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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88화 (88/214)

제88화

이 무슨 날벼락인지.

이안은 난데없는 사형 선고에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지금만 봐도 그렇지 않으냐. 네놈은 그라나토스에조차 쉬이 마력을 엮어내지.]

“…….”

[어느 곳보다 마력의 밀도가 짙은 숲의 북쪽에서조차.]

“그런데……?”

[넌 이 밀도에 이미 적응을 해버렸고. 수련 장소를 바꾸재도 제국 어디든 이곳보다 밀도가 짙은 곳은 없고, ]

“그래서 정체될 수밖에 없다?”

[어찌할 수 없는 수순이란 거지.]

녹스는 앞발을 초조한 듯 연신 비볐다.

강해지는 것에 집착하는 이안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만약 이 사태가 지속된다면?

독극물, 아니, 겨우 관심을 끊은 탑의 상층 입구를 녀석이 다시 기웃거릴지도 모른다.

그런 무모한 짓은 용납할 수 없었다.

가르치는 자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에휴.]

저놈이 사고 치기 전에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녹스의 골몰에 이안 또한 말없이 골몰했다.

돌파구를 당장 마련해 봐야 하니까.

곧 있으면 파라칸시스 시합인데 이 상태로 정체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지?’

한시라도 빨리 해결책이 필요해서 생각에 깊이 빠져있느라 앞을 보지 못했다.

그 덕에 기척 없이 다가온 누군가와 제대로 부딪힐 뻔했다.

은색 튜닉에 턱 끝까지 둘둘 감은 스톨 형식의 스카프.

손 외에는 온몸을 꽁꽁 싸맨 수도사 차림에 밀랍 같은 무표정의 얼굴.

네케시투도관을 관리하는 호문쿨루스였다.

“……아.”

“실례했습니다.”

딱딱하게 멀어지는 호문쿨루스를 이안의 시선이 뒤따라갔다.

[이 와중에도 청춘일세. 그저 예쁜 것만 보면 넋을 놓을 나이긴 하지.]

그걸 본 녹스가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상태가 멜랑꼴리한 녀석이 뭐라 하든 이안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녹스, 중앙 아카데미에도 이 정도 규모의 통신실은 없지?

[없지. 사실 이 정도 시설이 변방의 아카데미에 있는 게 우습다.]

-거기다 관리자로 호문쿨루스까지.

[황실이나 4대 가문에서만 고용하는 것인데.]

-그러게. 왜 이걸 까먹고 있었지. 너무나 익숙하다 보니.

[당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녹스가 제대로 쉽게 말해보란 눈빛을 쏘았다.

이번 역시 이안은 녀석이 뭐라 하든 호문쿨루스만 뚫어지게 보았다.

호문쿨루스는 고용비용이 꽤나 비싸다.

한 달에 금화 오천 개.

이로 인해 웬만한 곳에서는 호문쿨루스를 사용하지 못한다.

“등신이 될 뻔했네. 있는 것도 못 주워 먹는.”

뜻 모를 소리를 한 이안은 네케시투도관을 벗어났다.

웬일로 서두는 걸음에 호기심이 동한 녹스가 바싹 붙었다.

[대체 뭔데?]

“돌파구가 생긴 것 같아.”

[응? 벌써?]

“어. 스승님의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있지.”

[호오? 그런 곳이?]

에루리안에는 있다.

황실의 비밀 별장이었던 이곳에는 완벽한 장소가 있다.

여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을 뿐이지.

“일단 따라와 봐.”

* * *

이안은 종탑 입구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뾰족한 첨탑의 형태.

얼핏 보기에는 여느 건물과 별반 다를 거 없어 보였다.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은색 종이 바람에도 미동이 없는 것만 빼면.

종탑은 어딘가 모르게 으스스했다.

[여기라고? 네놈이 말한 장소가?]

“어.”

[‘유령 들린 종탑’이라고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이곳이?]

“이보다 완벽한 장소는 없을걸?”

자신만만한 이안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녹스는 종탑을 뚫어지게 보았다.

어쩐지.

에루리안에 첫발을 디뎠을 때부터 줄곧 이곳이 눈에 걸렸었다.

그럴 수밖에.

종을 중심으로 무수한 정령서들이 뻗어있는 게 어디 평범한 모습이던가.

대충 봐도 심상치 않았다.

수십의 정령서를 둘러싸고 수천의 술식이 얽혀 있는 것이 말이다.

커다란 고목에 잔 나무뿌리가 빽빽이 엉킨 것 같은 모양새.

저러니 종이 움직일 리 없지.

[그래서 저주다, 유령이다 말들이 많았던 게로군. 종이 고정되어 있으니.]

“술식이 엄청 빼곡하게 박혀있긴 하네.”

