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쏴아아아악.
밀려오는 공기의 밀도가 심히 맑고 무거웠다.
그라나토스의 열 배, 아니, 몇십 배쯤?
“크으읏.”
이안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입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 줄 예상했었는지 녹스가 그다지 놀라지 않은 투로 조잘거렸다.
[이 공기의 밀도. 에테르계와 똑같구나. 하찮은 네놈이 견디기에는 무리지.]
“그러니까 새로운 수련 장소로…… 적당하지 않겠어?”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아주 최적이다. 억지로 찾는다 치면 평생의 운을 썼다 할 만큼.]
녹스가 제집 안방인 양 곧장 안쪽까지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저는 압력으로 인해 찌부러질 것 같은데 아주 살판이 났다.
[제자님, 좀 일어나 보시지?]
“…….”
[왜에? 엉덩이가 많이 무거우신가?]
“…….”
대기에 짓눌려 발가락 하나 꼼짝 못 하는 걸 알면서, 저런다.
사악한 물덩이 같으니라고.
녹스는 짧은 팔로 뒷머리를 받친 건방진 자세를 취했다.
스승의 권위를 세워야 할 때였다.
[귀여운 자식. 이것이 애송이 네놈과 나의 차이다. 알겠느냐?]
“……와아. 너무 직격탄인데?”
[억울하면 이 밀도를 버텨내라. 버텨내면, 넌 ‘독보적인 정령사’가 될 거다.]
대기의 밀도가 짙은 이곳에서 마력을 엮는다?
거기다 구슬 네 개의 마력량을 변주하기까지 한다?
그게 가능해진다면 단숨에 카르디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이안에게는 택도 없는 소리지만.
“오호, 독보적이란…… 말이지?”
[말해 뭐할까. 어디서든 쉬이 기술을 엮으며 날아다닐 터인데.]
녹스는 열의와 독기로 눈을 빛내는 이안을 흘끗 보았다.
[입구에서 저 끝까지 오십 걸음쯤 되려나?]
“그게…… 왜?”
[마력을 엮는 건 차치하고라도, 오십 걸음을 다 떼었을 때 네 성장이 얼마가 되었을지 궁금해서 말이다.]
“위대한 정령사가…… 되어있지 않겠어?”
[헹. 위대한 정령사? 당장 발가락도 못 움직이는 애송이가 꿈도 야무지긴.]
녹스의 핀잔에 이안은 크큿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바람에 힘이 더 빠져도 어떻게든 꼬꾸라지는 몸을 추스르려 안간힘을 썼다.
조금만 힘을 풀면 바로 바닥과 면담을 해야 할 실정이었으니까.
“와. 죽겠……다.”
바닥에 드러누워 시체 놀이나 하려고 수련 장소를 바꾼 게 아니었다.
목각 인형처럼 앉아만 있으려고 온 건 더더욱 아니고.
대기가 무겁든, 이곳에 온 첫날이든 그딴 건 상관없었다.
목표를 정했으면 무조건 직진할 뿐.
“이까짓 것.”
이안은 돌덩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 같은 발가락을 들어 올렸다.
고작 엄지발가락.
그냥 위로 치켜든 것뿐인데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뼈가 빠개질 것 같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발가락 하나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될 때까지.
그렇게 주저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안은 끊임없이 용을 써댔다.
‘생각보다 잘 하고 있군.’
그런 이안을 지나쳐 어느 사이 눈길을 돌린 녹스.
지하실을 둘러보는 그의 눈빛은 아까와는 다르게 딱딱해져 있었다.
마치 에테르계 같은 이 공간.
황자가 알을 얻으러 올 때 쓰는 비밀 별장이니 있을 만한 곳이다?
아니.
‘황자에겐 필요 없는 공간이야.’
알을 얻은 황자는 탑의 시험을 치른다.
거기에 모든 것이 갖춰졌는데 뭣 하러 수고를 들이겠는가.
이런 공간을 만들고 유지하려면 드는 마력이 얼만데.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서 이런 수고를?
녹스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이안에게로 향했다.
의식하지 않은 본능 같은 거였다.
확실히.
저 녀석에게는 필요했다.
알을 얻고도 탑의 시험을 치르지 못하는 저 녀석에게는.
이쯤 되니 어떤 의문이 녹스의 발끝에서부터 돋아났다.
‘라에라트,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에루리안을 만든 거지?’
* * *
녹스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의문을 덜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북쪽 관리자의 성.
“호오?”
혼자인 녹스를 보고 루체는 콧잔등을 실룩거렸다.
코의 주름 따라 숨결이 이지러졌다.
그러자 덩달아 파이프 담배의 연기 또한 일렁거렸다.
