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98화 (98/214)

제98화

“가주께선 걱정인 모양입니다. 가주의 어릴 적과 달리 도련님이 혼자인 양 어른스러운 것이.”

“걱정입니다. 괜한 수심이 생길 만큼.”

“…….”

“이안의 어른스러움은 환경이 만든 것이니까요.”

마력핵이 없어 불완전했던 처지.

핵을 얻고 나선 후계자 자격이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처지.

이런 상태가 후계자가 된다고 나아질까.

아니다.

후계자가 되고 나면 또 가주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내야 할 것이다.

‘증명.’

가주 또한 하던 것이나, 이안이 해내야만 하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일족에게 처음부터 인정받았고 사랑받았기에.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으나…….”

가주의 눈꺼풀이 느리게 감겼다가 떠졌다.

“내 아이는 제가 딛고 선 발판이 불완전하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

“하여 자꾸만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는데…… 그런 증명은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

“이안 그 아이는 누구보다 일족을 사랑하는데.”

가주의 음색이 퍽 서글퍼졌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버팀목조차 되어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비로서도, 가주로서도.”

“…….”

“괜찮냐 물으면 늘 들려오는 답이 ‘괜찮다.’ 뿐이니. 그 말이…… 왜 이리 가슴 아픈지.”

“가주…….”

“차라리 망둥이처럼 날뛰며 내 속을 태우는 것이 천 번은 낫겠더이다.”

아니.

“차라리 떼를 썼으면 좋겠습니다. 얄미워서 쥐어박고 싶을 정도여도 좋으니 말입니다.”

가주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슈바츠를 내려다보았다.

아롱아롱 달린 마법등의 조도가 따스했다.

아마도 저곳의 풍경을 이루는 사람들 때문이겠지.

저리 따스한 모습을 보면 예전에는 응어리진 마음이 곧잘 풀렸었다.

하지만 오늘은 희한하게도 엉킨 속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

“하아.”

가주는 가라앉는 마음을 다스리려 숨을 크게 토해냈다.

그러나 실제 뱉어진 숨은 뭔가에 막힌 듯 억눌려 있었다.

답답했다.

아마 속이 더 꼬이는 건 인지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그가 가진 상념들은 모두 자기 연민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제 아이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이안에게 정보 하나라도 더 쥐여주는 것이 나을 터.

“그저…… 답답한 마음에 1장로를 붙잡고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이 노부가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넋두리 상대가 되어드리지요.”

“말씀은 고마우나,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 듯합니다.”

“…….”

“크흠. 혼자 실컷 떠들다 일 얘기를 하려니 멋쩍군요.”

가주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런 뒤 본래 1장로를 만나면 하려던 말을 차분하게 꺼냈다.

“조금 전 이안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

“스톨레 바르푸니, 그자에 대해 알아봐 달라 하더군요.”

“바르푸니 그자라면 협회장의 수제자였던 자 아닙니까?”

협회 차원에서 감춘 비밀이지만 1장로는 알고 있었다.

가주가 부재할 시 일족을 통솔해야 하는 대행자였으니까.

하여 웬만한 정보는 1장로인 자신의 선까지는 전달되었다.

“협회를 떠나며 스승과의 연도 끊었다 들었는데…….”

“흠.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협회가 사람을 길러내는 방식을 1장로도 알지 않습니까. 쉬이 끊어질 연은 아니지요.”

“알다마다요. 무엇이 됐든, 도련님이 알고 싶다 하니 그자에 대한 자료를 전부 다시 검토해봐야겠습니다.”

1장로는 허연 수염 끝을 비볐다.

용건이 끝났으니 그냥 갈까 하던 그는 걸음을 떼지 않았다.

정확히는 떼지 못했다.

머뭇거리다가 1장로는 곧은 눈을 하고선 말문을 열었다.

“가주님, 도련님에게도 기반이 있습니다. 조금 낡긴 했지만.”

“……응?”

“이 노부 말입니다. 저는 도련님이 망둥이처럼 날뛰든, 애늙은이처럼 굴든 개의치 않습니다.”

“…….”

“가주에게 조차 말하지 않은 심중이지만……. 제가 도련님의 그것이 되어드릴 겁니다.”

“1장로가?”

