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이안과 헤르세와의 맹약.
이 소식이 서신을 통해 아이루스 상단주에게 전해진 다음 날.
[매번 놀랍다. 네놈 계획에 진심을 섞어 사람을 현혹할 때마다.]
이죽거리는 녹스가 뭐라든 이안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제 매력 아니겠습니까, 스승님.”
[헹. ‘그간 조용히 사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라니. 아주 같잖아선. 네놈이 헤르세한테 들인 공이 얼만데 남에게 줄 리가.]
“누가 먹이를 준다고 바로 달려드는 건 하수가 하는 짓입니다.”
[그렇다 치고. 그때부터지?]
“그때?”
[헤르세에게 아침 이슬 얻어오기란 수업 과제를 받았을 때 말이다.]
“아아.”
[그때부터 이날을 위해 계획을 짠 게냐?]
“설마 제가 그 정도로 치밀하겠습니까. 여신도 아닌 한낱 인간이.”
[씨알도 안 먹힐 소릴.]
녹스는 이안이 뭐라든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에 이안은 그저 웃고 말았다.
더는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으나 그도 예상 못 한 게 있긴 했다.
상단주가 맹약을 끊으려 한다는 거.
헤르세 수장이 인간과 교류를 맺으려 한다는 거.
이 두 가지는 전혀 몰랐으나 오히려 예상보다 결과가 좋았다.
그럼 된 거지.
이안은 눈꼬리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최상의 패를 얻었네.”
결과가 좋으니 당연하게도 기분이 부드러워졌다.
덩달아 휘는 눈꼬리에 하현달이 휘영청 걸리며 진한 여운을 남겼다.
그 여운을 이안이 온전하게 만끽하기도 전.
“이안 도련님, 그간 더 훤칠해지신 것 같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누그름한 공간을 갈랐다.
고개를 틀어 소리 나는 창가 쪽을 보니…… 이곳에서 볼 리 없는 인물이 거기 있었다.
상단주 말이다.
그간의 골칫거리가 해결돼서 기뻤기 때문일까.
서신을 보낸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몰래 찾아왔다.
이목을 끌어 좋을 거 없다고 야밤에.
“이런.”
이안은 흘낏 어둑한 밤을 타는 상단주에게 시선을 두었다.
덤덤한 그의 시선에 상단주가 창문을 넘느라 굽은 몸을 펴며 주절거렸다.
“‘이런’이라니. 어쩐지 도련님이 절 반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달밤 아래 미인이 날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시커먼 남자가 내 방 창문을 넘는 건 좀 별로군.”
“크하하하핫.”
뭐가 그리 좋은지 상단주는 화통하게 폭소를 터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갖은 고생을 해선지 예민했던 상단주였다.
그랬는데, 본래의 자리를 찾고 나니 본래의 성정 또한 찾은 듯싶었다.
“박대하지 마십시오. 이곳에 몰래 오려고 제가 아주 생지랄을 떨며…….”
상단주가 경망스럽게 나불거렸다.
마치 어제 만났다가 헤어진 것 같다.
서먹함도 없이 어찌나 수다를 맛깔나게 떨어대던지.
상단주의 장단에 맞춰 사담을 떨다 보니 수십 분은 훌쩍 지나갔다.
“크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 상단주가 슬쩍 헛기침을 흘렸다.
뭔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것 같았다.
상단주는 이안이 준비한 홍차를 홀짝이며 뜨뜻한 양손을 감질나게 비볐다.
이제부터가 본론의 서장이라는 것처럼.
“실은 제가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짐을 덜어서?”
“예. 맞습니다. 맹약을 끊으면 목숨줄을 보장받을 테니까요. 저뿐 아니라 제 딸아이까지.”
“축하하네.”
“인사는 넙죽 받겠습니다. 억만금보다 소중한 자식의 목숨을 살렸단 증명이니.”
상단주의 입꼬리가 정수리에 붙어 팔랑거렸다.
그럴 만했다.
상단주가 겪었던 풍파들을 적어도 그의 자식이 겪진 않을 테니까.
물론 거상의 후계자라 거기서 오는 풍파는 있겠지만.
‘큰 시름은 던 셈이지.’란 생각을 하며 이안은 상단주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상단주의 눈빛에는 할 말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실은, 창문을 넘어왔을 때부터 그런 기미가 슬쩍슬쩍 엿보였었다.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지.
