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93화 (93/214)

제93화

“여어, 이안. 웬일이야?”

그 순간, 무리에 섞여 있던 낯익은 음색이 이안을 붙들었다.

그러고도 혹여 이안이 보지 못했을까 봐 격하게 손을 흔들어댔다.

“아……. 지나가는 길에 두 사람이 보여서.”

“캬캬캬. 나 말고 에이프릴이 보였겠지. 에이프릴이 워낙 예뻐서 시선 강탈이잖냐.”

“미인이 눈길을 사로잡는 건 당연하지.”

이안의 미끄덩한 언변에 올리브가 팔뚝에 돋은 닭살을 박박 문질렀다.

친구지만 감당이 안 되는 느끼함이었다.

“와아아아. 이건 진짜…….”

“왜? 너도 배우려고?”

“됐다. 그딴 느끼함, 너나 가지세요.”

“후후. 너희 둘은 볼 때마다 똑같다. 언제나 티격태격.”

올리브의 오두방정에 에이프릴이 머리카락을 넘기며 미소 지었다.

어쩐지 이 인원, 이 조합이 만드는 뭔가를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레기나 때는 늘 이렇게 몰려다녔으니까.

이안은 옅게 웃는 에이프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건넸다.

“근데 어디 가려고?”

“응. 집에서 긴급 연락이 와서 가려는 중에 올리브를 만났어.”

“긴급 연락?”

“무슨 일인진 나도 모르겠어. ‘당장 돌아와라.’라는 말만 적혀있어서.”

“…….”

슈튼하노버 가의 가주.

옛 주군을 배신하지 않은 충신이지만, 좋은 아비는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무관심하고 다소 강압적으로 구는 자였으니까.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이안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혹, 집에 가서 무슨 일이 생기거든 연락해.”

“……가출할 일이 생겨도?”

“해도 돼. 갈 데 없으면 우리 집에서 살면 되니까.”

“…….”

어쩐지 묘해진 분위기.

“넌 무슨 청혼을 그렇게 멋없게 하냐?”

그 사이를 가른 올리브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게슴츠레하게 뜬 두 눈.

‘흐흐흐’ 거리며 음침하게 흘리는 웃음.

올리브는 이안과 에이프릴을 번갈아 보며 잇몸을 까뒤집었다.

“오올. 두 사람~~~~~~ 성인식 치르고 바로 결혼하는 건가요?”

“까분다.”

“아! 이안 네 의견만 중요한 거 아니지. 에이프릴 어때?”

“응?”

“이안 말이야. 이놈이 허우대 멀쩡하지, 잘 생겼지, 말발 좋지,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어요. 걸핏하면 제 목숨 거는 거만 빼면.”

“후훗.”

올리브와 이안을 번갈아 본 에이프릴이 생긋 입꼬리를 올렸다.

위로 휘는 호선에 어쩐지 장난기가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위험한 남자? 내 취향이 아니야.”

“크큿. 이안 까였다. 까였어!”

에이프릴의 장난에 올리브가 손뼉을 치며 몸을 배배 꼬았다.

하여튼.

때리는 놈보다 말리는 놈이 더 밉다고 딱 그 짝이었다.

그 미운 등짝을 이안이 후려치려 하자, 올리브가 우다다 뒷걸음질을 쳤다.

‘까였어요오.’를 놀림조로 외치며.

경망스러운 앞태에 결국 이안이 웃고 만 그때, 에이프릴이 슬쩍 끼어들었다.

“난 이제 가봐야겠다, 이안.”

“……어, 그래. 조심히 잘 다녀오고.”

이안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든 에이프릴은 잊지 않고 올리브도 챙겼다.

그녀는 저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올리브를 향해 목청을 살짝 높였다.

“올리브, 다음에 또 보자.”

“응. 후딱 갔다 와. 네가 늦게 오면 우리 이안이 애탄다.”

올리브의 익살에 에이프릴은 또다시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의 꼬리만큼 말꼬리가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일까.

슈튼하노버 가주의 명을 받고 이곳에 온 마부가 초조한지 혀로 입술을 핥아댔다.

차마 재촉하지 못하고 혼자 애태우니 별수 있나.

더 질질 끌지 않고 에이프릴은 워프 게이트 너머로 삽시간에 사라졌다.

에이프릴을 태운 마차가 떠난 뒤.

이안은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는 올리브에게 성큼 다가갔다.

겁 없이 장난칠 땐 언제고, 녀석은 도로 슬금슬금 뒷걸음치고 있었다.

