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94화 (94/214)

제94화

……시체 썩는 냄새?

어쩐지 불길했다.

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냄새에 레브는 액체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기드온 뜻대로 될 것이다.

벗어나야겠단 생각이 들어 레브가 발버둥 치는 사이.

촤악. 촤아악.

기드온이 플라스크 안에 든 액체를 망설이지 않고 레브에게 흩뿌렸다.

기이한 열망이 얼룩진 손길에 레브의 정수리부터 젖어 들어갔다.

상체를 뒤덮은 액체가 점성으로 인해 발끝까지 늘어졌다.

“기드온!”

“크하하하하하핫. 그 액체를 뒤집어쓴 네놈이라면 ‘그것’이 환장할 것이다.”

레브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기드온은 광소를 터트렸다.

속박에서 벗어나려 추하게 몸부림치는 레브의 몰골.

그걸 보고 있자니 10년 묵은 체증이 쑥 하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아. 긍지라고 했던가? 그래, 긍지를 가진 채 뒈져라.”

기드온은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턴 후 빈 플라스크를 내던졌다.

챙그랑.

플라스크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짐과 동시에였다.

우우웅.

깨지는 소리에 반응한 듯, 쇠꼬챙이가 꽂힌 바닥 주위로 교묘히 감춰져 있던 것이 드러났다.

각종 도형이 뒤엉킨 소환진.

남색 진에 파편이 스며들자, 지진이라도 온 것처럼 땅이 요동쳤다.

급기야 땅이 갈라지며 나무의 뿌리까지 속살을 내보였다.

그때에야 ‘뚝’, 말 그대로 지진이 뚝 하고 멈추었다.

숨 막히는 적막.

그리고 폐부를 찔러오는 한기가 정수리까지 차오른 그 순간이었다.

댕, 대앵-.

묵직한 종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크크큿. 왔군. 진짜 왔어. 그 노파 년이 나한테 사기 친 줄 알았더니만.”

뜻 모를 소리를 뱉은 기드온이 부랴부랴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뭔가 큰일을 쳐놓고 혼자 내빼는 모양새였다.

피에 젖은 종이가 예민하게 찢기는 소리가 울린 후.

“…….”

레브의 코앞에 커다란 무지개 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른 다섯의 키를 합친 크기였다.

“……세르펜.”

재앙의 등장에 레브는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마력을 먹는 뱀, 세르펜.

세르펜은 마력만 집어삼키며 몸집을 부풀리는 속성을 가진 ‘정령’이다.

물론 몸집만 크다고 재앙이라 불리는 건 아니다.

일정량의 마력을 섭취하면 세르펜의 꼬리가 ‘하얘지며’ 종이 울리는데, 이 종이 울면 반경 328야드(300m) 내에 있는 모든 마력이 흡수당하기 때문이다.

이 특질로 인해 세르펜이 나타나면 일대는 초토화 된다.

정령사든, 정령이든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잡아먹히니까.

쉬이익.

먹이를 발견한 기쁨에 세르펜이 머리통을 흔들며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빌어먹을!”

이대로 꼼짝없이 죽겠다 싶던 찰나.

쇄애애액.

빛의 속도로 ‘새까만 검’이 날아들어 레브 앞을 가로막았다.

* * *

“텔로스?”

2장로가 이안에게 주었다는 검이었다.

절묘한 등장에 레브의 반가움이 커지던 순간이었다.

촤라라라락.

새까만 검이 수십 자루로 증식하며 뇌옥 앞에 ‘방벽’을 만들었다.

그 즉시 방벽 위로 세르펜의 아가리가 깊숙하게 내리꽂혔다.

터엉.

하지만 표적을 삼키지 못하고 방벽에 부딪혀 그대로 세르펜의 머리통이 튕겨 나갔다.

얼마나 강도가 셌는지 세르펜이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렸다.

그 틈을 노려 이안이 레브가 있는 감옥 근처까지 접근했다.

“레브, 살아있냐?”

이안의 능청맞은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레브는 갸름해지던 눈꼬리를 크게 치뜨며 대꾸를 했다.

“하마터면 지옥 갈 뻔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어쭈? 목숨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네.”

“긴말 필요 없고. 내 어깨에 꽂혀있는 이 사슬 쪼가리 좀 빼 봐.”

레브가 힘에 부친 듯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저렇게 꼬챙이 신세로 계속 있다간 과다 출혈로 죽을 판이었다.

세르펜한테 먹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단은 레브의 운신이 자유로워지는 게 먼저였다.

