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92화 (92/214)

제92화

“아. 정령학이라면 다섯 분인데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지?”

“시가에 환장하는 그놈 말이다. 입술이 얻어터진 것처럼 부푼 그놈.”

“아, 2학년 A반 담당이신?”

“그래, 그놈. 다들 열심인데, 그놈은 허구한 날 암시장이나 들락날락하더군. 시가 신제품이 나왔다나 어쨌다나.”

한심해서.

‘모두까기’인형답게 기드온은 연거푸 툴툴댔다.

“농땡이 피우는데 결과가 좋을 리가 있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놓고 사기를 당했다지 뭐냐.”

“운이 없으셨네요.”

“운이 없긴. 멍청한 거지. 쯔읏. 어디 멍청한 게 정령학 교수뿐일까.”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결계학 교수 말이다. 제 딸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약혼자가 있는데도 바람을 피워 망신을, 망신을.”

“…….”

“나한테 와서 하소연하는데 내가 그걸 들어주느라, 하아.”

이래서 기드온이 쓸모가 있다.

시시콜콜이라도, 교수들에 관한 정보를 바로바로 풀어주니까.

그래서 내버려 두는 중이었다.

결계 변형 사건의 주범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한데.

‘그대로 삼키자니, 내 목구멍을 틀어막을 놈이란 게 문제지.’

오래 옆에 둘 인간은 아니었다.

이안은 다시금 아케랑코를 홀짝이며 상냥하게 대꾸했다.

“그게 다, 다른 교수님들이 교수님을 의지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커흠. 내가 누구보다 현명하긴 하지.”

“예. 일원이 기대는 교수님이야말로 무리의 우두머리인 셈이지요.”

“무리의 우두머리라. 하하핫.”

기드온이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어젖혔다.

“내가 좀 그런 편이지. 그러니까 중앙 아카데미에서도 날 영입하려 안달을 내는 거 아니겠느냐.”

자뻑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불치병이었다.

헤벌쭉 거리는 기드온의 주둥이에 이안은 찬 서리 얹은 눈을 내리깔았다.

조소가 스몄으나 그도 잠깐.

이안은 금세 세상 살가운 제자로 둔갑해 기드온의 거드름에 동조했다.

“그래서 제가 기드온 교수님과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고개를 주억거린 기드온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갑작스러운 경계.

왜 그러나 했더니, 그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속닥거렸다.

하수구 같은 입 냄새가 났다.

“실은 말이다. 이안 너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단다.”

“제게 말입니까?”

“이안, 스톨레 그 자식이 며칠째 내 연구실을 기웃거리는 거 알고 있었느냐?”

“몰랐습니다.”

알고 있었지만 이안은 시치미를 뗐다.

교수의 행적을 속속들이 알았다간 괜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테니까.

“식은 고기를 찾는 하이에나 꼬라지가 어찌나 볼썽사나운지.”

“…….”

“그 꼬라지로 스톨레가 들쑤시는 이유를 넌 짐작도 못 할 것이다.”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놈이 찾는 게 있기 때문이지. 바로 나한테. 크하하핫.”

통쾌하다는 듯 파안대소한 기드온이 다시 속살거렸다.

“한데 말이지. 그놈이 기웃대니 불안해지더군. ‘만일’이 있으니 말이다.”

“…….”

“해서, 생각했지. 그놈이 원하는 걸 안전한 곳으로 옮기자고.”

말을 끝내자마자 기드온은 어깻죽지 부분의 셔츠를 잡아 뜯었다.

드드득.

이미 정한 바가 있는 양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뾰족한 물의 칼로 견갑골 쪽을 쭉 짼 후 살갗을 후비는 것까지 순식간이었다.

“크읏.”

기드온이 삼킨 신음만큼 핏물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살을 쑤신 그가 뽑아낸 무엇.

‘……열쇠?’

핏물과 살점이 엉킨 무엇은 글자가 새겨진 작은 열쇠였다.

“일단 받아라.”

기드온이 선선하게 내민 열쇠를 이안은 냉큼 받아 손에 쥐었다.

예감이 그랬다.

쓰임은 모르겠지만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라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묻지 않는구나.”

“어련히 필요할 때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역시 입만 나불거리는 방계들과는 차원이 다르군. 아주 달라.”