“웬일로 혼자이실까? 알을 얻은 자를 지켜야 하는 수호자께서.”
“비꼬지 마라, 루체.”
“말을 꼬아 듣는 재주가 있으시군, 수호자께선.”
“네놈의 말투가…… 됐다.”
입씨름하며 시간을 낭비할 새가 없었다.
정확히는 저놈의 심기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어봐야 할 게 수두룩했으니까.
한 수 접은 녹스는 루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만하게 널브러져 있는 백사자의 보드라운 털이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다.”
“내게?”
“로르 그 아둔한 놈과 의논해 봤는데, 답이 안 나와서 말이다.”
“천하의 수호자가 답을 모르는 문제라…….”
“그 얘긴 지겹게 들어서 이제 물린다. 괜히 짜증 나니 덧대지 말고.”
“그럼 입 닥치고 있을 테니 말해 봐라.”
수호자가 모르는 일이라니 구미가 동한 모양이다.
루체가 파이프 담배를 뻑뻑 피우며 들을 준비가 됐다는 눈짓을 했다.
이에 녹스가 틈을 두지도 않고 재게 입을 뗐다.
“말하자면 좀 길다. 그러니까 이안의 눈에…….”
라트비아 서, 흔히들 ‘시간의 서’라 부르는 것에 관한 것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바다 엘프의 수장과 시간의 서의 관계성.
이안의 눈에서 ‘서’의 표식이 사라진 것.
종탑 안에 있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공간에 관한 것까지.
“도통 상황을 종잡을 수가 없다.”
“흐음.”
“이안에 관한 거라면 유독 흙탕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깜깜해서 말이다.”
“누군가 정보를 누락시킨 듯이?”
“바로 그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돼.”
“…….”
“이번에 발견한 밀실만 해도 그래. 내가 이것의 존재 자체를 몰랐잖아? 그게 다 이안과 관련돼서 그런 거였어.”
녹스는 피를 토하듯 말을 쏟아냈다.
의논이 아니라 거의 넋두리에 가까웠다.
아니, 혼자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심사인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이 밀실은 대체 언제 만들었을까?”
“아, 그거? 그거, 라에라트가 에루리안을 세울 때 만들었다.”
“엥?”
녹스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에루리안을 세울 때 저도 같이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니.
더 설명해 보라는 녹스의 눈빛에 루체는 머리통을 옆으로 기울어졌다.
“모르는 게 당연하겠군. 네가 발리올의 페네티오에 가서 방어 술식을 짜고 있을 때 만들었으니.”
“와, 생각도 못 했네. 그 잠깐 사이 그걸 완성하다니.”
녹스는 짧은 불꼬리를 팔락거렸다.
풍차 돌리기가 세찬 걸 보니 궁금증이 폭발한 것 같았다.
“한데 말이다. 라에라트 그놈, 무슨 생각으로 그 어마어마한 걸 만든 거지?”
“너 때문이다.”
“나……?!”
“라에라트랑 너랑 노상 둘이서 하던 소꿉놀이 그거.”
“밀실 찾기?”
“어. 그거 때문에 만든다고 했었다.”
“허어어어어.”
의외의 해답에 허무해졌다.
대단한 음모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실상이 이렇게 하찮을 줄이야.
아무래도 이안 문제로 골머리 썩다 보니 음모론자가 된 것 같다.
괜히 이것저것 엮어서 크게 생각한 걸 보면.
녹스는 괜스레 멋쩍어져서 통통한 앞발을 삭삭 비볐다.
“그럼 말이야. 밀실은 그렇다 치고. 내가 또 궁금한 게 있거든.”
“뇌를 나에게 맡기려는 건가?”
“거 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 봐. 바다 엘프의 수장 말이야.”
“그자가 왜?”
“수장은 시간의 정령 라트비아하고 연인 사이였잖아.”
“남의 연애사 따위.”
“아, 참. 말 끊지 말고. 그 연인을 희생해서 대체 왜 ‘시간의 서’를 만들었지?”
“그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명령을 받았다, 고 했다.”
“응? 명령? 누구의?”
“뻔하지 않나. 수장이 누구지?”
“여신의 대리자.”
“그거다. 그래서 수장에겐 그 누구도 명령을 내릴 수 없다. 그분 말곤.”
“아, 그렇네……. 뻔한 걸 내가 잊고……, 어? 그런데 잠깐.”
녹스는 신나게 대화를 하다 말고 루체를 빤히 보았다.
이놈, 의외로 많은 것을 안다.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지?”
“수장이 직접 말해줬으니까.”
“직접?”
