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아. 본론.”
칼브란은 입술 끝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천재는 요절한다고, 내 도련님이 누구 덕분에 큰일 날 뻔했지요. 재능을 펼치기도 전에 살해당할 뻔, 하시다니!”
“살해는 아닐세. 게다가 자네의 도련님은 잘 살아있지 않나. 꾀병을 부릴 만큼.”
자해였다고 정정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현실을 받아들인 협회장은 타협을 보기로 했다.
“어쨌든 ‘히에로스’를 위한 내 결정이 뷔트시겐 가주를 언짢게 했다면 사과하지.”
“흐음. 사과가 비겁하군요. 제국을 들먹이며 협회의 행동을 이해하라, 강제하다니요.”
“이 마당에 무얼 숨기겠나.”
“…….”
“크흠. 뷔트시겐 도련님의 힘에 미지수가 있다고 판단하여 감시를 붙인 것뿐이지, 별다른 의도는 없었네.”
“별다른 의도라…….”
칼브란의 말꼬리가 여운을 남겼다.
4대 가문의 감시와 징벌을 담당하는 정령사 협회.
이들의 움직임에 ‘별다른 의도’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러니 저들이 도련님을 ‘위협’으로 판단했을 시 어떤 결과가 초래됐을지.
“대화 첫머리에 협회장께서 그러셨습니다. 때때로 소문은 과장되거나 축약된다고.”
칼브란은 거칠게 외알 안경을 벗어 던졌다.
공중을 가르며 회전하던 안경은 호위 중이던 젊은 여자에게로 날아갔다.
지척에 다다른 일순간.
까아악.
안경은 다리가 세 개인 검은 까마귀로 변했고, 거센 울음을 토해 냈다.
공중정원을 휘도는 바람을 짓이기는 파동.
이에 우위가 점해지자, 바람의 흐름이 칼브란의 의지에 복종했다.
후우우웅.
까마귀의 날갯짓에 인 바람이 여자의 등을 매섭게 밀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여자가 대처하지 못한 사이.
콰드득.
여자의 목줄기는 어느새 칼브란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아무래도 소문이 몹시도 축약되었나 봅니다. 뷔트시겐에 대해서.”
“진정 정령사 협회와 척을 지고 싶은 겐가?”
수제자의 목숨줄이 위험해도 협회장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칼브란 랑고바트, 감시에 수가 뒤틀려도 천지 분간은 할 줄 알아야지.”
협회장의 경고에도 칼브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뷔트시겐이 어떤 일족인지 소문으로 들어 아시지 않습니까. 과장되었든 축약되었든.”
“…….”
“우리 일족은 불모의 설원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영광과 자부심을 일궈냈습니다. 하여 현재, 아무리 등이 따스해도 메마른 설원을 달리던 과거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뷔트시겐 그 어떤 누구도.”
칼브란은 단언했다.
“그렇기에 일족을 해하려 한 ‘적’을 용서한 적이 없습니다.”
“건방지군.”
“늑대가 이를 드러내는 건 적에 한정해서이니. 부디 늑대가 이를 드러내게 하지 마십시오.”
“이잇!”
“이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협회장님의 변명이나 사과를 듣자고 온 것이 아니라.”
여자를 놓은 칼브란은 느긋하게 일어섰다.
바닥에 엎어져 켁켁거리는 여자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스승인 협회장조차도.
끝까지 칼브란의 움직임을 놓지 않는 협회장의 안광이 날카로웠다.
살을 저며버릴 것 같아도 칼브란은 여전히 유들유들했다.
“이제 보니 말입니다. 이 공중정원, 나름 괜찮군요.”
“…….”
“협회장님이 이곳에 눌러앉아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은.”
요약하면 ‘할배, 꽃꽂이나 하며 조용히 사쇼.’였다.
* * *
똑똑.
정중한 두드림은 기다리던 것이 왔단 신호였다.
미적거리지 않고 이안은 방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 몸만 한 상자를 들고 서 있는 브라우니.
관리자는 굉장히 무감한 기색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달했습니다.”
무척 사무적이었다.
시종 딱딱함을 유지한 브라우니는 상자를 주고선 그 자리서 사라졌다.
“오. 부탁한 게 왔네.”
이안은 주홍색 왕관 모양의 상자를 반갑게 두드렸다.
그런 연후 상자를 책상에 밀어 놓고 거기에 딸려온 서신을 펼쳐 읽었다.
장수는 두툼해도 내용은 단순한 칼브란의 서신.