더는 뜸을 들일 필요 없다는 판단이 들어 이안은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상단주가 내게 할 말이 있어 온 것 같군.”
“하여간 도련님 눈치는 황새가 가랑이를 벌리는 것만큼 빠릅니다.”
여태 헐렁하던 상단주의 얼굴이 한껏 조여졌다.
이문 밝은 상인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무척 신실해 보이기도 했다.
당장 금화를 털어서 줘야 할 것 같은?
상황 따라 알맞게 갈아 끼우는 안색에 이안은 ‘역시’란 생각을 했다.
상인은 상인이었다.
하긴.
히에로스 제일가는 거상, 그런 칭호가 단순히 헤르세가 주는 것에 기대서만 얻었으랴.
“실은 도련님께 한 가지 부탁을 하려 합니다. 아이루스의 상단주로서.”
“부탁이라.”
“맹약을 끊은 마당에 염치없지만…… 딸린 식구들이 걱정돼서 말입니다.”
“이슬의 유통이 끊기면 상단의 규모가 그만큼 축소될 터이니.”
“예. 그리되면 인원을 감축해야 하는데…….”
그러기 싫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일자리를 잃는다는 건 생사와 직결되는 것이기에.
“부탁, 아니, 간절하게 청을 하려 합니다.”
“서두가 길어서야 쓰나. 본론을 말해보게.”
“아침 이슬 말입니다. 그것을 제가 유통하고 싶습니다.”
“흐음?”
“도련님께서 절대, 손해 보지는 않으실 겁니다.”
“자신하는군.”
“제가 그리 만들 테니까요. 반드시!”
“글쎄. 예측불허인 생을 어찌 예측한다고.”
“거 참. 왜 뜸을 들이십니까? 어차피 절 선택하실 거면서.”
“애달프게 하려고?”
“제가 애달퍼서 뭐하겠습니까. 달밤의 미인도 아닌 것을요.”
상단주의 능청에 이안의 무표정은 무너져버렸다.
본래부터 유통망으로는 아이루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침 이슬을 판매하지 못해 상단의 입지가 줄어들어선 좋을 게 없으니까.
제국 곳곳의 분점이 줄어든다?
그리되면 깔아 놓은 정보원들 또한 거둬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상단이 지금처럼 잘나가야만 한다.
이안은 거침없이 상단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상단주.”
“저야 말로요.”
* * *
하루라도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모양이다.
상단주는 준비하고 있었던 양 쉴 틈 없이 동업 계약을 밀어붙였다.
그로 인해 헤르세 건은 며칠 안 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끝머리에 다시 찾은 네케시투도관.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도련님.〕
“나야 늘 똑같지. 자네는? 몸은 괜찮고?”
이안은 통신석에 투영된 노파를 유심히 보았다.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는 육십 줄의 노파.
그녀는 이안이 익히 아는 자였다.
인간 경매를 하려고 아이들을 납치했던 전 단주, 그 여자에게 폭행당했던 노인이니 그럴밖에.
노파는 이안의 염려에 나긋한 어조로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보내주신 치유사 덕분에 말끔히 나았지요.〕
“다행이군.”
〔아. 보고드릴 게 있어 연락을 드렸는데, 괜한 심려만 드린 것 같습니다.〕
“자네니까 심려도 하는 거지.”
기분 좋은 말이었다.
이에 노파, 아니, 단주는 웃음이 묻은 말투를 흘렸다.
〔아, 도련님. 아침 이슬을 상단 쪽으로 연결하는 중간책을 제가 맡았습니다.〕
“자네 같이 충심 있는 자가 관리자라니 믿음이 가는군.”
〔도련님의 성에 차도록 언제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주는 시종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단순히 중간책이라고 하기엔 다소 과한 면이 있었다.
공손히 양손을 모은 자세는 그의 시중을 드는 측근 같은 면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덤덤한 만큼 단주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말만 찬찬히 내뱉었다.
〔그리고 판매 수익금은 ‘스프리전’이 운영하는 은행에 맡기려 합니다.〕
“흠. 스프리전이라면 보물을 지키는 정령이니 보안이 확실하지.”
〔예.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나, 고블린이 운영하는 곳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해야겠군.”
