보았습니다. 수장을 잘못 둔 집단의 말로가 어떤지 잘 알기에.”
“내 손으로 협회를 끝장낼 아둔한 짓을 부릴 만큼 노망나지 않았네.”
“이런. 노망이라니요. 아무래도 오해가 생긴 것 같군요.”
“능청 떨지 말게. 자네 말속에 숨은 가시 하나 내가 못 찾아낼까.”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내 도련님께서 화상을 입고 몸져누우셨습니다. 섬약하신 분이 얼마나 충격이 크셨으면. 이에 대해 하실 말 없으십니까?”
그놈의 섬약!
이를 갈던 감시자 놈이 떠올라서 협회장은 미간을 구겼다.
감시자로 산 세월이 길어 웬만해선 꿈쩍 않는 독한 녀석이었다.
그만큼 노련하기에 이안의 감시자로 붙인 것이다.
잘해 낼 거라 여겼건만.
‘산전수전 다 겪은 놈이 학을 뗐지.’
노련한 감시자를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만든 이안 뷔트시겐.
그 천둥벌거숭이가 자해공갈을 해놓고는 몸져누웠단다.
기가 막혀서.
입안이 까끌까끌해진 협회장은 차를 단박에 들이켰다.
“보고를 받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 아비의 성정보단 자네의 성정을 더 많이 닮은 것 같단.”
“그렇습니까? 도련님이 절…… 많이 닮았습니까?”
“그, 그렇다네.”
찰나, 칼브란의 안광이 번득거리며 안색이 환해졌다.
의도는 ‘음흉한 네놈을 닮아 이안이 그 모양 그 꼴이다.’란 공격이었다.
한데 날름 받아서 헤실거리는 꼴이라니.
“도련님께서 탯줄을 자른 순간부터 곁에서 모셨습니다. 그저 한해, 한해 무사히 넘기기만을 바랐는데…….”
어째 주제를 잘못 정한 것 같다.
‘칼브란=팔불출’을 뒤늦게 떠올린 협회장은 아차 싶었다.
팽팽하게 당겨지던 공기가 예고도 없이 느슨해져 버렸다.
공기가 식어버린 것도 모르고 칼브란은 주접을 떨어댔다.
‘도련님이, 자랑스러운 내 도련님이.’로 시작된 타령.
“도련님의 나이 다섯 살 때였지요. 약제학에 능통한 교수들조차 어려워한다던 그 책 말입니다. ‘약초와 독초 사이의 C(선택)’, 그 책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련님의 나이 일곱 살 때였지요. 2장로의 수련을 보시더니 ‘바람의 흐름이 흡사 용 같아.’라고 하셨습니다. 마력핵도 없이 흐름을 읽으시다니 정말 영특하지 않습니까.”
주접의 끝은 ‘내 도련님 천재’였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하지 않던가.
도저히 자를 틈을 찾지 못하고 반쯤은 넋을 놓고 있던 협회장은 식은 차를 마셨다.
정신을 차리려는 최후의 노력이었다.
이안의 성장기를 들으려고 없는 시간을 쪼갠 건 아니었으니까.
“크흠.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