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히히. 이제 나 말해도 되나?”
“웬일이래? 답지 않게.”
“나도 눈치는 있다. 남의 귀한 의식을 경망스럽게 망칠 순 없지.”
“저번 연회에선 잘만 궁둥이를 실룩거리더니.”
“그땐 그때고. ‘성인식’은 특별하니까. 저 작은 것들이 어엿한 헤르세가 되는 날이지 않으냐.”
웬일로 로르가 점잔을 떨었다.
한점 묻어난, 천년을 산 고대종의 품위.
그 기색을 낙낙하게 바라보던 수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하여 즐거운 날이지요. 어린 것들뿐 아니라 우리 일족 모두에게.”
“축하하네, 헤르세 수장.”
“감사합니다, 관리자님. 충분히 즐기시다 가길 바랍니다.”
수장이 꽃 모양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꽃잎 부분에서 발한 주홍빛이 호수를 메우자.
촤앗. 촤아아앗.
호수 여기저기에서 헤르세 꽃들이 솟아났다.
그런데 꽃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퍼석하게 마르거나, 끈적하거나, 심지어 악취가 나는 것도 있었다.
“우리 일족에게 제 몫을 한다는 건, 꽃을 돌볼 능력을 얻는다는 것을 말한다.”
수장이 근엄하게 말문을 열었다.
“꽃의 정기가 있어야 우리가 아침 이슬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니 ‘헤르세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일족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잊히지 않고, 소멸하지 않기 위해선.”
수장의 말이 길어질수록 호숫가에 선 어린 헤르세들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그러니 병든 헤르세를 복구해 능력을 증명하길 바란다.”
수장은 지팡이의 윗부분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성인식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이에 어린 헤르세들은 꽃잎을 타고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시원스레 움직이다 도착한 첫 번째 헤르세 꽃.
꽃은 퍼석퍼석 말라서 손만 대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상태였다.
메마른 꽃에 양손을 가져다 댄 헤르세들은 날개를 퍼덕거렸다.
은은한 하프의 선율.
포근하고 부드러운 공기에 녹여낸 마력이 병든 꽃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절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신묘한 광경이었다.
“오호…….”
그를 본 이안의 검푸른 동공이 짙게 빛나자 수장이 미소를 머금었다.
“퍽 성에 차시나 봅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평생의 디저트로도 갚지 못할 것 같군요.”
“값은, 오래도록 이어질 인연이 선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거면 된다는 듯.
수장은 집에 묻어둔 금송아지를 보듯 이안을 응시했다.
기대가 담긴 과한 눈빛.
기분이 좋아지는 한편 멋쩍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안은 그가 혹할 수 있는 주제로 얼른 말꼬리를 돌렸다.
“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저 헤르세가 수장님의 막내 손주라 들었습니다.”
“아직 철부지입니다.”
“그리 말하는 것치곤 수장님의 표정이 몹시 흡족한 것 같습니다.”
“허허허.”
“흡족하실만합니다. 가장 앞서가는 것이, 저들 중 가장 능력이 출중해 보이니 말입니다.”
“크흠. 내 자랑 같아 민망하지만 손주 녀석이…….”
사이사이 헛기침을 하며 수장은 손주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딜 가나 똑같다.
자기 핏줄이 제일 잘나 보이는 것은.
근엄함을 벗어던진 할아버지의 모습에 이안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버지와 칼브란이 겹쳐 보인 탓에 저도 모르게였다.
* * *
두 사람이 생각나서 찾은 에루리안의 네케시투도관.
‘네케시투도관’은 본관 뒤편에 자리한 통신실이다.
통신석을 통해 잠시간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
“여긴 언제나 사람이 없네.”
이안은 중얼거리며 한산한 내부를 둘러보았다.
오직 돌아다니는 건 통신지기 뿐이고, 교수든 학생이든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없는데 술식만 꽉 들어차서 눈이 다 아프다.]
통신실의 상아색 벽은 온갖 술식으로 빼곡했다.
글자인지, 수식인지, 그냥 그림인지 알아보지 못할 지경.
“술식이 기백이나 되니.”
이는 최상의 보안을 위한 것이었다.
황자가 기거하는 비밀 별장이니 오죽했을까.
상아색 벽을 훑으며 이안은 칸칸이 나누어진 개인실로 향했다.
그중 가장 끝머리 방.
사람 두 명이 들어가면 그만일 곳에서 이안은 통신석에 아메디스트를 넣었다.
