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97화 (97/214)

제97화

“크히히히힛.”

기드온은 뱃속에서부터 새는 웃음을 어쩌지 못했다.

기드온의 몸통이 떨리자 덩달아 그의 손목에 채워진 구속구의 사슬도 함께 떨렸다.

절그락절그락.

둔탁한 마찰음은 철판을 긁는 것처럼 귓가를 후벼팠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소음이었다.

하지만 기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름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면이 석벽인 좁은 공간.

이곳에서 허용된 유일한 빛은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뿐이었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고이는 침상으로 기드온의 시선이 옮겨갔다.

침상은 오래되긴 했어도 딱딱하지는 않았다.

그건 침상 한편에 놓인 모포 역시 마찬가지라 그리 얇지 않고 도톰했다.

거기다 얼룩 같은 것도 없는 것이 아주 깨끗했다.

아무래도 환경이 청결하지 못하면 병이 생길 테니, 그것을 염려해 감옥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것이리라.

“하여튼 결벽증 환자들 같으니라고. 짜증 나는 치들이긴 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기드온에게 감옥의 청결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단 하나. 이 감옥을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키키킥. 일반 감옥인 걸 보니 내 말이 먹혔나 보군. 스톨레 그 자식에게.”

정령사 협회의 감옥은 두 개로 나뉜다.

일반 감옥과 지하 감옥.

일반은 누구나 짐작하다시피 경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가둔다.

기껏해야 술값을 내지 않고 행패를 부렸다던가, 정령사의 품위를 손상했다던가 하는.

반면 지하는 중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가둔다.

특히 ‘시지포나’로 불리는 지하 2층.

거기는 극악한 범죄자나, 재판 없이 즉결 처분에 처하는 자들만 모아두는 곳이다.

본디 기드온의 죄명대로라면 시지포나 행이지만.

“돌아가는 상황대로라면 곧 나갈 수 있겠어.”

기드온은 침상 끄트머리에 느긋하게 앉으며 중얼거렸다.

일반 감옥, 그것도 ‘독실’을 준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정령사 협회가 그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그치들과의 협상이 가능했던 건 물렁한 스톨레 덕이었다.

<내가 한 일을 무마시켜 줄 자에게 ‘이것’만 전해주면, 스톨레 네놈이 원하는 걸 주지.>

이곳에 도착하기 전, 스톨레와 거래를 했었다.

그놈이 원하는 건 단순해서 어려울 것 없었다.

10년 전 중앙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그 사건’에 대한 증거였으니까.

그땐 스톨레가 쪼아대도 딱 잡아뗐지만 실제로 증거는 제 손안에 있었다.

그자의 뒤치다꺼리를 할 때마다 만일을 위해 모아두었으니까.

그리고 그 증거들을 남몰래 숨긴 다음, 은닉 장소가 표시된 지도를 열쇠에 담아 두었었다.

“스톨레 그놈도 별수 없군. 원하는 걸 얻으려 끔찍이도 싫어하는 내 말을 들어주다니.”

작히도 열쇠가 얻고 싶긴 한가 보다.

‘그자’를 움직일 ‘증거품’을 이다지도 빨리 협회장에게 건넬 줄이야.

기드온은 스톨레가 우스워 비소를 날렸다.

멍청한 스톨레는 열쇠만 얻으면 다 될 줄 알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엇도 알아낼 수 없다.

왜냐면 그놈이 받은 열쇠는 이안에게 준 열쇠와 결합해야 온전한 지도가 되기 때문이다.

“크핫. 남은 반쪽이 나한테 있는 줄 알고.”

스톨레는 남은 반쪽을 얻기 위해 앞으로도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바로 이거였다.

열쇠까지 만들며 케케묵은 증거를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쓸모가 있을까 해서다.

‘언젠가’를 위한 대비책이었는데, 그 목적대로 목숨줄을 구명하게 되었다.

성공을 확신한 만큼 기드온의 웃음은 만족감이 진하게 녹아있었다.

“흐흐흐. 과연…… 정령사 협회장이 아끼는 제자란 건가?”

스톨레는 자신의 정체를 비밀이랍시고 감췄다.

뭐 사실 절반쯤은 비밀을 숨기는 것에 성공하긴 했다.

죽고 못 살게 어울려 다니는 클로에, 그 오만한 직계가 알지 못하니까.

그러나 기드온은 진즉 알고 있었다.

한 달, 혹은 몇 달 전이 아니라 10년 전부터.

어쩌다 알아챈 비밀을 떠벌리지 않은 까닭 또한 분명했다.