“어느 날 세상 다 산 표정으로 시간의 서를 들고 왔다. 그러더니 ‘서’를 나에게 맡기더군.”
“…….”
“잠시 보관해 달라고.”
“설마…… 그 ‘서’를 뷔트시겐에 넘긴 게 너야?”
쏟아지는 정보에 녹스는 눈알을 희번덕거렸다.
해답을 코앞에 두고 공연히 머리를 쥐어짠 꼴이지 않은가.
그동안의 골몰이 억울해서 의문이 풀려가는데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곧 쏟아질 것 같은 눈알을 보며 로르는 꼬리를 느리게 살랑거렸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벌써 눈알을 까뒤집긴.
“당연한 소릴. 애초에 보관도, 넘겨달라는 게 전제 조건이었다.”
“…….”
“에루리안이 아카데미가 될 시 그때, 넘기라고 하더군.”
루체는 녹스의 부라린 표정을 힐끗 보곤 콧잔등을 실룩거렸다.
녀석의 반응만 보면 원수라도 만난 것 같다.
섬찟한 몰골이었지만 루체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수호자의 저런 낯짝은 보기 드무니까.
“아마 그게…… 220년 전쯤이었던가?”
“220년?”
교묘한 숫자였다.
수호자에게 전해지던 계승의 서가 끊긴 시점이었고.
뷔트시겐과 루하흐에 비슷한 내용의 밀서가 등장한 시점이기도 했고.
이 모든 것들이 200년 그쯤을 기점으로 얽혀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는 모른다. 난 부탁받은 대로만 했으니.”
“아니, 왜 몰라? 부탁받았으면 끝까지 잘 살펴봤어야지.”
책의 결말을 읽다 뺏긴 것처럼 녹스가 뒷말을 ‘다다다’ 쏟아냈다.
“그 귀한 것이 잘 보관되고 있는지, 혹시 그게 쓰이진 않았는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봤어야지 대체 뭐 했어?”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항변하는 녹스에게 루체가 시원하게 응수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내 손을 떠나버린 건, 이미 내 소관이 아닌데.”
“…….”
“난 내게 주어진 의무만 행하면 된다.”
“아우. 미치고 팔짝 뛰겠네. 그 이후가 중요한데.”
벌러덩 드러누운 녹스는 자꾸만 몸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저런다고 답이 나오나.
제 살 깎아 먹는 버둥거림을 루체는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복잡다단한 눈빛을 한 채였다.
파이프 담배의 버지니아 연초가 꺼질 때까지 그러다가…….
“수호자.”
루체의 눈길이 우글쭈글한 녹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약간의 공허함이 배인 동공이 이동해 정착한 곳은 성 밖 너머 그라나토스였다.
“왜, 혹시 더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
“무엇 때문에 애쓰는 거지?”
“응? 말의 의미를 모르겠다.”
“본래라면 수호자 넌 이안 뷔트시겐을 죽였어야 했다.”
“…….”
삽시간에 대기의 온도가 낮아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로르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황족이 아니면서 알을 얻으러 왔으니까.”
그게 원칙이었다.
알을 깨운 자가 은발이 아닐 시, 깨어난 수호자는 반드시 그자를 죽여야 한다.
황가를 위해.
“그런데 수호자 넌 이안을 살려두었지.”
“…….”
“대체 의무를 저버린 이유가 뭐지?”
루체를 따라 녹스도 그라나토스를 내려다보았다.
적막하고 평온해 보이는 숲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아마도 죽어가던 50년의 기억을 되살리기 때문이리라.
아니지.
천년 간 반복되는 자신의 생이 저 그라나토스 같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태어나 당연하게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생.
고이고 고여서 머무를 뿐 나아가지 못하는 생.
“솔직히…… 나도 모르겠군. 황태자를 기다린 시간이 길어서…… 그랬나?”
녹스는 웅얼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모르겠다.’라는 대꾸는 진심이었다.
그냥 이안을 본 순간 제게 각인된 본능이 발동되어, 녀석을 지키고 싶어졌다.
은발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젖먹이 새끼를 지켜야 하는 아비처럼 그저 보호 본능만 존재했다.
어린 황자를 마주했을 때처럼 보호 본능만.
“어쩌면…… 고이고 고인 물이 방향을 틀었을지도. 썩지 않고 다시 흐르기 위해.”
녹스는 긴 여운의 꼬리를 남기며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것이 흐릿하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모호하고 막막하다.
그럼에도 그 안에 꽁꽁 싸매진 의도를 찾아야만 한다.
그 의도가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기에.
설혹 이안에게 호의적인 의도일지라도.
그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누군가를 지켜내는 데에 있어선 말이다.
‘생각 없이 끌려다니느냐, 주체적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