오죽 많으면 먹구름이 뭉친 것처럼 보일까.

“예전에 재학생 수십이 저걸 움직여보려고 했다가 실패했다더니만.”

[아마 말 수백 필로도 안 될 게다.]

“아, 그래?”

이안이 눈알을 굴려 재차 종탑을 훑자, 녹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런 물건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

저 정도까지 정성을 들였다는 건 필시 뭔가를 보호하려는 목적이다.

한데 잘못 건드리거나 파훼한다?

그리되면 속에 든 무언가가 부서지며 이 일대가 폭발로 초토화돼 버릴 것이다.

“하긴. 이 안에 있는 것이 엄청나긴 하지.”

[흐음.]

“일단 들어가 볼까?”

이안은 냉기가 도는 철문을 열고 종탑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꼭대기로 가는 나선 계단 빼곤 아무것도 없이 휑했다.

“위가 아니라 지하로 가야 하는데.”

[지하?]

“내가 말한 장소가 지하에 있거든.”

이안은 바닥을 살피기 위해 왼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수그렸다.

계단이 시작되는 부분.

인적이 끊겨 먼지가 쌓인 바닥을 쓰윽 문지르자, 우둘투둘한 표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לאמיתותξהוĭ.

[고어구나. 제국 초기에나 쓰던.]

“이게 열쇠인데…….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가 열리는 열쇠.”

[그럼 이 고어를 해석해야겠군. 한데…….]

이안의 손길을 따라 글자를 읽어내린 녹스가 팔짱을 단단하게 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한 추임새였다.

‘고약하군. 현재는 잘 쓰지 않는 글자들의 조합이라니.’

고어 학자나 읽을 법한 글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것도 최소 30년 이상 언어학에 뼈를 갈아야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의 글자들.

‘열쇠니까 쉬울 순 없으나, 적당해야지.’

녹스는 이안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못 풀면 도움을 줄까 하여.

그런데 녀석이 제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오로지 바닥만 직시하고 있었다.

돌 하나하나에 양각된 글자를 씹어먹기라도 할 것처럼.

“흠. 정배열이 아니네. 뒤섞여있어, 글자가.”

……이놈.

글자 하나하나를 아는 눈치였다.

‘벌써 뒤섞인 것까지 파악하다니.’

“라. 신. 명. 을. 하. 증. 자.”

이안은 머릿속을 비우고 뒤죽박죽인 글자에만 집중했다.

무작위로 섞인 글자들을 닳도록 더듬고 또 더듬길 한참.

손가락 끝이 빨갛다 못해 돌의 표면에 쓸려 피가 날 즈음이었다.

“자신을 증명…… 하라.”

이안은 낙서인지, 글자인지 모를 고어를 기어코 조합해냈다.

여기까진 진도가 나갔는데.

“……역시 해석만 해선 입구가 안 열리네.”

[아무래도 돌을 순서에 맞게 배치해야 할 것 같다.]

이안은 글자를 재배열하려고 사각형의 돌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질 않았다.

“어? 안 움직인다.”

[참 복잡하게도 꼬아놨구나. 돌에다가도 술식을 걸어 놓다니.]

흥미로운지 녹스가 땅바닥에 코를 박고 돌을 요리조리 살폈다.

돌은 이런 ‘▣’ 구조였다. 외곽이 비어있는.

“흐음. 여기 사각의 테두리가 수상하지?”

[완전. 딱 봐도 ‘내가 단서요.’라는 느낌적인 느낌?]

“일단 이 테두리부터 메꿔 봐야겠다. 괜히 비어있진 않을 테니.”

지능이 짚신벌레 수준이라도 둘이서 합치면 뭐는 나온다.

하물며 똑똑한 인간 하나와 정령인데 무얼 못할까.

[어서 해봐라.]

이안은 우선 사각의 테두리 하나하나에 바람을 채워 넣었다.

그 즉시 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움직임이 있거나 이동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휘이잉.

이안은 바람을 갈고리 형태로 만들어 돌을 들어 올렸다.

“오오.”

손쉽게 잘도 움직인다.

테두리를 채운 바람들을 유지하면서 돌을 옮겨야 하는 상황.

심지어 돌을 들어 올릴 때 첫 번째 돌과 두 번째 돌에 들어간 바람의 양이 같아야 했다.

어려움의 정도가 상.

하지만 굴하지 않고 이안은 기어이 글자의 배치를 완성해냈다.

그 순간.

쿠구궁.

계단 밑부분이 꺼지면서 지하로 가는 입구가 드러났다.

* * *

“……어?”

이안은 예상치 못한 밝음에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통상적으로 지하라고 하면 어둡다는 인식이 먼저 든다.

그렇지만 이곳은 밝았다.