“가주께서 무엇을 심려하시는지 잘 압니다. 도련님이 그저 가주의 아들이라서, 혹은 제 입버릇처럼 뷔트시겐이란 한 뿌리에서 자란 가지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

“그런 이유들로 후계자를 지지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1장로의 음색에는 열기가 서렸다.

“이 노부는 도련님에게서 보았습니다. 뷔트시겐의 찬란한 앞날을. 하니 제 심중을 가주께서 헤아려 주셨으면 좋겠소.”

“크흠. 든든한 1장로가 계시는데…… 내가 공연한 투정을 부렸나 봅니다.”

1장로를 물끄러미 보던 가주의 메마른 표정이 걷혀갔다.

비 온 뒤에 갠 하늘처럼.

* * *

뷔트시겐을 다녀온 정령사 협회원들.

그들은 협회장을 만나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보고를 했다.

뷔트시겐 가주가 숨을 몇 번 세었는지까지.

지나치게 상세한 보고를 들은 협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협회의 사정에 뷔트시겐을 끼워 넣지 말라, 라……. 오만하군.”

“…….”

“하긴. 황제를 제하면 그다음 가는 권력자가 4대 가문의 가주이니 당연한 건가.”

협회장이 입술 끝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삐딱한 호선에 달린 건 경계, 끝없는 경계뿐이었다.

날이 선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는 제자들을 직시했다.

웬일로 협회장의 눈빛이 말하는 바가 명확해서 그 의미를 읽어내기가 쉬웠다.

절대 오만방자한 4대 가문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

그들을 매섭게 단속한 협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회장의 움직임을 따라 협회의 새하얀 정복이 물고기 비늘처럼 번득거렸다.

“어쨌든 기드온 디오크스의 일은 이렇게 마무리되었군.”

“천운이 따랐습니다, 스승님.”

“천운?”

“……기드온을 처리하면서 증거 또한 영원히 묻히지 않았습니까.”

“그 점에 한해선 운이 따르긴 했지.”

협회장은 ‘운’이라는 단어를 극도로 싫어한다.

실력이 없고, 나약한 자들이 찾는 핑계라 여기는 탓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성 많고, 영악해서 움츠리고만 있던 기드온이 움직임을 보였으니 말이다.

“본래는 증거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호해서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는데.”

놈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갑작스레 기드온이 사람을 흔적 없이 죽이는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암시장을 기웃기웃.

꿀통 찾는 곰 같은 몰골에 협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기드온이 혹할만한 꿀통을 제대로 던져준 것이다.

세르펜을 소환할 수 있는 저주 물약을 그놈의 손에 쥐여주는 것으로 말이다.

<이거면 그 목숨, 누구도 모르게 거둘 수 있을 겁니다. 한순간 입지요. 그를 지옥 꽃이 가득한 그곳으로 떨어트리는 것은 말입니다. 부디 이것으로 그대의 소원을 이루십시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데, 의심 많은 놈이라도 별수 있나.

누가 채갈세라 물약을 쥐고 기드온은 암시장을 허겁지겁 떠났더랬다.

“감축드립니다, 스승님.”

기드온을 옭아맬 함정을 실행했던 젊은 협회원이 협회장에게 말을 붙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협회장은 자신의 수제자를 내려다보았다.

건조한 눈빛에는 무엇도 담겨있지 않아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무엇을?”

“예?”

“무엇이 감축드릴 일이란 말이냐?”

“무려 10년을 골치 썩던 일이 아닙니까. 그것이 해결되었으니…….”

“되었다. 축하는 내가 아니라 ‘그분’이 받아야 하는 것을.”

“…….”

협회장은 쪽문을 열고 옆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통 모양의 작은 방 정중앙에는 워프 게이트만 덩그러니 있었다.

협회장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

워프 게이트로 향하는 그를 배웅하려 협회원들이 졸졸 붙따랐다.

조심스러웠다.

협회장의 직계 제자, 그러니까 자신들이 드나들어도 되는 공간임을 아는데도 유독 이곳만 오면 그랬다.

부츠의 굽에서 나는 소리조차 죽이며 걷는 몸짓에는 온통 긴장뿐이었다.

이를 알면서도 협회장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양 굴었다.

“상황이 해결되었으니 그분을 만나고 와야겠다.”