츠즛. 츠즈즛.
미세한 잡음이 들리더니, 얼마 안 가 아버지의 모습이 통신석에 맺혔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과한 업무량에 치이시는 것이겠지.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내내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탓에 그 모습마저도 반가웠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괜찮아요.”
〔보름을 정양해야 하는 내상이라, 쉬이 낫지 않을 터인데.〕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치료제 덕분에 금방 나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근데 칼브란은요? 아버지 옆에 붕어 똥처럼 붙어있더니 안 보이네요.”
〔잠깐 발리올 가주를 만나러 갔다.〕
“없는 틈에 연락이 됐으니 나중에 칼브란이 난리 치겠네요. 저 빼고 연락했다고.”
〔껄껄. 그 인사가 또 칼춤 한번 추겠구나.〕
“하하핫. 그거 볼만하겠는데요.”
〔저번에도 너 아픈단 소식을 듣고, 기어이 에루리안으로 가서 천막치고 살겠다는 걸 말리느라 내 얼마나 애먹었는데.〕
“저한테도 엄포를 놓더라고요. ‘도련님 골골’의 ‘골’자만 들려도 당장 쫓아오겠다고.”
〔하여간 창아리 없는 작자 같으니.〕
아버지의 퉁명스러운 어조에는 웃음이 배어 있었다.
칼브란이 어떻게 행동할지 눈에 선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리라.
잘게 떨리는 말꼬리 따라, 통신석 아래에 박힌 모래시계가 짧게 두어 번 깜빡거렸다.
절 좀 보라는 신호에 이안은 모래시계를 흘깃 보았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어가는지 모래가 전부 밑으로 빠진 상태였다.
“아버지, 이만 인사드려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참 빨리도 가는구나.〕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안의 인사 끝에, 가주가 잠시 멈칫하다가 이안을 나직하게 불렀다.
〔……이안.〕
“예?”
〔어떤 일이든 혼자 끙끙 앓지 말거라. 아픈 데가 있으면 바로바로 연통하고.〕
“염려 마세요.”
이안의 대꾸가 끝나자 통신석은 단박에 불투명해졌다.
효력이 다한 것이다.
“하아. 삼백 골이나 들였는데 겨우 5분이라니.”
단거리도 아니고 원거리 수신이라 사용 비용이 꽤 비쌌다.
거리에 따른 가격 산출.
시간에 따른 누진제 적용.
이로 인해 통신석은 금화 잡아먹는 하마라고 불린다.
그래서 평상시엔 시도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충동적으로 저질렀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버지의 시체를 붙잡고 애타게 부른들 어떤 답도 듣지 못했던 그때랑 달라서.
식어버린 숨만 돌아오지 않아서.
‘아버지.’라고 부르면 답이 되어 돌아와서 마냥 좋았다.
“그러니 삼백 골은 푼돈이지.”
금화보다 가치가 더 높은 것에 썼으니 만족스러웠다.
마음의 포만감만큼,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나니 기운도 마구 솟구쳤다.
더욱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도 활활 타올랐고.
‘곧 파라칸시스 시합이라…… 지금까지 했던 대로만 해선 안 될 것 같은데.’
그가 최종 목표로 삼았던 파라칸시스가 대략 한 달 정도 남았다.
우승을 위해 최선의 최선을 다해야 할 때이지 않은가.
그를 위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이안은 방으로 돌아온 뒤 녹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녹스, 때가 되면 가르쳐주겠다고 했던 새로운 수련법 말이야.”
“새로운 수련법?”
“어. 불의 가시를 얻기 전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던 거, 지금 가르쳐줘.”
“지금? 허어어. 레브 그 아이가 몹시 잘해 낸 치유가 문제구나. 여즉 골골대야 할 녀석이 걸어 다니니 제 상태를 모르지.”
“이 정도는 괜찮아.”
“괜찮긴, 개뿔.”
녹스가 팔짱을 끼며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단 의사를 표했다.
녀석의 만만찮은 똥고집을 알기에 이안은 아주 살짝 조급해졌다.
결계 변형 사건을 겪으며 더 강해져야겠다고 마음먹은 터라 더욱 그랬다.
‘비장의 수를 써야겠다.’
아직 이안에게는 녹스를 설득할 열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었다.
그중 으뜸으로 꼽을 건 역시.
“스승님-.”
“왜, 또?”