“이안, 나 바빠서 가봐야…….”

어딜.

바람으로 날래게 올리브의 팔을 잡아챈 이안은 입술 끝을 휘었다.

웃는다고 다 웃는 것이랴.

이안의 표정을 악마의 미소로 받아들인 올리브가 냅다 외쳤다.

“살려주십시오, 형님.”

“훗. 깐족 올리브, 내일 뭐 해.”

“응? 내일? 별거 없는데?”

“그럼 그라나토스에서 나랑 같이…….”

* * *

다음 날 이른 정오.

이안은 종탑을 나오며 뻐근한 목을 돌렸다.

마력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라 그런지, 여기만 들어갔다 나오면 사지가 굳는다.

“그래도 수련이 순탄하게 굴러…….”

[순탄은 개뿔.]

녹스가 콧방귀를 뀌며 노란 발을 통통 굴렸다.

[고작 발가락 다섯 개밖에 못 움직이면서 순타아안? 네놈이 언제부터 그렇게 욕심이 없었누?]

“역시 스승님. 갈굴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네.”

[내 갈굼은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그래서 내가 너 잘되라고 목에 피가 나도록…….]

녹스는 잔소리를 폭풍처럼 내뱉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50년산 알의 훈화 말씀.

질긴 잔소리는 저만치서 나타난 올리브의 알은 척에 ‘툭’하고 끊겨버렸다.

“이아아안.”

올리브가 특유의 발랄함을 끼고 폴짝폴짝 뛰어왔다.

녀석은 무척 신나 보였다.

오랜만에 둘이서만 사냥을 가자고 했던 것이 되게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왔어?”

“어디로 갈 거야, 이안. 숲의 동쪽, 아니면 자주 가는 남쪽?”

“중앙으로 가자. 아, 근데 올리브. 점심은 뭐 먹을지 생각해 봤어?”

“당연하지. 사냥하고 나면 네가 해주는 요리를 먹을 수 있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비어드 호그”

“또?”

“바싹하게 구운 돼지 뒷다리가 최고야. 내 입맛엔 그게 ‘딱’이거든.”

“그렇다면 뭐.”

둘은 사냥 후 할 요리에 집중하며 그라나토스로 향했다.

잔뜩 먹을 거 얘기만 늘어놓다 도착한 숲의 초입.

두 사람은 비어드 호그가 무리 지어 있는 곳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그 뒤 제일 맛있어 보이는 놈을 골라 점심용으로 콕 찍었다.

실한 표적도 정했겠다, 이제 막 사냥을 시작하려던 순간.

깜빡깜빡.

녹스의 날개 끝에 있는 문양이 절 좀 보라며 발광했다. 아주 미친 듯이.

“……추적진이?”

재빨리 마력을 회수한 이안은 추적진의 문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달과 해가 꼬리를 물고 있는 문양이 라임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는 기드온이 살의를 품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젠장!”

더 잴 것도 없이 이안은 숲 안쪽으로 내달렸다.

그의 다급한 질주에 올리브가 꼬리처럼 붙으며 목청껏 외쳤다.

“이안, 뭔데? 혼자 가지 말고 같이 가!”

* * *

그라나토스 동편.

기드온은 레브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질척한 숲을 걸었다.

폭설이 내린 뒤라 가시광이 유난하게 선연했다.

저 먼 곳의 이파리까지도 잘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뺏길 법도 하건만, 기드온은 한 곳만 주시했다.

연구를 거들라는 그의 요구에 군말 없이 따라온 레브 말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면서 레브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표정 탓인지, 아니면 유난히 맑은 날씨 탓인지 기드온의 염통에서 자꾸 거스러미가 일어났다.

미간을 꿈틀한 기드온은 조금 더 레브와의 거리를 좁혔다.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좋아서 붙는 게 아니라 목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때가 됐지.’

눈빛을 굳힌 기드온은 틈을 두고 말문을 열었다.

“히에로스는 천년 넘는 역사 동안 변한 적이 없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직계는 언제나 오만했고, 제 발밑 따위는 쳐다보지 않았지.”

“…….”

“그리고 하찮은 방계. 그들은 언제나 목숨을 직계에게 구걸해야 했다.”

기드온은 조소가 어린 입가를 비틀었다.

이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방계가 살아남는 법은 하나였다.

직계의 발바닥을 핥으며 사는 것.

그렇게 살았어도 든든한 줄 하나 만들지 못하고 변방으로 유배당했었다.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는 낙엽 신세, 그게 방계다.”