이 패를 쓸 곳이 있을까 하여.

목구멍이 간질간질해도 함구했는데 그러길 잘했다.

“그놈 덕분에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됐으니.”

목숨만 건졌을까.

감옥을 나가도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예정보다 앞당겨지기는 했지만 뷔트시겐으로 가면 된다.

그곳에 가면 이안의 스승으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

“크흐흐흐흣.”

실실거리며 모포를 잡아당기던 기드온은 일순 멈칫했다.

……감옥 한쪽 귀퉁이, 어둑한 곳에서 검은 그림자가 쓰윽 일어났으니까.

“…….”

소리도 없이 다가온 그림자가 덮어버리는 흐릿한 그림자.

흐릿한 그림자가 자신의 것이라면, 그럼 남은 하나는 누구의 것일까.

기척 없는 방문에 기드온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몸뚱이가 발발 떨렸지만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기드온은 눈치챘다.

……공격을 안 한다?!

놀람을 추스른 기드온은 아군임을 확신하며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을 뗐다.

“스톨레 그놈이 보낸 건가?”

“…….”

“아니라면 이안? 내 제자의 요청에 뷔트시겐에서 사람을 보낸 거군.”

“…….”

그림자는 말이 없었다.

시커먼 두건으로 눈만 빼꼼 내놓은 채 기드온을 응시할 뿐.

찰나를 그러다가…….

저벅.

짙푸른 그림자가 숨결이 얽히는 지척까지 와선…… 스산하게 안광을 사선으로 굴렸다.

그러자 달빛 어린 홍채 안에서 담자색 번개가 일어났다.

“……!!”

명백한 공격의 신호라, 눈을 홉뜬 기드온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뷔트시겐에서 온 전령이 아니었다.

암살자였다!

‘……설마 그놈이?!’

잘그락.

예상치 못한 재앙을 피하려 기드온이 몸을 옆으로 굴리자, 구속구가 그를 잡아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사슬 탓에 손목이 아려왔다.

“크헉.”

비명을 내지른 기드온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추하게 구른 그를 암살자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감한 눈빛.

사람을 사람처럼 보지 않는 태도에 기드온이 이를 으드득 갈며 새되게 외쳤다.

“10년을 조용히 있었어! 무려 10년을!”

“…….”

“나와 맞지 않는 곳에서 더러운 방계들과 부대끼며 10년을!”

기드온의 악다구니에 ‘그제야’ 암살자가 더럽게 무거운 입을 열었다.

“모든 화는 네가 자초한 것이다, 기드온 디오크스.”

“뭐?! 무슨 개소리야!”

“너는 네 분수에 맞지 않게 ‘그분’의 비밀을 쥐고 있었다.”

“그거라도 없었으면 네놈들이…….”

“침묵할 거면 영원히 침묵했어야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상대의 입을 틀어막을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죽음’이었다.

“하. 애초 날 죽일 심산으로…… 독실에…….”

비정한 현실을 깨달은 기드온은 발발 떨며 무릎으로 기었다.

살고 싶었다.

이렇게 죽을 수 없어서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다.

어느샌가 활짝 열려 있는 문.

등불의 빛이 쏟아지는 저곳까지만 가면…….

채 열 걸음이 되지 않는 저기까지만 가면 살 수…….

푸욱.

기드온의 발버둥을 지켜보던 암살자가 잿불 감은 번개를 그의 심장에 내리꽂았다.

망설임 없는 일격.

단 한 번의 내리침에 기드온의 마력핵은 산산이 으깨져 버렸다.

“크흑!”

기드온은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연신 몸을 바르르 떨었다.

외마디 비명이 끝이었다.

오로지 침묵만을 남기며 허망하게 그의 목숨줄이 끊어져 갔다.

“…….”

사지가 늘어지며, 아니지, 죽어 가며 기드온이 한 생각은 그거였다.

억울하다고.

이 빌어먹을 세상에 방계로 태어난 것이 너무나 억울하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참히 죽지 않았을 거라고.

‘난 잘못이 없어. 썩어빠진 세상이…….’

원통함에 감기지 못한 기드온의 동공에 무언가가 어렸다.

가물가물한 빛을 뚫고 눅진하게 들어오는 새하얀 부츠들.

무심한 발걸음은 곧장 암살자의 발치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관?!

편집증을 보유한 미친놈들답게 관마저 새하얬다.

“……으로 보낼 것이다.”

* * *

“…….”

뷔트시겐 가주는 종탑에 올라 슈바츠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십자의 대로를 가로질러 가는 새하얀 마차였다.

……정령사 협회.