혼자 만족한 기드온의 목청이 더욱 은밀해졌다.

“이안,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늘 말씀하셔서 잘 알고 있습니다. ‘내 하나뿐인 제자’라고.”

“그래. 그래서이다. 내가 이 열쇠를 너한테 맡기는 건.”

비밀을 공유한 사이는 끈끈해질 수밖에 없다.

운명공동체가 되니까.

기드온 그가 노린 바도 ‘이거’였다.

“네가 묻지 않았지만 그 열쇠, 스톨레 그 음흉한 놈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란다. 크크큿.”

“…….”

“너를 전적으로 믿기 때문에 이 귀한 정보도 공유한 거란다.”

기드온은 역시 음흉했다.

믿는다면서, 이안에게 건넨 건 열쇠의 반쪽이었다.

나머지 반쪽과 결합해야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이런 자이지.’

절대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자였다.

“이안, 후일 스톨레를 부려먹을 일이 생기거든 그때 써먹거라.”

“감사합니다.”

“내 유일한 제자에게 주는 것인데 무에 아까울까.”

반쪽짜리 주면서 생색은.

“너에게 줄 것도 줬고. 이제 상처를 치유해야겠으니 그만 가보거라.”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쉬십시오, 교수님.”

이안은 열쇠를 꽉 쥐고서 느긋하게 교수실을 나섰다.

기드온이 준 물건을 살펴보고 싶었으나 결코, 서둘지 않았다.

지나치게 호기심을 보여 기드온의 거부감을 사면 안 되니까.

* * *

열쇠에 관심 없는 척하며 이안이 교수실을 나선 뒤였다.

“…….”

기드온은 창밖 너머 이안이 떠나는 모습을 집요하게 지켜보았다.

열쇠를 준 건 치밀한 계산하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열쇠.’

누군가를 파멸시킬 수 있는 비밀, 그것이 담긴 위험한 물건.

이 열쇠를 가진 채 그가 변방에 있을 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안을 따라 뷔트시겐으로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가 곧 뷔트시겐이 되고, 뷔트시겐이 그를 갖는 것인즉.

이는 곧, ‘그자’에게 위협 요소가 될 것이다.

뷔트시겐은 열쇠에 담긴 비밀을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그러니 이안을 방패막이 삼아야지.”

위험을 한쪽에 몰아 저는 자유로워지고, 남은 반쪽을 이용해 언제든 그자를 움직일 수도 있을 터.

그리되면 자신을 억압하고 있던 제약들이 풀릴 것이다.

“크크큿.”

음침한 웃음을 흘린 기드온은 열쇠에 담긴 비밀을 되감았다.

10년 전, 그가 중앙 아카데미의 초임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장마로 습한 어느 여름날 아카데미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장래가 촉망받던 방계의 여학생이 나체로 교정에 걸린 것.

눈알이 도려지고,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너덜거리고, 사방이 난자당한 채로 발견된 여학생.

말로 형용하기 힘든 몰골이었다.

이에 아카데미는 자체적으로 이 사건을 조사하는 부서를 조직했고, 정령사 협회에서도 조사단원이 파견되었다.

하지만 범인 색출에는 실패했다.

“내가 학장의 명으로 그자의 뒤치다꺼리를 전부 했기 때문이지.”

그자의 뒤를 닦는 게 ‘처음’도 아니었다.

중앙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기 전부터 줄곧 해왔던 짓이라 이미 이골이 난 상태.

그러니 증거인멸 따위야 눈감고도 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집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정령사 협회가 증거를 찾지 못했을까.

“조금만 더 버텼으면 그자의 눈에 들 수 있었는데.”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황금 줄, 그것이 기드온의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그래서 그것을 잡기만 하면 됐었는데, 그 줄이 싹둑 잘려버리고 말았다.

그딴 되먹지 못한 짓을 한 자야 빤하게도 스톨레 그놈이었다.

사건 조사단의 장이었던 스톨레.

그놈은 협회에서조차 포기한 사건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방계의 죽음이라 너무 쉬이 덮어버린 게 걸린다나, 뭐라나.

아주 영웅 납셨다.

그놈이 영웅 놀이를 과시한 이유가 단지 그것뿐일까.