“‘호그의 휘파람’으로 가시는 겁니까?”

“눈을 피해 만나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지.”

“잘 다녀오십시오, 스승님.”

깍듯한 배웅을 받으며 워프 게이트에 선 협회장.

그는 이동하기 전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젊은 협회원을 불렀다.

“니하힐.”

“예, 스승님.”

“이안 뷔트시겐, 그자는 지금 어떻지?”

“중급 시험을 봐도 될 만한 수준에 도달한 줄로 압니다.”

“흐음. 그것뿐이냐?”

“미친 것처럼 수련만 하고 있다는 정보는 입수했으나 그 이상은…….”

“…….”

“그자의 호위를 맡은 알란이란 자의 경계가 삼엄해 더는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쯔읏. 뭔가 걸리는데…….”

협회장은 마뜩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에 들어간 눈썹처럼 콕콕 찔러대는 싸한 무엇.

뭔가가 이안에게 있는 것 같지만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계속 정보를 모아라.”

“예.”

“적당한 선에서. 어차피 뷔트시겐에서도 이쪽의 주시를 알고 있을 터이니,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명 받들겠습니다.”

* * *

“귀가 간지럽네. 누가 내 욕을 하나?”

이안은 귀를 후비적 팠다.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재깍 발등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보니…….

[크륵?]

‘대신 파 줄까?’ 하는 눈빛으로 사냥개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발톱으로 긁었다간 피고름 난다.

‘괜찮아.’라고 대꾸한 이안은 사냥개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다소 성긴 손길에는 언제나 그렇듯 잡다한 생각이 엉클어져 있었다.

“기드온이…….”

기드온이 죽었다.

아버지의 전갈에 의하면, 정령사 협회가 잘 지내보자는 의미로 그랬다는데, 글쎄?

그들이 사교적인 자들이던가.

원칙주의에다 고리타분하기까지 해서 사사건건 따지지나 않으면 다행인 것을.

그치들 특기는 ‘딴죽’이지 ‘사교’가 아니었다.

“어째 뒷맛이 여엉 찜찜하단 말이야.”

이 찜찜함이 배가 되는 건 기드온이 죽기 전 제게 준 물건 때문이었다.

바로 반쪽짜리 열쇠.

이게 스톨레 교수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기드온을 살살 구슬려 용도를 알아내려 했다.

그런데…….

“영영 용도를 일 길이 없어져 버렸네.”

이안의 중얼거림에 화음을 넣듯 불쑥 쾌활한 목소리가 난입했다.

“히히. 이안, 무서운 표정이다. 엄청 무서운 표정.”

“……아.”

검은 소 로르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그의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어쩐지 그 모습이 되게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로르가 기숙사로 거처를 옮긴 뒤부터 의외로 같이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으니까.

녀석이 숲 전역으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탓이었다.

“때려죽이고 싶은 놈이라도 있는 거야? 이안 네 표정이 딱 그건데.”

“있었는데, 없어졌어.”

“응?”

“내가 뭘 해보기도 전에 제풀에 자빠졌거든.”

“히히. 멍청한 놈이었구나?”

음흉하고 약삭빠른 기드온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놈이 제 무덤을 판 뒤로 듣는 소리는 ‘멍청하다.’뿐이었다.

새삼 그게 와닿아서 이안은 비소를 날리고 말았다.

“그러게. 멍청한 놈이었어. 제 안에 고이는 것들을 어쩌지 못하고 썩어버린.”

“어쨌건 그 멍청한 놈이 이제 이안 널 괴롭힐 수 없는 거지?”

“어.”

“그럼 된 거다.”

로르가 발랄하게 엉덩이를 실룩거리자 소 꼬리가 살랑거렸다.

“더 신경 쓰지 마라. 가치가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만큼 피곤한 건 없으니까.”

“띵언이네. 크으.”

“히히. 이래 봬도 한때 내가 명언제조기라 불렸다.”

“모르긴 몰라도, 피가 되고 살이 되긴 한다.”

“그니까. 나 겁나 도움 되지. 저 쓸모없는 수호자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그러니까 내가 네 옆에 있어야 한다니까.”

로르가 은근히 오래오래 같이 살자, 라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녹스가 읽고 있던 빨간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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