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쏴아아아아.
파도가 부서지는 루하흐의 해안가가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그걸 본 아이들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와,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진짜 바단데? 발이 척척해.”
“이 ‘산호색 모래’ 좀 봐. 너무 신기하다.”
“이 모래, ‘산호 수염 수달’이 사는 곳에만 있는 건데.”
“성질 더러운 그 마물?”
쉼 없이 떠드는 아이들의 고갯짓이 분주했다.
흡사 여행객 같은 모습이었다.
그걸 잠시 웃으며 보다가 이안은 이번 참엔 올리브를 불렀다.
더 설명할 게 남아 있어서였다.
“이번엔 레브 말고 올리브가 선두에 서 봐.”
“알았어.”
신이 난 올리브가 계단참을 밟자 대번에 환경이 발리올로 바뀌었다.
이쯤 되자 아이들은 이 공간의 원리를 바로 알아챘다.
계단참을 처음 밟는 사람이 지닌 원소 속성에 따라 공간이 바뀐다는 것을 말이다.
이해만 했다 뿐일까.
“아!”
레브는 이 공간에서 할 수련이 뭔지 금방 깨달았다.
“루하흐면 루하흐, 뷔트시겐이면 뷔트시겐, 환경에 따라 마물의 속성도 다르니, 거기에 대응하려는 거네.”
“어. 전투 방식이 유연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모의 대련이 아닌 실전 경험을 쌓겠다는 거지?”
“그 부분이 제일 부족하니까. 너도, 애들도, 나도.”
“하여튼.”
“왜?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훈련을 내놓는 내가 대단해 보이냐?”
“어련하실까. 그놈의 잘난 척.”
“내가 워낙 잘나서 뭐 하나나 빠지지 않지.”
“자뻑은 혼자 있을 때나 실컷 하시고.”
레브는 이안의 잰 척을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그러더니 말똥말똥한 아이들에게 짓궂게 말했다.
“다들 들었지? 이안 감독관께서 하신 말씀. 뼈를 갈아 전투에 능숙해지란다, 파라칸시스 시합 전까지.”
레브의 익살에 곧바로 올리브가 사악하게 살을 보탰다.
“캬캬캬. 그때까지 어리바리 타면 이안이 단독 면담하겠다는데?”
“허얼. 난 그 고문 반댈세.”
“지난번에 이안이랑 기이이이이픈 대화를 나눴던 놈 어떻게 됐더라?”
“한 반나절 정신 나가 있었지, 아마?”
“차라리 구울이랑 종일 술래잡기를 하고 말지, 난 이안 얼굴 안 볼란다.”
“크크큿.”
사방에서 킥킥대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다 이거지?
‘좋다, 실컷 놀려라. 놀린 만큼 지옥 훈련이다.’
딱 그 표정을 한 채로 이안이 눈을 부릅뜨자, 아이들이 잽싸게 태세 전환을 했다.
그전과는 다른 굽신거림이 묻어나왔다.
‘절대 어리바리 타지 않겠습니다, 이안님.’
‘무엇이든 열심히 합죠.’
‘내 몸뚱이는 못 갈아도, 제 옆에 있는 놈의 뼈는 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날이 갈수록 ‘이안화’되었다.
능글능글함만으로 기름 열병 정도는 짜낼 수 있을 것 같달까.
눈 뜨고 못 봐줄 꼴이었다.
이에 레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꿍꿍이가 어린 눈을 하곤 계단참을 밟아버렸다.
그 즉시, 산호색 모래가 펼쳐진 해안가가 다시 나타났다.
커다란 바위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산호 수염 수달.
수달을 응시하던 레브는 비식 웃더니, 전투 준비하란 신호도 주지 않고 수달에게 얼음 가시를 쏘아 보냈다.
다들 혼쭐 좀 나보라는 심산이었다.
푸슉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가시가 꽂힌 수달이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앗.
그와 동시에 수달 무리가 일제히 이쪽을 노려보았다.
“…….”
귀여운 외양, 하지만 외양과 반대되는 포악한 성격.
아이들은 수달 무리가 달려들세라 허겁지겁 정령을 꺼냈다.
“레브 저 자식!”
모두가 이를 득득 갈았다.
그래도 누구 하나 빼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저것들은 전투력이 높아서 혼자선 못 잡아.”
