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90화 (90/214)

제90화

온갖 청승을 떨던 녹스가 떠난 직후.

“이안과 시간의 서라…….”

루체는 앞발에 턱을 괴고 그라나토스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녹스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

아니지.

엄밀히 따지자면 해줄 수가 없었다.

“기억이 흐릿해져 가니…….”

분명 바다 엘프의 수장을 만나 시간의 서에 대한 모든 얘기를 들었다.

뷔트시겐에 전할 밀서도 함께 받았고.

그 두 가지를 정해진 때에 뷔트시겐에 넘겼다.

“분명…… 그랬는데, 이조차 확실하지가 않은 게 문제지.”

수장과 나눈 대화도, 뷔트시겐에 ‘서’를 넘겼을 때의 상황도 흐릿하다.

마치 물안개가 낀 것 같다.

뭔가 막이 끼는 것처럼 시간의 서에 관한 부분만 점점 얼룩져 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 * *

그 시각 발리올의 중심 도시 에르메움.

뷔트시겐 가주는 마차의 창을 통해 발리올의 한 건물을 쳐다보았다.

발리올 일족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곳.

일족의 수장이자 그의 지기가 사는 발리올의 종가.

양파 같은 완만한 곡선이 살랑이는 봄을 닮았다.

사철 따스한 날씨를 가진 발리올을 대변하듯.

가주는 그 건물에서 눈을 떼고 맞은 편을 보았다.

어딜 가든 동행하는 칼브란이 여지없이 그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발리올 가주님께서 무척 즐거워하셨습니다. 오랜만에 가주님을 뵈어.”

“그놈 반응을 보니 그간 너무 무심했다 싶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잠 잘 시간도 없이 바쁜 것을요.”

“그래서 농땡이 칠 핑계가 생긴 김에 이리 걸음 하지 않았나.”

“예. 도련님께서 알아봐 달란 것도 조사해야 했으니, 겸사겸사지요.”

발리올에도 밀서가 있는지에 관한 것.

이에 대해 중얼거린 가주는 발리올 가주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발리올 가주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화통한 성정은 물론이거니와 복장도 그랬다.

항상 혼자 사막에 사는 것처럼 소매가 없는 튜닉만 고집했다.

자신의 탄탄한 팔뚝이 가려져선 안 된다나, 뭐라나.

자랑거리인 그 팔뚝으로 발리올 가주는 뷔트시겐 가주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이러다 뼈가 부러지겠다 싶을 만큼.

<어이, 형제. 나 너무 서운해. 코빼기 한번 안 비치다가 아드님이 부탁했다고 이리 쪼르르 내게 달려오다니.>

<그러니까 밀서 있어, 없어?>

<끌끌끌. 궁금해?>

<장난하지 말고.>

<다른 가문의 비밀을 캐려면 뒷구녕으로 몰래 해야지, 너무 대놓고 떠먹여 주셔, 하는 거 아냐?>

<내가 왜 그런 수고를 들여? 돈 들지, 시간 들지, 뭣보다 내 사람들 고생하지.>

<허어어어어.>

<여기에 떠먹여 줄 사람이 떡하니 있는데, 내가 뭣 하러?>

<저 두꺼운 낯짝 보소.>

<그래서 안 가르쳐줄 거야? 그럼 가고.>

<어이, 형제. 나 너무 서운해. 이렇게 간다고? 아무것도 안 듣고?>

<그러니까 뜸 들이지 말고 불어.>

<쳇. 내가 형제한테 약한 걸 알고 꼭 저래요.>

<하하하핫. 다시 한번 물을게. 정확하게 200년 전부터 내려온 밀서 있어, 없어?>

<흐음. 200년이라…….>

<…….>

<……있다면?>

<의리로 내용도 알려주면 좋고.>

<크하하핫. 내숭 없어서 좋다! 내가 이래서 형제를 좋아해.>

<그 마음은 내가 고이 접어 칼브란한테 줄 테니까, 내용부터 털어놔 봐.>

<그러니까…….>

뷔트시겐 가주는 발리올 가주가 알려준 밀서의 내용을 천천히 되뇌었다.

“‘그라나토스에 있는 별장을 사들여 아카데미로 만들어라.’, 라…….”

“무언가 걸리시는 게 있으십니까?”

“하필 아카데미로 만든 게 ‘그 별장’이라서 그렇네.”

“아. 예전엔 황실의 비밀 별장으로 쓰였다지요. 제국의 그 누구도 모르지만.”