‘정령사 협회장에게 절대 도련님 곁에 얼씬도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뷔트시겐 일족을 전력으로 상대해야 할 것이다.’
‘이 칼브란이 엄청 멋지게 엄포를 놓으며 떨거지들을 떨쳐냈다.’, 등등.
뭐 그런 자랑 섞인 공치사가 서신 그득 넘치고 있었다.
“생색도 칼브란답네.”
우쭐거림이 절반이어도 공을 알아달란 생색이었으랴.
도련님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이뤄냈으니 염려 마시란 말을 능청맞게 표현한 거지.
칼브란의 활약으로 더는 정령사 협회의 감시를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이쪽은 해결됐고.”
서신을 정성스럽게 접은 이안은 봉투를 서랍에 가지런히 넣었다.
“자. 기다리던 상자도 왔으니 홀가분하게 놀러나 가볼까.”
이후 이안은 제법 묵직한 상자를 들고 기숙사를 나섰다.
이걸 받을 이들의 표정을 생각하니 벌써 발걸음이 가뿐했다.
괜히 신경 쓰였던 감시자까지 없으니 더더욱.
한없이 경쾌했는데, 발걸음의 경쾌함은 얼마 가지 못했다.
레브가 뭔가 못마땅하다는 투로 그를 불러세웠으니까.
“이안.”
“…….”
“팔의 상처는?”
“아까도 확인했으면서. 괜찮아, 괜찮아.”
“또 얼렁뚱땅. 내가 꼬박꼬박 묻는 이유를 몰라서 그래?”
“알고 있습니다, 치유사님. 아무리 원하는 게 있어도 자해는 하지 말라는 거잖습니까.”
“그 소리가 아니잖아, 지금.”
“아녔어? 그럼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란 응원?”
“이봐, 이봐. 또 장난으로 때운다. 네 몸부터 챙기란 말이잖아.”
정령사 협회의 감시는 떨궜는데, 어째 그날 이후부터 레브가 감시자처럼 군다.
“화상도 화상이지만, 너 결계 부수다 몸 상한 거 아직 회복 안 된 거 몰라?”
“그게 언제 적인데. 벌써 다 나았지.”
“…….”
“내 전담 치유사가 누군데.”
이안의 능청에도 레브의 얼굴 구김은 펴질 줄을 몰랐다.
저 성난 주름에 번데기가 형님 하자 덤빌라.
이안은 더 큰 불똥을 피하려 곧장 저자세를 취했다.
“예, 예, 치유사님. 요번만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고 나선 열심히 누워있습죠.”
“……하아.”
“무조건적인 휴식, 맹세하지요.”
“후우. 됐다. 맨날 말뿐인 소리 또 늘어놓을 거면 가던 길…….”
“옙. 가던 길, 마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치유사님의 허락도 받았으니!”
퍽!
레브는 깐족대는 이안이 얄미워 배때기를 한 대 후려쳤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길에 이안은 씨익 웃고는 잽싸게 발길을 옮겼다.
어쩐지 미워할 수만은 없는 그 뒤태를 레브는 가만히 응시했다.
겉보기는 멀쩡하고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마력의 파장이 짙어.’
이안에게서 흘러나오는 파장이 피부가 아릴 정도로 짙었다.
마력핵이 없는 것처럼 무색무취였던 이전에 비해.
이는 마력 통제력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뜻.
제 실력의 범위를 벗어난 정령을 소환하며 무리를 했으니…….
그런데도 저 빨빨거림에는 방법이 없다.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서 침대에 묶어놔야, 그때에나 안 움직일까.
“저러니 잔소리를 하게 되지, 저러니.”
“흐응. 자기 문제에 관해선 둔감한 인간이네.”
레브의 팔을 휘감는 서늘한 촉감, 그것은 인간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물 정령만이 가진 낮은 온도가 유달리 진했기 때문이다.
“둔감한 정도가 아니야.”
레브는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정령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스물 초반의 성숙하고 매력적인 외양.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완벽한 형태.
그 탓인지 외관만으로는 사람과 구별이 불가할 정도였다.
“원하는 것을 쥐기 위해선 팔이 아니라 배때기에 구멍도 뚫을걸?”
“걸어 다니는 마나 폭탄이네, 쟤.”
“아주 위험한 폭탄이지. 스스로가 희생해야겠다, 맘 먹으면 언제든 자폭해버릴 녀석이니까.”
“생긴 건 결속자 너만큼이나 멀끔한데, 속은 곯았나 보다.”