조금 전, 협회장의 수제자란 자가 협회원들 몇을 데리고 방문했었다.

<지난번 뷔트시겐의 적자를 감시했던 무례, 그것에 대한 빚을 갚으려 합니다. 부디 이것으로 노한 마음이 풀리셨으면 합니다.>

그러더니 손바닥만 한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쿠웅.

검은 바닥에 닿은 상자는 곧바로 축소 술식이 풀리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사다리꼴 모양의 관.

얼음장 같은 냉기가 풀풀 새는 관에 담긴 건…… 기드온이었다.

<…….>

<충분히 성에 차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동안 이 자로 인해 가주님의 적자가 ‘여러 번’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협회장님께서 준비한 것이니까요.>

하여튼 오만한 것들.

고개를 숙여도 뻣뻣한 것들을 가주는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자기들 사정 따라 죽여놓고 어디 와서 감히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성에 찰 것이라, 라…….>

가주의 서늘한 눈빛을 누가 감히 감당하랴.

협회원들은 움찔거리는 몸을 억누르기 바빴다.

<협회장에게 전해라. 협회의 사정에 뷔트시겐을 함부로 끼워 넣지 말라고.>

<…….>

<차후 이딴 무례를 허락 없이 저지를 시, 뷔트시겐을 적으로 돌린 것이라 간주할 것이다.>

빚 갚으러 왔다가 이자만 늘린 협회원들.

그들은 꽁무니가 빠져라, 뷔트시겐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가주는 미간에 박힌 주름을 펴지 못했다.

‘마력핵을 얻은 지 이제 고작 석 달이 됐을 뿐인데…….’

이안에게, 제 아들에게는 풍파가 많았다.

정령사 협회가 엮인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단기간에 많은 일이 휘몰아치고 있지만 정작 이안은 제게…….

‘아무것도 청하지 않지. 사사로운 부탁도, 하다못해 떼를 쓰는 것도.’

설령 부탁한다 해도 기껏해야 뭔가를 알아봐달라는 게 다였다.

그조차도 가만히 보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쌉쌀한 상념들을 안은 채, 가주는 마차가 떠난 거리를 메마르게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쯤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정령사 협회가 다녀갔다 들었습니다.”

가주의 뒤에서 1장로가 조용히 기척을 내며 말을 걸어왔다.

뒤돌아보지 않는 가주의 시선은 여전히 도시 한편에 머물러 있었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1장로.”

“배불리 먹고 손주들의 수련까지 봐준 참입니다.”

“그렇습니까. 막내 손주가 이제 여덟 살이 되었으니 한창 귀엽겠습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천둥벌거숭이들이라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1장로의 투박한 말에는 애정이 녹아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어찌 모르랴.

웃음기가 묻은 1장로의 어투로 표정을 짐작할 수 있어서, 가주의 입매가 위로 휘었다.

“골치라……. 기억하십니까, 1장로.”

“노부가 아둔하여 가주의 뜻을 다 헤아리진 못하겠습니다.”

“나도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었지요. 1장로의 손주들보다 나이가 더 든 후에도.”

“아아.”

“추임새는 그게 다입니까?”

“그럼 무어라 해야 할까요? 가주님께서 망둥이가 따로 없었다, 그리 말할까요. 아니면.”

“아니면?”

“나중에 가주님의 뒤통수만 봐도 손이 올라갔다, 그리 말할까요.”

“그 정도였습니까?”

“그 정도였습니다.”

“하하핫.”

가주는 그 날을 회상하는 듯 기꺼이 웃어젖혔다.

장로들이야 화병이 생겼겠지만, 그에겐 윤택한 날들이었다.

그날들이 토양이 되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을 만큼.

“돌이켜보면 말입니다. 내가 망둥이처럼 굴 수 있었던 게 믿는 구석이 있어서더군요.”

“믿는 구석이라 함은.”

“내 앞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내 뒤에는 장로님들이 계셨으니까요. 무서울 게 뭐 있겠습니까.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지.”

그랬다.

가주는 단 한 번도 일족이 자신을 미워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직계라서도, 적자라서도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밉살스러운 짓을 해도 종내에는 일족 모두 웃어주었기에.

그들의 애정이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했기에 그랬다.

그랬기에…… 제 아들 또한 일족에게 사랑받을 줄 알았더랬다.

즐거운 추억을 얘기하면서도 쓸쓸한 가주의 등.

어쩐지 작아 보이는 그 등을 보며 1장로는 이 대화의 핵심을 간파해냈다.

이안 뷔트시겐, 도련님에 관한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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