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새벽 수련을 끝낸 이안은 거울 앞에 섰다.
헤르세 수장이 한 말 중 유독 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은인의 동공이……. 언뜻 보면 루하흐라 착각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본디 새까맣던 동공이 갈수록 청색 끼가 많아지고 있었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수장의 증언으로 지금은 확실해졌다.
‘어째 내 눈은 이래저래 풍파가 많네.’
본연의 색이 뒤섞이고 있는 지금도, 눈알이 뽑혔던 지난 생에도.
이안이 계속 왼쪽 눈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딴죽을 걸고 싶은가 보다.
“청춘이구나, 청춘이야.”
어제의 멋짐을 져버린 녹스가 책상에 엎드려 꾸물거렸다.
통실통실한 배를 밀고 있는 애벌레 한 마리.
“또 헛소리한다.”
“소년이 외양을 가꾸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지. 첫사랑이 생겼을 때.”
“사랑 타령하는 걸 보니 우리 스승님 외로우신가 보다. 왈라우 족이라도 소개해 드릴까요?”
“캬아아악! 어딜 그런 흉악한 캥거루와 위대한 날.”
“그런 소리 듣기 싫으시면 먼저 도발하지 말든가.”
“헹! 청춘이 아니면, 자기애가 심한 게로군. 몇 달 전에도 자꾸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았느냐.”
“아. 그땐 익숙지 않아서.”
“뭐가 말이냐?”
“내 동공에 아무 표식이 없는 게.”
“표식?”
“어. 한때 ‘라트비아의 서’가 새겨져 있었거든. 물론 예전이긴 하지만.”
“뭐? 라트비아의 서어어어엇?!”
애벌레 놀이를 단박에 집어 던진 녹스가 소리를 꽥 질렀다.
얼마나 놀란 건지.
경악이 담긴 목소리가 몇 갈래로 갈라진 채였다.
* * *
이안이 잠깐 외출한 사이.
“끄응.”
녹스는 전에 없이 우글쭈글한 기색으로 끙끙거렸다.
세상만사 시름은 혼자 다 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궁상떠는 녹스가 목구멍에 걸려서 로르는 굼실굼실 다가가 궁둥이를 붙였다.
“웬일로 이안을 안 따라가고?”
“놀아줄 기분 아니다. 말 붙이지 마라.”
“하여튼 수호자 넌, 쓸데없이 심각하다. 뭣 때문에 그래?”
“그걸 몰라 물어? 관리자 너도 이안 말 들었으면서.”
“아아, 라트비아의 서.”
“이놈 보게. ‘아아, 라트비아의 서’, 그렇게 심드렁할 일이 아니라고.”
“그럼 심드렁하지 않을 이유는 뭔데?”
“라트비아라고. 진짜 몰라? ‘시간의 정령’ 라트비아.”
침을 마구 튀기는 녹스의 흥분에 로르는 차분히 대꾸했다.
“나도 알지.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정령이잖아.”
“그래. 전무후무 개체가 하나뿐인 정령.”
“그래서 그렇게 심각하셨다?”
로르는 검은 소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꼬리의 움직임도 그렇고, 왠지 시종 경쾌하던 평소와는 무게감이 달랐다.
그렇다고 마냥 무겁지만도 않았다.
“흠. 좋아. 수호자 네가 심각하니 제대로 따져보자. 이 문제에 관해.”
“난 아까부터 진지했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흥분하지 말고. 여기서 중요한 건 두 가지다.”
“두 가지?”
“우선 하나, 라트비아의 서는 하나밖에 없다. 정령서를 만들고 라트비아가 소멸했으니까.”
“그랬지. 재미있는 녀석이었는데.”
“좋은 녀석이었어. 나랑 밤새 춤을 춰줄 줄 아는.”
“관리자 네놈의 치덕거림을 받아준 유일한……. 아, 샛길로 새지 말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또 다른 하나. 라트비아가 소멸할 걸 알면서 바다 엘프의 수장은 그걸 만들라고 했다.”
조곤조곤한 로르의 설명을 들으며 녹스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열이 올랐을 땐 머리가 안 돌아갔는데…….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여신의 대리자였던 그 수장은 왜 그랬을꼬?”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다. 그는 라트비아와 무척이나 가까웠다. 수호자 너도 알지 않느냐?”
“그러했지. 그랬던 놈이 정령의 소멸을 감수하면서까지 정령의 서를 만들었다면…….”
“필시 감춰진 내막이 있을 게다.”