“대체…… 무엇이 저 녀석을 저렇게 강박적으로 만드는 걸까.”
레브는 인상을 찌푸렸다.
결계 변형 사건 때부터 희미한 위화감이 들었다.
아이들을 지키려던 이안의 행동은 너무나 절박해 보였으니까.
누구 하나라도 죽을 시 이 세상이 당장 무너져버릴 것처럼 보였달까.
“강박…….”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
레브 또한 비슷한 강박을 지니고 있다.
가족을 무력하게 잃어 본 경험이 있으니까.
일종의 후유증 같은 거였다.
즉, 저 밑바닥까지 몰려 본 경험이 없다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녀석에게 그런 경험이 있을 리 만무한데.’
마력핵이 없었던 결핍으로 인해 생긴 집착이라고 치기엔 뭔가…….
이안이 가진 처절함과 치열함이 전부 버무려지지 않았다.
“대체 뭘까.”
“흐응. 혹시 그런 거 아닐까 싶은데.”
“그런 거?”
“예언자일 수도. 저 아이, 앞날을 아는 것처럼 군다며.”
“예언자 특성은 빛의 정령, 그것도 고대종을 얻어야 생기는 거 아냐?”
“모르지. 세상이 모르는 비밀 하나쯤 이곳 어딘가에 감춰졌을지도.”
* * *
아르테리아 호수.
이안이 상자를 들고 찾아간 곳은 헤르세가 사는 호수였다.
확연하게 느껴지는 들뜬 분위기.
하프 선율을 내며 날아다니는 헤르세의 날갯짓이 온 호수를 떠돌았다.
이안은 그 분주함을 서슴없이 뚫으며 너털웃음 짓고 있는 노인 곁으로 곧장 다가갔다.
“수장님.”
“오, 오셨습니까.”
“응당 와야지요. 일족의 경사 아닙니까. ‘헤르세의 성인식’은.”
“허허허.”
평소보다 웃음이 많은 걸 보면 수장의 기분이 정말 좋은 듯했다.
이럴 때 사족을 붙여 무엇하랴.
이안은 말을 길게 끌지 않고 가져온 상자를 내밀며 축하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수장님.”
“어찌 선물까지 챙겨오신 겝니까? 몸만 오셔도 충분한데.”
“이 좋은 날 선물이 빠지면 섭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은인님은.”
수장은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너에게 푹 빠졌지만 더 깊이 빠졌다는 눈빛.
수장의 기색과 왕관 모양의 상자가 호기심을 끌어당긴 모양이다.
분주하던 헤르세들이 상자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이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수장은 꽃잎을 깐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우리 일족을 상징하는 상자라니. 이리 세심할 데가.”
“부러 그랬습니다. 이왕 선물을 주는 김에 생색 좀 내려고.”
“하하핫. 그 생색, 기쁘게 받지요. 헌헌장부인 은인님이 주는 거라면 돌멩이도 기꺼우니.”
가만 보면 수장의 콩깍지는 몹시 강력했다.
팔불출 소리를 듣는 아버지나 칼브란보다 더.
거기다 그가 죽기 전까지는 영영 벗겨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함부로 대하면 안 되겠지.’
이안은 오히려 가까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세밀하게 다듬을수록 정교해지는 조각품 같은 것이 관계이지 않던가.
얼마나 정성을 들이느냐에 따라 그 차이가 클 수밖에 없을 터.
“이번엔 마카롱으로 가져와 봤습니다. 단 것을 좋아하시니.”
“오오, 이건. 황실에 납품되는 ‘마담 파니시의 까누슈’가 아닙니까.”
헤르세들은 잔뜩 흥분해서 색색의 마카롱을 구경했다.
디저트.
이안이 이걸 선물로 선택한 것은 헤르세의 입맛 때문이었다.
꽃의 꿀샘에서 분비되는 꿀이 주식이기 때문일까.
헤르세는 단것이라면 환장을 한다.
“자. 그럼 은인도 오셨으니 이제 성인식을 치러야겠습니다.”
오렌지색 마카롱을 챙긴 수장의 말에 헤르세들은 질서 정연히 움직였다.
각자 마음에 드는 마카롱을 챙겨 들고선.
다들 주홍색 헤르세 꽃 위에 앉아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정령과 달리 꽃 위에 앉을 수 없는 이안도 한편에 섰다.
그의 옆에는 녹스, 사냥개, 심지어 놀라우리만치 조용한 로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