“알려지지 않은 게 그뿐일까. 황태자의 첫 외출이 에루리안이라는 것도 비밀이지.”

“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말입니다.”

황태자는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채 키워진다.

하여 황태자의 모습을 제대로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평생 그의 곁을 지키는 시종 정도?

이에 대해 곱씹은 가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황태자뿐만이 아니지. 황실에서 태어난 모든 황자가 전부 그렇지 않나.”

“예. 일곱 살 때까지 자신의 궁에서 칩거하지요.”

“그러다 각자의 생일을 기점으로 외부 활동을 시작하고.”

황자들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탄신 연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을 각인을 시키듯 연일 활발한 행보를 이어간다.

물론 황태자의 행보도 그들과 비슷하다.

다만 황태자만은 생일 즈음 누구도 모르게 에루리안으로 향한다.

거기서 근 한 달을 머문 후, 황태자는 4대 가문을 순방하는 것으로 첫 행보를 시작한다.

“황태자가 황궁에서 머물다 순방하는 것으로 다들 알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지요.”

“그렇지 않지.”

“여기까지는 가주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정보이나. 순방 직전의 황태자의 행적, 그것에 대해선 가주님조차 모르시지 않습니까.”

“지독하리만치 철저하게 싸매고 있으니 그럴밖에.”

“그렇게까지 숨기던 곳인데, 에루리안을 어떻게 팔 수 있었을까요?”

“밀서에 찍힌 인장, 발리올이 가진 밀서에는 황제조차 거부할 수 없는 인장이 찍혀있더군.”

“아……, 수호자의 인장.”

“그거라면 울며 겨자 먹기라도 그리할 수밖에 없었을 터.”

가주는 ‘수호자의 인장’을 곱씹어 보았다.

그 인장이 발리올의 밀서에만 찍혔을까.

뷔트시겐의 밀서뿐 아니라, 데클렌의 설명에 의하면 루하흐의 밀서에도 있었다고 했다.

“흠. 결국 에루리안이 모든 것의 구심점이군.”

“예. 도련님이 에루리안에서 레브 도련님을 만나신 것, 그리고 수호자를 얻게 된 것이 교묘하게 짜인 안배 같습니다.”

“흐음. 누군가가 짜 놓은 판이라…….”

가주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말을 짓씹듯 읊조려 보았다.

판을 깐 자가 있는데, 그것에 관한 정보가 단 한 톨도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제 목숨줄을 쥔 자가 적인지, 아니면 언제든 태도를 바꿀 아군인지도 모른다는 것.

이는 몹시 위험했다.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한 가주는 주먹을 억세게 말아쥐었다.

어떤 의지가 묻은 행동.

푸른 핏줄이 돋아나는 그의 손등에 칼브란의 견고한 눈빛이 닿았다.

“칼브란.”

“예, 가주님.”

“알아내야겠네. 밀서의 의도든, 황가가 감추고자 했던 것이든.”

“그리 결정하셨다면 하명 하십시오.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우선 조사를 위해 들쑤실 범위를 정해야겠군.”

“…….”

“흐음. 멀리 갈 필요 없이 에루리안의 학장부터 조사하세.”

“본래는 발리올의 것이었던 에루리안을 살리카가 빼앗았다고 했지요.”

“그로 미루어 보아, 살리카가 에루리안을 가져야 했던 까닭이 있을 것인즉.”

“어쩌면 말입니다, 가주님. 혹여 살리카가…….”

칼브란은 뒷말을 흐렸지만 가주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혹여 살리카가 알았다면.

이를테면 기를 쓰고 황가가 감추려 하는 비밀, 정확히는 황태자가 에루리안에 머무르는 이유를 알고 있다면.

“……알고 있었던 것 같군. 살리카 그자가 물밑에서 움직이는 걸 보면.”

“그렇다면 그들의 행보가 이해가 가는군요.”

“그 ‘비밀’이, 신중한 그자에게 확신을 주었겠지. 전쟁을 준비하는 데 있어.”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떤 그림의 조각, 그저 일부분만 알아냈는데도 숨통이 막혀왔다.

하지만 미적거리고 있을 순 없었다.

가주는 한없이 평화로운 에르메움의 전경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고저가 없는 음색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밀서는 됐네. 모든 정보망을 살리카에게 집중할 걸세.”

“예. 살리카 가주가 언제 화장실을 가는지까지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무리하지는 말게. 이 일은 장기전이 될 테니 생목숨을 잃을 필요는 없지.”

“……명심하겠습니다.”