“그런 신세라도 노력하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푸핫. 노력? 노오력? 푸하하핫. 단단한 세상의 벽에 부딪혀봐야 깨지는 것은, 부딪히는 쪽이다.”

“…….”

“아르데슈, 망해버린 방계 가문의 너라면 충분히 알 터인데.”

“하나, 교수님.”

레브는 부러 말을 끊었다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나갔다.

“제 가문에서는 ‘세상의 척도에 순응하지 말아라. 그것이 네 자긍심이 되고, 생을 피우는 토대가 될 것이다.’라고 줄곧 가르칩니다.”

자긍심…….

이거였다.

기드온이 레브를 보며 줄곧 거슬렸던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방계가 가질 수 없는 특유의 자긍심, 이걸 이놈이 되먹지 못하게 지니고 있어서 그랬던 거였다.

“가르침? 그딴 걸로 네가 가진 고매한 긍지가 설명될까.”

불가능했다.

그래서 레브를 주시했던 거였다.

저런 놈은 절대 방계일 수 없으니까.

“예전에는 레브 아르데슈, 너의 정체가 참 궁금했었지.”

“제 정체가 교수님께 그렇게 중요…….”

“아, 대답은 됐다. 내가 분명 ‘예전’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

“지금은 네가 방계든, 직계든 관심이 없다. 어차피 너는 이제 이곳에 없을 테니까.”

묘한 말이었다.

기드온의 음침함이 낮게 깔려있달까.

“그리고 말이지. 이젠 굳이 널 발판 삼지 않아도, 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지. 내게 충성하는 제자가 있으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기드온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멈춤’이 신호였을까.

기드온의 그림자에서 말벌 형태의 물 정령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쐐애애액.

그러더니 레브에게 머리카락처럼 가는 침을 다짜고짜 쏘아댔다.

수천 개의 침.

허공을 매섭게 가른 침은 이내 구의 형태가 되더니 레브를 물샐 틈 없이 감쌌다.

방어도, 피할 새도 없었다.

[레브!]

레브가 갇힌 즉시, 레브의 정령이 구를 깨려고 얼음의 숨결을 내뿜었다.

하지만 숨이 닿는 곳마다 출렁이기만 할 뿐 구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헛된 몸부림을 보며 기드온이 비소를 흘렸다.

“어차피 소용없을 것이다. 내 ‘흐르는 뇌옥’은 완전무결하거든.”

흐르는 뇌옥.

오직 상대를 가두는 데에만 치중한 ‘속박기’이다.

최소 2등급 이상의 차이가 나야 파훼할 수 있는 기술.

완전무결에 가까운, 흐르는 뇌옥은 기드온의 비기 중 하나였다.

점점 조여오는 공기에도 레브는 마른 침을 삼키며 침착하려 애썼다.

“교수님 대체……?”

“이유가 궁금하냐? 네놈이 ‘우리’의 앞길에 방해만 되기 때문이다.”

더 말해 뭐하겠냐는 듯 기드온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자 뇌옥의 한쪽이 찌그러지더니 뾰족한 쇠꼬챙이 모양이 되었다.

빠른 형태 변환.

쇠꼬챙이로 변한 뇌옥은 질척한 땅에 깊숙이 흡착되었다.

단단히 고정된 후.

푸우욱.

흡착된 끝부분에서 갈라진 긴 사슬이 연달아 레브의 어깨를 꿰뚫었다.

관통한 그대로 사슬은 뇌옥 한쪽과 결합 되었다.

레브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하려는 것이다.

기드온의 의도대로 불과 몇십 초 만에 일어난 일에 레브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크으으읏.”

[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저항도 못 하고 당한 레브가 고통스러워하자, 그의 정령은 분노로 독이 올랐다.

결속자를 무려 두 번이나 보호하지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사슬에 묶인 정령은 충혈된 눈으로 기드온을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대의 독기가 퍽 성에 차나 보다.

무력감을 음미하듯 기드온이 가까이 다가와 레브를 내려다보았다.

핀에 꽂힌 나비를 보는 눈빛.

희열과 음습함이 버무려진 기드온의 낯짝이 무척 비열해 보였다.

“넌 네 존재 자체가 문제야. 살아있으면 방해만 될 뿐이니 죽어줘야겠다.”

“대체 뭐가…… 방해된단 겁니까.”

“곧 죽을 놈이 알아 뭐할까.”

기드온은 레브의 물음을 무시하며 마름모꼴 형태의 플라스크를 꺼내 들었다.

병 안에 담긴 건 타르처럼 끈적끈적하고 거무튀튀한 액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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