“흐음. 감춰진 내막이라…….”
해답이 나오긴커녕 뭔가 되레 꼬여버린 것 같았다.
짧은 팔로 턱을 쓸며 한참을 고민해도 마찬가지.
녹스는 노란 앞발을 살살 비비며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실은 말이야. 내가 이안의 말을 듣고 고민한 이유가 따로 있다.”
“뭔데?”
“이안과 결속을 맺고 나서 알게 된 게 있지. 내가 모르는 정보들이 있다는 거.”
“모르는 정보? 지혜의 샘이라 칭해지는 수호자 네가 모르는?”
“그렇다니까. 본래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내 지식은 계승되니까.”
계승된다.
아주 간단한 말이지만 이보다 절묘한 설명도 없다.
지식은 알에서 알로 전해지니까.
그리고 지식은 알을 얻으러 온 황태자에 의해 추가되면서 ‘완성’이 된다.
완성된다, 이 말을 더 보강해보자면.
황태자는 말로의 탑에 올 때 ‘계승의 서’라는 것을 들고 온다.
계승의 서.
현 황제와 황실, 그리고 제국에 관한 시시콜콜이 전부 담긴 역사서이다.
현 황후의 신체 어디에 점이 있다던가.
넷째 황자가 열 살 때까지 글을 못 읽었다던가.
11대 살리카 가주가 황후와 함께 그라나토스에 방문했다던가 하는 내용이 적힌.
역사서를 통해 수호자는 본디의 지식에, 혹여 누락 되었을 새로운 정보를 덧대게 되는 것이다.
강박적으로 행해지던 의식.
역사서에 대해 떠올린 녹스는 짜증 나서 앞발을 쾅쾅 굴렸다.
어떤 정보가 이전 알들에게서 누락 되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계승의 서에라도 있어야 한다.
한데…….
“에잇. 염병할 계승의 서.”
“왜 갑자기 승질이야?”
“벌써 200년쯤 되었다. 내게 계승의 서가 전해지지 않은 것이.”
“황태자가, 아니, 황가에서 까먹었다고?”
“잊은 건지, 그럴 필요를 못 느낀 건지.”
“흠. 그래서 수호자 네가 심각했구나.”
“하. 이 내가 아무것도 모르다니. 시간의 서가 언제 뷔트시겐에 넘어갔는지, 왜 하필 이안 눈에 새겨졌던 것인지, 이런 것들을.”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주일 내내 이에 대해서만 읊어도 모자랄 정도로.
하지만 한탄을 짧게 끝낸 녹스는 이 대화의 핵심에 집중했다.
“누락 된 것에 ‘감춰진 내막’의 일부가 있는 게 분명한데…….”
“흐음.”
“영양가 없는 추임새 그만 넣고. 혹, 그것에 대해 더 할 말이 있거든 말해봐라.”
“내가 알 도리가 있나.”
“야, 머리 좀 굴려봐.”
“흠. 시간을 돌려야 하는 중대한 일이 있었다?”
“하나 마나 한 얘기는 하지 말고.”
“짜증은.”
“다 됐고. 네놈에게 하나 묻자.”
“뭔데?”
“근 15년 사이에 말이다. 대기의 뒤틀림 같은 어떤 징조를 느낀 적 있어?”
“아아. 이안의 생을 기준으로 말하는 거지? 그사이 뭔가 큰일이 있었는지.”
“응.”
녹스가 ‘내게 답을 줘.’라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한데 안타깝게도 되돌아온 답은.
“없었다.”
“없었다고?”
“응. 진짜 아무 일도.”
“희한하네. 로르 네놈도 들었지? 이안이 라트비아의 서가 ‘있었다.’라고 얘기한 거.”
“들었지. 근데 지금은 눈동자에 흔적도 없잖아.”
“그러니까 말이다. 사라졌다는 건 정령서를 사용했다는 건데.”
“잘 생각해 봐라, 수호자. 라트비아의 서, 아니 ‘시간의 서’를 사용한 대가가 뭔지.”
“‘목숨.’, 그래서 ‘서’를 사용한 자는 반드시 죽지.”
그렇다면 시간의 서를 사용했다는 것, 그 전제 자체가 틀린 것이 된다.
이안은 몹시, 말짱했으니까.
도통 의문이 풀리지 않아 녹스는 신경질적으로 앞발을 잡아당겼다.
바다 엘프의 수장은 왜 시간의 서를 만들었을까.