충직한 칼브란을 가주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딴 주머니 안 차는 이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충심을 이유로 목숨을 쉬이 내던지는 것.

“칼브란, 오래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거라네. 악착같이 살아남는 자가.”

“예.”

“그러니 날 위해, 이안 그 아이를 위해 오래 살아남아 주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 * *

가주가 발리올에 있던 그 무렵.

기숙사 응접실로 향하는 이안에게 녹스가 은근히 물었다.

[애들, 요즘 약 먹었니?]

“웬 실없는 소리야?”

[자고 일어나면 2성, 자고 일어나면 3성이 돼 있어서 그런다.]

“아아. 그 소리였어?”

[네가 하도 굴려서 그런가. 성장세가 아주.]

“하핫. 이제야 헤르세의 환희 효과가 터지기 시작한 거지.”

[그리 성장이 빠른 건 나쁘지 않은데…….]

녹스가 팔짱을 끼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뭔가 또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왜, 성장세와 경험의 차이가 너무 벌어질까 봐 그게 걸려?”

[아는구나. 내가 무얼 염려하는지.]

미숙함은 독이다.

성장과 경험의 폭이 커서는 자칫 목숨을 잃기 십상이니까.

가깝게 봐서는 파라칸시스 시합에서 그럴 것이고.

멀리 보면 가문으로 돌아가 임무를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걱정 마셔. 그것을 보완하려고 내가 또 준비한 게 있지.”

이안은 녹스의 염려를 다독이며 당당하게 응접실 문을 열어젖혔다.

진즉에 와 있었는지 C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이안, 왔어?”

“저녁 수련하지 말고 다 모이래서 너 기다리고 있었어.”

“대체 무슨 일인데?”

아이들이 근심 어린 얼굴로 물어왔다.

설령 숨이 꼴딱 넘어가도 수련을 멈출 녀석이 아니었다.

그런 녀석인 걸 아는데 웬일로?

아이들은 무슨 문제가 생겼나 해서 이안의 안색을 살폈다.

간도 작긴.

지레 걱정하는 아이들에게 이안은 별일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냥 수련 장소를 바꾸려고.”

“장소를?”

“왜? 갑자기 왜 장소를?”

“다른 반의 방해 없이 우리가 맘 편하게 수련할 만한 곳이 있나?”

아이들의 의문이 주렁주렁 이안의 얼굴로 들러붙었다.

“있지. 쑥쑥 크는 너희들한테 딱 맞는 수련 장소가.”

씨익 웃어 보인 이안은 정한 바가 있다는 듯 아이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런 뒤 곧장 벽난로로 손을 뻗었다. 벽난로 중앙에 조각된 독수리로.

이안은 비상하는 것 같은 조각상의 날개를 잡은 후 연거푸 5번 돌렸다.

첫째 날개깃이 천장을 향한 즉시였다.

그그긍.

묵직한 굉음과 함께 벽난로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틈이 갈라지자마자 보인 건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었다.

“뭐야, 뭐야! 우리 기숙사에 이런 공간이 있었어?”

“말도 안 돼! 그렇게 벽난로 앞을 왔다 갔다 했는데 왜 몰랐지?”

“야, 비밀 공간이니까 비밀이었겠지.”

“와아. 내가 드러누워도 되겠는데. 뭔 계단이 이렇게 넓냐?”

“저기 위쪽에 꺾이는 지점까지 가려면 한 50계단쯤 올라가야 하나?”

“보이는 건 그런데, 더 올라가야 할 것 같지 않아?”

“그게 말이 되냐? 기숙사 높이를 생각해 봐라.”

“여기에 비밀 공간이 있는 것도 말이 안 되거든?”

“일단 들어가자.”

이안은 웅성대는 아이들을 끌고 돌계단을 올랐다.

어미 닭과 병아리처럼 종종대며 계단을 오르길 얼마쯤.

거침없이 행진하던 이안은 어느 지점에 다다른 뒤 멈춰 섰다.

막다른 곳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너머에…….’

위치상으로 따지자면 이곳은 기숙사의 5층 끝자락이었다.

더 나아갈 곳이 없자 당황한 아이들은 눈을 끔벅거리며 이안을 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냐는 눈빛.

물음에 답하려고 이안은 녀석들의 중앙에 있는 레브에게 손짓을 했다.

“레브.”

“어?”

“더 올라와서 마지막 계단에 서 봐.”

이안이 말하는 대로 레브는 한 계단 더 올라 계단참에 섰다.

그러자 막혔던 공간이 확 트이더니 에루리안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