“‘아가씨는 왜 시종들의 셔츠를 뜯었나’ 3권!”
“3, 3권?!”
“새로운 수련법을 알려주면 이번 주 안에 구해다 드리지요.”
“…….”
녹스가 대꾸하지 않는다고 못 알아챌까.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알과 벌름대는 코, 삭삭 비벼대는 앞발.
이미 녀석은 미끼를 문 물고기에 불과했다.
구미가 당긴다는 눈빛과 짜증이 뒤섞인 표정, 여실히 드러난 갈등을 등에 지곤 녹스가 이안을 째려보았다.
“하여튼 저놈의 간사한 혓바닥.”
“요게 있어 스승님의 빨간 책을 구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알았다, 알았어. 내 어쩔 수 없지.”
입을 삐죽 내민 녹스는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뒤통수가 구린지 뭐라 뭐라 꿍얼거리긴 했다.
‘제자 놈이 폭풍 성장 좀 해보겠다는데 내 그걸 어찌 막누.’
‘결코, 난 저놈의 세치 혀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다.’
‘고 빨간 책이 아른거려서 그런 것도 아니고, 딱 지금이 적기라서다. 다음 수련을 할 적기.’
이안 저것이 불의 가시를 얻으면 불의 원소를 다루게 될 테니까.
“아암. 그렇고말고.”
자기 합리화를 실컷 하더니 녹스가 근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일단 바람 구슬을 네 개만 만들어 보거라.”
“네 개?”
“일단 네 개다. 4대 원소를 뜻하는 것이지.”
“오.”
“현잰 바람뿐이지만, 나중엔 이것들을 각기 다른 원소들로 채워야 할 터. 여튼 구슬에 들어갈 마력량을 각기 다르게 해봐라.”
“다르게.”
이안은 심호흡을 하고선 손바닥에 바람 구슬을 만들어냈다.
그런 뒤 성실하게 녹스의 가르침대로 마력량을 달리했다.
어떤 구슬은 가득 차게, 어떤 것은 1할쯤으로, 어떤 것은 5할쯤으로.
어느 것도 같지 않자 희한한 현상이 일어났다.
구슬 속 마력량이 같아지려고 제멋대로 날뛰며 반동이 생겨났다.
“이거 묘하네.”
꿈틀꿈틀 구슬 속 마력이 요동치는 게 눈에 확연히 보였다.
그것을 누르며 통제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듯 녹스가 뒷짐을 지고서 설명을 덧붙였다.
“구슬의 상태를 그대로, 오래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수련의 난도가 갑자기 확 올라갔는데?”
“그래도 많이 헤매진 않을 거다. 그간의 수련이 이때를 위해서였으니까.”
“우리 스승님, 다 계획이 있으셨네.”
“에헴. 구슬의 상태를 최소 한 시간 이상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네 그 하찮은 통제력이 에르그 1성은 되겠지.”
“한 시간 유지에 에르그 1성?”
“왜 생각보다 하찮아서 놀랐니?”
“아닙니다, 스승님. 에르그인데 하찮다니요.”
“됐고. 그게 가능해지면, 그땐 양손에 구슬을 만들 것이다.”
막상 무언가를 가르치자 녹스는 열성적인 스승이 되었다.
“노상 하는 얘기지만 네놈한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통제력’임을 명심해라.”
“4대 원소를 다뤄야 하니까?”
“뻔한 추임새를 넣긴. 마력핵에 자리한 각기 다른 원소를 통제하지 못하면 네놈의 몸은 ‘펑’ 터져버릴 것인즉.”
그런 불상사 없이 4대 원소를 다뤄야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 지금의 수련은 필수였다.
필수긴 하나, 녹스는 마력을 운용하는 이안의 상태를 찰나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상태론 자칫 무리하다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안 네놈은 알아야 한다. 네가 가진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지만 두려움에 움츠러들면 가질 수가 없잖아.”
“겁먹으란 것이 아니라 경계하란 것이다.”
“예에. 스승님.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커흠. 제자가 이리 의욕이 넘치니 그럼 나도…….”
주절거린 녹스는 빨간 책을 사뿐히 꺼내 들었다.
신간인 3권을 읽기 전에 복습은 필수였다.
이 또한 앞날을 위해 차근히 길을 닦는 일종의 수련인 셈.
녹스는 검지에다 찰지게 침을 묻혀 책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푸흘흘. 수련은 언제든 몹시도 즐겁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