“죽은 여학생이 클로에가 가장 아꼈던 제자라서 그랬겠지.”

아마 잘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직계인 클로에의 환심을 사면 출셋길이 열릴 것이라 여겼을 터.

음흉한 꿍꿍이를 가지고 있던 스톨레는 막무가내로 그를 쪼아댔다.

제가 뒤치다꺼리한 사실을 안다면서, 증거를 내놓으라고 말이다.

맡겨놓은 물건도 아니고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인지.

애먼 사람 잡던 스톨레는 결국 증거 확보에 실패하자 치졸한 짓을 자행했다.

학장을 꼬드겨 그를 변방의 에루리안으로 쫓아 보낸 것이다.

“치졸한 위선자 덕에 이딴 곳에서 내가 꼬박 10년을.”

제 능력을 썩히며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 후진 아카데미에서 말이다.

제가 가진 재주가 많아 더 치욕스럽고 분기가 치밀었던 나날들.

해묵은 과거를 더듬던 기드온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여태까지는 당했지만 이젠 내게 이안이 있으니.”

거칠 것 없었다.

더는 무서울 것도 없고.

* * *

“여기 걸린 술식이 뭔지 알겠어?”

이안은 살점이 닦여 깨끗해진 열쇠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열쇠를 이룬 글자들은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조합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글씨.

그렇다면 주목해야 할 건 열쇠에 걸린 술식 그 자체였다.

저와 같은 생각인지, 녹스 또한 열쇠를 세심하게 분석했다.

[흐음. 뭔가를 표시한 지도……? 아무래도 그런 종류의 술식 같은데 반쪽뿐이라…….]

“지도?”

[그마저도 정확하지 않다. 한데 설마 이것까지 풀어야 하는 거냐? 가뜩이나 요즘 골 아픈 일도 많은데.]

“아니.”

이안은 단호하게 자르며 녹스에게 열쇠를 건넸다.

“스톨레 교수가 찾는 게 이게 맞다면, 지금은 못 풀어.”

[필시 음흉한 기드온이 스톨레가 찾아낼 때를 대비했을 거다.]

“그러니까 일단 가지고 있어 봐. 나중에 생각하게.”

[그러자. 현재 중요한 건 네놈이 2학기를 잘 마무리하는 거다.]

“그렇지.”

파라칸시스 시합에서 우승하고 불의 통로를 뚫는 것.

가장 우선시해야 할 목표였다.

이것에만 전력을 쏟아야 할 때라 이안은 밀려오는 궁금증을 한편으로 밀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대신 후일을 위해 가장 안전한 장소인 녹스에게 열쇠를 맡겼다.

비록 자신의 등급 때문에 능력이 잠겼기로서니, 녀석은 수호자이다.

정령사와 정령을 통틀어 제일 강한 자.

그러니 이보다 안전한 보관 장소는 없었다.

“녹스 네가 가지고 있으면 뺏길 일은 없을 테니까.”

[에헴.]

“얼추 정리도 됐겠다. 자, 이제 종탑 가서 수련하자. 시간을 너무 뺏겼어.”

이안은 녹스의 잰 체를 발판 삼아 기숙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련할 생각에 발이 가뿐했다.

그렇게 건물을 돌아 뒤편에 있는 종탑 쪽으로 방향을 틀던 때였다.

“……어?”

이안의 동공에 웃고 있는 에이프릴이 선명하게 맺혔다.

에이프릴은 워프 게이트 앞에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밝은 얼굴과 해사한 분위기.

여느 날과 달리 입가에 깃든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뭔가를 털어내 버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흐른달까.

‘잘 지내고 있네.’

이안은 오랜만에 보는 에이프릴의 기색에 다소 안심했다.

사실 레기나 투표가 끝난 뒤로는 그녀와 부러 교류하지 않았다.

죽었어야 할 목숨을 살리며 운명을 뒤튼 게 걸렸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는, 백지 상태인 에이프릴의 앞날.

거기에 끼어들었다간 자칫 뭔가를 망칠 것 같아 거리를 두는 중이었다.

잘 살면 됐지, 이런 심상을 가진 채로 말이다.

이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에이프릴에게서 천천히 눈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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