“에르그 1성도 최소 셋 이상 모여서 잡지 않나?”
“불리하면 바다로 도망가버리는 습성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
“차라리 도망가고 말면 다행이지. 끈적끈적한 바닷물을 뿌려 마비를 시키면 진짜 답도 없다.”
“그러고 나면 저것들이 바다에서 기어 나오는 거 알지.”
“나오는 게 문제냐? 저것들이 떼로 덤벼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게 문제지. 으으윽.”
아이들의 분분한 말소리 뒤로 이안의 목소리가 붙따랐다.
“그러니까 지금 할 일은 합동 공격을 할 것, 연계기에 익숙해질 것, 저 마물이 도망가기 전에 공략할 것, 접수했어?”
“접수했어.”
아이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를 이뤄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파라칸시스 시합을 대비하느라 분주한 나날.
그야말로 숨 쉬는 시간마저도 턱없이 부족했다.
“시간도 없는데. 차 한 잔 마시러 오라는 기드온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고.”
아까운 시간을 쪼개 기드온과 수다를 떨어야 했다.
요즘 지나치게 조용히 사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수상할 정도로 레브의 정체를 파헤치려 하지도 않고, 이상한 과제를 내지도 않았다.
“사고를 안 치니까 더 신경이 쓰이네.”
[기드온이니 그럴밖에.]
“본래 조용한 놈이 아니라서 그런가. 당최 맘을 놓을 수가 없다.”
이안은 올드 로즈가 만발한 텔로미어관의 정원을 지나며 눈살을 찌푸렸다.
장미의 눅눅한 향.
습한 장마철 같은 냄새가 기드온의 마력향과 참 많이도 닮았다.
하는 짓마다 음습한 그자와.
“이러다 또 뒤통수 때릴 것 같은데. 폰투스가 돌아오면.”
그렇게 되면 진짜 골치 아파질 것이다.
지난 생처럼 말이다.
물론 현재는 교수와 학생이라 기드온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폰투스가 에루리안을 떠나 살리카 가주의 인정을 받으면서부터 그 관계가 역전된다.
세상 다시 없을 폰투스의 충직한 개가 된 기드온.
기드온은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하려는 듯이 폰투스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거들었다.
뿐이랴.
시키지 않아도 뒤치다꺼리를 알아서 도맡아 했다.
비열한 협잡꾼, 시체 청소부, 새끼 고문관.
기드온을 가리키는 악명은 폰투스의 악명만큼이나 다채로웠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열’이라고 했던가.
합이 척척 맞아 배가 된 둘의 악행은 언제나 충격과 경악을 낳았었다.
“그런 인간인데 변할 리 없지.”
[변하면 그게 기드온이겠느냐?]
“하긴.”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 거였다.
차라리 노상 하던 대로 사고라도 치면 그걸 빌미로 후려쳐 버릴 수 있을 텐데, 요즘은 근면에 성실까지 하니 원.
나쁜 놈의 근무 태만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기드온의 머릿속을 해부해보며 5층의 계단참을 밟은 그 순간이었다.
콰앙!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쩌렁쩌렁한 고함이 복도의 유리창을 파르르 흔들었다.
“스톨레 바르푸니!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건데!”
“…….”
“내 교수실을 왜 자꾸 얼쩡거리는 건데?”
“멱살은 놓으시죠, 기드온 교수님.”
“놔아, 놔아앗?”
“교수님이 한 말 잊으셨습니까? ‘흥분은 이성의 산유물이 아니다.’라고 했던 말.”
“하! 재수 없는 새끼. 말꼬리 잡지 말고 속셈이나 말해.”
“대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네놈 의도!”
“…….”
“저번 전투학 수업. 무한 대련. 이래도 몰라?”
“호오? 기드온 교수님도 무한 대련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스톨레 교수의 능청에 기드온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갈이가 심상치 않은 게 속이 꽤나 뒤집히는 모양이다.
“필시 나한테서 뭘 빼앗아 가려고 그러는 거겠지.”
“오호라. 내가 원하는 ‘무엇’이 기드온 교수님께 있나 보군요.”
“네놈은 언제나 그랬어. 언제나 내게 위선을 떨어댔어. 10년 전에도, 지금도.”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케케묵은 사연이 덤으로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이안은 얼른 복도의 모퉁이에 숨어 상황을 염탐했다.