왜 그것이 뷔트시겐으로 넘어갔을까.
그것은 또 왜, 이안에게 새겨졌으며 갑자기 표식이 사라진 연유는 무엇일까.
녹스가 고민할수록 수난당한 앞발이 빨간색으로 변해갔다.
물렁물렁한 제 살만 괴롭히는 꼴.
그렇다고 해답이 ‘짜란’하고 나타날 것도 아니지 않던가.
심각한 녹스를 가만히 보던 로르가 돌연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수수께끼가 있는 걸 알았으니 됐다. 이제 놀러 나가자.”
“지금 이 판국에?”
“땅 파고 있은들, 답이 나와? 콧바람 쐬다 보면 뭔가가 떠오르겠지.”
“속없는 놈.”
“하늘 좀 봐라. 나가서 놀기에 딱 좋은 날씨다. 아아주 청명해.”
“에휴. 나도 이안처럼 처어어엉명한 날을 싫어하는데.”
“그럼 우박이라도 쏟아지게 할까?”
“날을 어찌 바꾸려고? 무지개 정령도 아니면서.”
“히히. 자알?”
넉살 떠는 로르 때문에 녹스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
멍청한 소를 통해 뭔가를 알아채긴 싫지만, 녀석의 말이 옳다.
고민해봐야 뭘 알아낼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선 시간을 두고 조사해봐야겠다.’
결론을 내린 녹스는 파닥파닥 날아 검은 소의 등에 올라탔다.
턱을 올린 거만한 자세.
“그래. 이번만 네놈의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놀러 가자.”
“쪼아. 일단 아르테리아로 가자.”
* * *
한편.
외출한 이안은 레브와 함께 도서관에 들렀다.
일전에 사서가 녀석을 데려오라고 한 적이 있어서였다.
그냥 얼굴이나 보려는 건 줄 알았는데…….
“본격적으로 나만 따 시킬 줄을 몰랐네.”
이안은 창가에 앉아 도서관 후미진 곳에 시선을 두었다.
볕도 안 드는 곳에서 사서와 레브가 속닥거리며 저들끼리 놀고 있었다.
따 시키는 것만큼 나쁜 건 없다는데.
치사하게.
이안의 시선이 끝나는 곳에서 사서는 녹색 발굽을 굴렸다.
재미있었다.
영악한 이안이 이곳의 대화를 궁금해하는 모습이 말이다.
“후훗. 이안이 궁금해 죽으려고 하네.”
“쟤, 오늘 잠은 다 잤네요. 본인이 모르는 뭔가가 생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병이야, 불치병.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면 미치는 거.”
“잘 아시네요. 이안에 대해.”
“오래 알았으니까. 꼬맹이 네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오래.”
사서는 의뭉을 떨었다.
이안의 ‘비밀’을 알고 있었지만 발설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녀를 사서로 임명한 자와 맺은 맹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절대 비밀 엄수.
소리로든 글자로든, 어떤 수단으로든 절대 발설하지 말 것.
제약이 걸린지라 이에 대해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환기하듯 재차 발굽을 굴린 사서는 오늘 만남의 서두를 꺼냈다.
레브를 보려고 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아무튼. 레브…… 아니지, 시온 루하흐.”
“……역시 평범한 도서관 사서는 아니었네요.”
“이안이 너에 대해 말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녀석이 그럴 리 없죠, 절대.”
“믿음이 확고하네.”
“이안이니까요. 그리고 믿으니까요.”
“그러다 뒤통수 맞을 수도 있지 않아? 이미 전적도 있잖아.”
“‘그럼에도’죠. 믿지 못하면 결국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거니까.”
레브의 서늘한 눈길을 사서는 말끄러미 응시했다.
많은 것들이 녹아있는 푸른 동공.
이 녀석이나 이안이나 참 아이답지 않다.
아마 그들의 환경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으리라.
슬그머니 이안 쪽을 한번 본 사서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
“확인이요?”
“이안에 대한 너의 생각과 마음을. 내 용건을 꼬맹이 네게 꺼내기 전에 말이야.”
“…….”
“그럴 필요가 있는 일이거든.”
사서는 말을 더 빙빙 돌리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근데 확인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네. 네가 말하는 걸 보니.”
“…….”
“자. 시온 루하흐, 이걸 네게 줄게. 이것의 주인은 너니까.”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와인색 상자.
맨드라미 산호 상자를 내려다본 레브가 의문을 담아 물었다.
“이게 뭔데요?”
“일단 열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