‘근데 카르디아 1성이 만든 뇌옥을 어떻게 파훼하지?’

이안은 눈알을 굴려 레브와 세르펜을 번갈아 보았다.

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저 뱀이라면…….

카르디아 3성인 저 뱀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레브, 일단 텔로스로 만든 방벽을 거둬야겠다.”

“아…… 뇌옥을 깨려고?”

“어. 위험하긴 한데 저 뱀이면 가능할 것 같아서.”

“그럼 그렇게 하자. 후우. 뇌옥을 깨야 도망을 가든 뭘 하든 하지.”

“레브 넌 물의 보호막으로 최대한 널 감싸. 뇌옥이 깨지면 내가 바로 널 끌어당길 테니까. 마력을 쓰면 안 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자 아가리에 머리통을 들이미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 수 밖에 없는 게 지금은 녹스가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녹스 자체가 가진 짙은 마력이 세르펜에게는 진수성찬이니까.

‘위험하긴 하지만…….’

짧게 숨을 내쉰 이안은 서서히 방벽을 거둬들였다.

그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세르펜이 레브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건 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액체의 향에 절은 레브만 보이는 것처럼 집요하게 굴었다.

콰아앙!

또다시 세르펜의 아가리가 뇌옥을 강타했다.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억센 몸부림은 효과가 탁월했다.

몇 번 치지 않았는데도 뇌옥에 금방 금이 갔으니까.

캬아아아악!

곧 과실을 딸 수 있다 여긴 탓인지 세르펜의 포효가 한층 짙어졌다.

그 후 다시금 내려친 뇌옥.

땅과 하늘을 뒤흔드는 일격에 뇌옥이 달걀처럼 깨져버렸다.

‘지금!’

비산하는 파편 사이로 이안이 보낸 바람이 긴박하게 유영했다.

비틀대는 레브를 잡아챈 바람의 손길.

그 손길을 도우려 사냥개가 잽싸게 레브의 목덜미를 물었다.

“텔로스!”

이안이 검을 부르자, 파르르 떤 검이 세르펜 앞에 다시 방벽을 세웠다.

사냥개가 뱀과 간격을 벌릴 수 있게 시간을 벌려는 것.

“후우. 이 이상 마력을 써선 안 되겠다.”

세르펜의 덩치가 아까보다 한 뼘만큼이나 더 커져 있었다.

고작 몇 초 운용된 마력을 먹었을 뿐인데 저리 커질 줄이야.

괜히 정령사가 세르펜을 맞닥뜨리면 무력한 게 아니었다.

마력이 아닌 물리 공격만으로 잡아야 한다는 제약 탓이었다.

“…….”

몸집이 커진 세르펜의 움직임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본디 마력에 민감한 만큼 그걸 흡수하느라 느리고 둔중한 것도 습성이었다.

한숨 돌릴 틈이 생긴 셈.

눈짓을 교환한 이안과 레브는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곧장 내달렸다.

“일단 중앙으로 가자, 레브.”

“중앙? 알았어. 거긴 사람이 없으니 민폐 끼칠 일은 없겠다.”

고개를 끄덕인 레브는 자신의 몰골을 훑어보았다.

끈적한 액체들로 꾀죄죄했다.

무엇보다 심한 건 코가 마비될 것 같은 냄새였다.

바람을 역행한 질주로 시체 썩는 역한 향기가 더 강하게 났다.

이 냄새, 세르펜이 환장하는 향.

씻는다고 뱀이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역시나.

쉬익. 쉬이이익!

소강상태였던 세르펜이 다시 쫓아오는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식은땀이 났다.

축축한 뱀의 혓바닥이 등줄기를 핥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근데, 이안. 도망가 봤자 소용이 없는데 어떡하지?”

“아, 네가 뒤집어쓴 액체 때문에?”

“응. 아마 내가 루하흐까지 도망가도 쫓아올걸.”

“최선은 저걸 죽이는 건데…….”

“그러려면 그게 있어야지 않아? ‘투르다 사막’에서만 나는 ‘고르곤 나무’ 말이야. 몇 그루 없는 그걸 지금 당장 어디서…….”

“그거, 이미 올리브가 가지러 갔어.”

“……응?”

“기숙사 내 가죽 가방에 있거든.”

“아…… 그 가방.”

“후우. 늦네. 그거 가지고 중앙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캬아아아악!

이안의 중얼거림에 대꾸하듯 세르펜이 새된 노성을 내질렀다.

……오라는 놈은 안 오고 미운 놈이 놀자며 자꾸 치대는 꼴이었다.