교수실이 보이지는 않아도 소리만큼은 또렷해서 도청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고고한 척하는 네놈 속셈을 누가 모를 줄 알아?”
“알고 있다, 라.”
“흥. 가증스러운 자식. 시치미를 떼긴.”
기드온은 숨도 쉬지 않고 악다구니를 썼다.
“절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네놈이 원하는 건 절대!”
“그러다 몸져눕겠습니다. 사사건건 그렇게 광견병 걸린 개처럼 구시니.”
“퉷!”
“아무래도 교수님의 안정을 위해 제가 자리를 떠야 할 듯싶군요.”
유추해 보건대 기드온이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스톨레 교수가 원하는 무언가를.
그런데 꿍꿍이를 감춘 채로 말은 안 하고 알짱거린다?
당해보면 알 거다.
그것만큼 미치고 팔딱 뛸 일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부디, 기드온 교수님. 마음의 평화를 찾길 바라겠습니다.”
말로 아주 신경줄을 박박 긁어대고 있었다.
남의 속을 실컷 뒤집고선 스톨레 교수는 총총 연구실을 떠났다.
씩씩대는 기드온을 남겨둔 채로 말이다.
힐끔.
스톨레는 계단을 내려갈 때 모퉁이 쪽을 스치듯 보았다.
그쪽은…… 차폐 실드를 두른 이안이 숨어 있는 곳이었다.
* * *
수십 분 후.
이안은 이제 막 교수실에 당도한 것처럼 문을 두드렸다.
“기드온 교수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오, 이안. 어서 오거라.”
오늘도 기드온의 살인 미소는 유효했다.
악을 바락바락 지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사근사근한 말투는 덤이었고.
“내가 바쁜 널 공연히 부른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아무리 바빠도 교수님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안타깝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모두가 너처럼 예의를 알면 좋았을 것을.”
스톨레 교수를 저격한 말이었다.
이안은 대답을 웃음으로 때우며 조용히 적황색 소파에 앉았다.
색이 화려하고 무늬가 어지러운 소파도 그렇고, 교수실의 모든 것이 과했다.
눈을 어지럽히는 현란함은 정말 딱 기드온스러웠다.
‘속 빈 강정 같은 기드온을 닮았지.’
이안이 속으로 혀를 차며 자리 잡는 동안, 기드온이 아케랑코를 우려 이안 앞에 찻잔을 놓았다.
“요즘 정신없겠구나. 파라칸시스 시합을 준비하느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그거지. 최선을 다했다는 거.”
결과 우선주의인 놈이 말은 번드르르하다.
“아무래도 C반이라 우승은 힘들 테지만, 그보다 값진 것은 없을 것이다.”
“하나 교수님, 결과야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패는 까봐야 안다는 말처럼.”
“물론이지. 하지만 우승하지 못해도 상심하지 말려무나.”
“…….”
“덜떨어진 그것들과 넌 질적으로 다르니 말이다.”
“충고, 잘 새겨듣겠습니다. 교수님처럼 ‘고매하신’ 분이 콕 집어 말했을 땐 다 뜻이 있는 걸 테니까요.”
“항상 느끼지만 이안 넌 참 사람 보는 눈이 높구나.”
‘고매하다.’에 꽂힌 기드온의 입가가 위로 쭉 찢어졌다.
기분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게 눈에 확연히 보였다.
감정이 치솟자 주체할 수 없는지 기드온이 주둥이를 분주하게 열었다.
“커흠. 이 시기엔 학생들만 바쁠까, 교수들도 바쁘지.”
“교수님들의 노고가 큰 줄 압니다. 파라칸시스의 막바지 점검을 위해.”
“아닌 말로 먹고 똥 쌀 시간조차 없을 만큼 눈코 뜰 새 없지. 이런 판국에, 츠읏.”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이안 너도 알 것이다. 정령학 교수 말이다.”
기드온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레 다른 교수를 언급했다.
이는 뒷담을 시작하려고 시동을 걸었다는 뜻이었다.
이안을 만나면 어김없이 하는 짓이었다.
남을 까면서 희열을 얻고, 그들의 치부를 들춰내 자신을 높이려는 거였다.
이를 잘 아는 이안은 대화가 이어지도록 적절히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