심지어 청량한 햇살 냄새와 맑은 바람 소리까지 들려왔다.

지하와 그가 서 있는 곳이 완전하게 별개의 공간인 것처럼.

“상상 이상이네.”

[지하 같지가 않다.]

“이제 들어가 보실까요, 스승님.”

[에헴. 그러자꾸나. 네가 호언장담한 장소가 어떤 곳인지 봐 보자꾸나.]

녹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어떤 기대와 설렘이 범벅된 채였다.

[흐읍. 한데 이 냄새 말이다……. 이안 넌 잘 모르겠지만 이 느낌, 알 속과 비슷하다.]

“알 속? 녹스 네가 잠들어 있던 공간?”

[응. 거긴 에테르계와 환경이 똑같다고 저번에 말하지 않았누.]

“아아. 그렇다면 뭐.”

녹스가 그곳과 여기의 대기가 똑같다고 느낀다면,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게 맞다.

그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그런 환경이었으니까.

이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돌계단을 내려갔다.

폭이 넓고 큰 탓인지 가파르지 않아서 수월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무려 300계단이 넘는데도 말이다.

찰박.

마지막 계단, 발끝을 내리고 귀퉁이를 돌자 딱딱한 감촉 대신 물소리가 났다.

이안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퍼지는 파동.

“……이런 곳에 바다라니.”

새파란 바다와 새털구름 표표히 떠다니는 하늘.

지하 공간이 막대하게 넓어선지 바다 느낌이 제대로 났다.

“예술이다, 진짜.”

[이 환술…….]

녹스가 무언가를 확신하는 표정으로 앞을 직시했다.

오감을 속이는 정교한 환술의 끝은 환영을 ‘현실’로 만드는 거라고 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다.

[보아하니 누가 만들었는지 알겠군.]

이 정도 환술을 구가하는 실력자가 어디 흔하겠는가.

환술로는 히에로스 천년 넘는 역사상 최고라고 칭해지는 자.

그를 뛰어넘는 정령사라는 없을 거라고 일컬어지는 최고의 정령사.

상식을 번번이 깨부수는 괴물.

[라에라트.]

초대 황제인, 루카스 프링키리움 에드레이 포르투나 레 라에라트.

부르다 숨 넘어 갈 이름을 녹스가 꿍얼거렸다.

[어쩐지. 바깥의 술식부터 이 공간까지, 굉장히 익숙하다 했더니.]

“뭔가 청량한 느낌인데?”

[그놈 마력향의 특질이 그렇지.]

“아…….”

[그나저나 이곳이 천년 넘게 유지된 비결이 그거였나 보군. 거적때기마냥 둘둘 감겨놓은 그 술식들.]

녹스는 커다란 눈알을 굴려 공간을 재차 훑어보았다.

어디에 눈을 둬도 균열 하나 없이 고요함만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근데 이게 가능해? 천년이라니.”

[그놈이라면 응당. 하. 근데 이런 걸 만들어 놓고!]

뭔가가 심기를 건든 모양이다.

급작스레 녹스가 닭 모가지 비틀 듯 삐딱해졌다.

[라에라트 이 음흉한 자식.]

“초대 황제를 똥개 부르듯 하는 우리 스승님, 왜 또 그러십니까?”

[그놈은 노상 그랬다.]

“뭐가?”

[이런 비밀 공간을 만들어 놓고, 시도 때도 없이 나한테 찾아내라고 했다.]

쌓인 울분이 많나 보다.

녹스가 뾰족한 송곳니를 빠득빠득 갈았다.

[내가 똥개도 아니고. 그놈의 마력향만 쫓아서 찾아내라니. 히에로스가 작기나 하면 몰라.]

“이 밀실을 보니까 아름다운 옛일이 막 샘 솟아?”

[샘솟긴 개뿔.]

“하하핫.”

[아, 그러고 보니 여길 찾아보라고 한 적이 없네?]

“없다고?”

[없다. 없으니 아까 너랑 같이 수수께끼를 풀었지.]

“여길 모르셨구나. 뭐든지 다 안다는 우리 스승님께서.”

[커흑!]

이갈이하듯 가는 송곳니가 다 닳겠다.

곱씹을수록 울분이 커지는지 녹스의 이갈이가 더 심해졌다.

그 소음을 길잡이 삼아 둘은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며 바다를 횡단했다.

찰박찰박.

지절거리는 것 같은 물의 소리와 함께 얼마쯤 앞으로 나아갔을까.

십 분인지, 다섯 시간인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모호해졌을 즈음이었다.

“……다 왔다.”

이안의 눈앞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이곳이 성장의 정체를 막기 위한 최적의 장소이자, 목적지였다.

이안은 일절 지체하지 않고 가볍게 철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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