〔수도에 있는 ‘위대한 콘월 형제의 12번지’라는 곳에…….〕
이후 두 사람은 금화를 맡길 곳에 대해 한참 얘기를 나눴다.
아침 이슬의 판매 수익은 오롯하게 이안의 개인 자금이었다.
즉, 가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돈이란 것이다.
훗날 이안이 제국을 돌아다닐 때 유용하게 쓰일 비자금인 셈.
그러니 어찌 허투루 할까.
꼼꼼히 따져보고 이것저것 재며 신중에 신중을 더했다.
목구멍이 마르도록 많은 대화를 나눈 뒤.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뷔트시겐에 도움을 청하게.”
몇 마디 말을 끝으로 통신석에 비친 단주의 형상이 차츰 흐려졌다.
연결이 끊기며 곧 침묵이 찾아왔다.
* * *
통신실의 출구로 향하는 내내였다.
[흐으음.]
녹스가 짧은 팔을 단단히 꼰 채 이맛살을 잘게 찌푸렸다.
뭔가 성에 차지 않는 눈치.
금화가 생기면 야설을 더 많이 살 수 있다고 좋아하던 게 엊그젠데, 왜 저러는 걸까?
의구심이 생긴 이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뭐 맘에 안 드는 거라도 있어? 일도 잘 풀렸는데.”
[아, 상단 문제는 아니다. 네놈이 부자면 내가 부자인 것과 다름없으니.]
“오오. 네 것은 네 거? 내 것도 네 거?”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푸흡. 곧 졸부 되실 분이 뭣 때문에 찌그러진 감자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실까?”
[찌그러진…….]
녹스가 쌀알 같은 송곳니를 드러냈다.
원체 귀여움에 집착하는 녀석이라 저런 반응을 보이나 했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아르릉 거리는 송곳니는 날카로운 데에 비해 그를 응시하는 눈길은 왠지 묘했으니까.
[찌그러짐에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유?”
[네놈 때문이지. 너 말고 내가 안녕하지 못할 이유가 또 있더냐?]
“하하. 그래서 뭐가 문젠데?”
[지금 네놈이 하는 수련 말이다.]
“구슬에 넣는 마력량을 달리하는 거?”
[어, 그거.]
“잘 되고 있는데 왜?”
[흠. 일단 잔말 말고 구슬 네 개를 만들어보아라.]
녹스의 난데없는 요구에도 이안은 군말 없이 구슬 네 개를 구현해냈다.
시키는 것만 했을까.
하나를 알려주면 나머지 아홉을 깨치는 제자가, 저인 것을.
이안은 과하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쪼갠 후.
후우웅.
오른손에 각기 다른 마력량을 가진 구슬을 당당하게 만들어냈다.
뿐이랴.
녹스 보란 듯이 왼손에도 똑같이 구현해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해냈는데…….
[…….]
웬일인지 녹스의 표정이 좀 전보다 더 굳어졌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을 본 얼굴이었다.
뭣 때문에 그러나 싶어 이안이 가만히 바라보자, 녹스가 한숨을 길게 빼물었다.
[에효효효.]
저러다 땅 꺼질라.
녹스의 시커먼 낯짝에 이안은 구슬을 꺼트리며 되물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네놈이 잘나서 문제다.]
……제자가 너무 능수능란했다.
수련한지 일주밖에 안 된 녀석이 벌써 양손까지 이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만 그쳤을까.
각각의 마력량에 계속 변주를 주기까지 했다.
‘허어. 벌써 저렇게 자유자재라니.’
녹스는 절로 나오는 한탄을 어쩌지 못하고 눈가를 찌그러트렸다.
기실 구슬에 변주를 주기까지 황태자도 꼬박 ‘석 달’이 걸렸다.
석 달.
그것도 황태자이기에 그럴 수 있던 건데, 이안은 그마저도 확 단축해버렸다.
고작 일주일 만에 해냈으니 말이다.
천재니, 괴물이니 하는 그런 수준을 한참 전에 넘어선 것이다.
‘이를 어쩐다.’
제자의 자질이 특출나서 고민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녹스의 구겨진 인상이 펴질 줄을 모르자, 이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하면 좋은 거지 뭔 고민을 그렇게 한대?”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면?”
[이제부터 네놈의 성장은 정체될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