대기를 뒤트는 노성이 끝나자 세르펜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심지어 서늘한 공기가 바싹 건조해져 가서 흘끔 돌아봤더니…….

“젠장.”

독기가 그득인 세르펜이 일종의 ‘진화’를 하고 있었다.

공기를 태우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일어난 무지개색 비늘.

거기서 뿜어져 나온 진액이 풀에 닿자마자 풀이 샛노랗게 말라버렸다.

풀에 담긴 마력이 모조리 흡수당해버린 것이다.

저 진액에 살짝이라도 스치면 이안과 레브 역시 저 꼴이 날 것이다.

치이익.

사방으로 튀는 진액을 이리저리 피하며 이안은 미간을 구겼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진액뿐 아니라, 세르펜의 비늘이 표창처럼 회전하며 둘에게 쇄도했다.

끊임없이, 비늘을 다 벗겨 낼 심산인지 쉼 없이.

“…….”

올리브가 빨리 오지 않으면 이 자리가 무덤이 될 판이었다.

“올리브, 이 형님 죽는다!”

“올리브, 제발 빨리 와라!”

두 사람은 발이 안 보일 정도로 뛰며 오매불망 올리브를 찾았다.

몹시 간절한 그 기도에 응답을 준 건 올리브가 아닌 세르펜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세르펜.

두 사람을 낚아채려 세르펜이 광포하게 꼬리를 감아올렸다.

둥그렇게 말린 무지갯빛 꼬리가 매섭게 대기를 가른 그 순간.

후우우웅.

바람을 가르며 웬 나뭇가지 하나가 허공을 사납게 누볐다.

단면이 거칠거칠하고 울퉁불퉁한 감람색 나뭇가지.

그게 세르펜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혔다.

“고르곤 나무!”

세르펜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식물이다.

뱀이 흡수한 마력을 나무가 증진한 뒤 내부에서 폭발시키기 때문.

몸통을 관통당한 고통에 세르펜이 몸을 마구 뒤틀며 우짖었다.

대앵. 대애애애앵.

죽어가며 내는 절규였다.

고막을 찢는 종소리에도 이안의 가는 눈은 나뭇가지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방금까지 위협적이었던 세르펜이 한낱 나무에 저토록 무력했다.

바꿔 말하면 정령 뱀이 무력해졌다는 건 올리브가 왔다는 신호였다.

“미리 동선을 짜고 헤어지길 잘했다. 엇갈리지 않고…….”

이안은 나무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뭇가지를 던진 건 올리브가 아니라 의외의 인물이었다.

* * *

의외로 싱겁게 끝나버린 세르펜의 결말.

태산을 무너트리는 건 작은 돌멩이라고 달리 천적이겠는가.

나뭇가지 하나가 일으킨 폭발로 세르펜은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스톨레 교수님.”

“소환진이 그려진 현장을 보존해야겠으니, 다들 꼼짝 말고 기다리도록.”

스톨레 교수가 꽤 엄한 음색으로 말했다.

큰일을 당할 뻔한 학생을 혼자 돌려보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곁에 두고 보호하는 게 낫다고 여긴 것이겠지.

몇 번이나 당부한 교수는 현장이 훼손되지 않게 결계를 짜기 시작했다.

거창한 건 없었다.

그저 땅바닥에 술식을 위한 글자나 도형을 그렸을 뿐.

정말 대강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결과물은 놀라우리만치 정교했다.

‘역시 스톨레 교수님이다.’

아래쪽의 색이 강하고 위쪽이 흐릿한 결계가 만든 빛의 입자.

땅에서 시작해 하늘로 뻗어가는 막의 하늘거림이 무척 눈부셨다.

환상 같기도, 실제 같기도 한 형태.

그 막을 홀린 것처럼 보던 이안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계속 결계 짜기를 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우선해야 할 게 있었다.

레브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에 관해 묻는 것.

이안은 레브를 향해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설명해 보실까?”

“그래 보실까?”

이안뿐 아니라 허허실실인 올리브도 팔짱을 꼈다.

고르곤의 가지를 가지고 오던 녀석은 도중에 스톨레 교수를 만났다고 했다.

교수 또한 기드온을 찾고 있어 운이 좋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랬다.

호들갑 떨던 올리브의 얼굴에 스쳐 간 안도란.

“기드온 교수와 있을 때, 에루리안을 벗어나면 신호를 보내기로 하지 않았나?”

“그러지 않았나?”

“혼자 대처하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어쩌려고?”

이안의 타박에 올리브가 얄궂게 한 마디씩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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