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99화 (99/214)

제99화

[웃기고 자빠졌네. 어디서 콩알만 한 뇌를 들이밀어?]

“저거, 저거 찔려서 그런다.”

[하던 대로 궁뎅이나 흔들며 저리 가버려.]

“내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치 않는 저 밴댕이 소갈딱지.”

[헛소리 말고 촌스러운 네 둥지로 끄지라고.]

“저 봐라, 이안. 저 유치함이 네 스승의 실체다.”

“…….”

둘의 유치한 공방에 이안은 끼어들지 않고 관망만 했다.

저럴 때 한쪽 편을 들면 영락없이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 꼴이 된다.

중재도 없으니 어련할까.

둘의 쌈박질은 한동안 끈덕지게 이어졌다.

좀체 끝이 보이지 않자, 돌연 로르가 제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들었다.

“짜안. 난 이안을 위해 이런 것도 준비한다.”

소 발굽에 고이 얹어진 무언가, 그건 ‘민트색’ 포멜로였다.

이 과일은 로르가 녹스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려는 일종의 증거였다.

[퉷. 레몬보다 더 신 민트색 포멜로를 어디다 들이밀어?]

“이안은 잘 먹던데? 수호자 네 꺼 아니니까 신경 끄셔.”

민트색 포멜로는 신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레몬의 한 5배 정도?

극한의 도전 정신이 필요한 과일이지만, 원산지가 그라나토스인 이상 이안에게는 도움이 되는 먹거리였다.

흔한 오렌지색 포멜로보다 마력량을 더 많이 채워 주기 때문이다.

오렌지색이 0.5할을 채워 준다면 민트색은 2할 정도?

민트색이 생각보다 귀해서 그렇지, 구할 수만 있다면 효율 면에서 월등히 좋다는 얘기이다.

“이안, 저 흐물한 물덩이 보다 내가 낫지.”

“크큿. 어느 때는?”

이안은 민트색 포멜로를 손으로 툭 건드렸다.

로르는 빨빨거리다 기숙사로 돌아올 때면 늘 저렇게 귀한 걸 내밀었다.

물론 그냥 주는 건 아니었다.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 해야만 그것들을 내주었다.

이번 역시 그랬다.

민트색 포멜로를 흔든 로르가 익살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안, 알지?”

“‘깃발 뺏기’ 하자는 거지?”

“히히. 내 등에 매달린 깃발 10개 중 2개만 뺏어봐라. 그럼 보상으로 이 포멜로를 다 줄게.”

“2개? 여태껏 1개도 성공한 적 없는데?”

“그러니까 이번에는 기본 기술만 쓸 거다. ‘필멸의 예속’만.”

귀가 솔깃해지는 ‘덫’이었다.

깃발 뺏기에 성공해 본 적 없지만 그래도 필멸의 예속이라면 비벼볼 만했다.

‘바람의 속삭임이 있으니 상대해 볼 순 있지.’

모든 기감을 동원해야만 감지할 수 있는 필멸의 예속.

필멸의 예속은 살아있는 있는 것의 생명을 흡수하고 종속해, 그것과 동일한 기운을 갖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나무의 생명을 흡수하면 시전자는 나무의 기운을 가지게 되고.

물의 생명을 흡수하면 물기운을 가지게 되어, 시전자를 그 자체로 만드는 기술이다.

그냥 도망이 아니라 ‘완벽한’ 도망인 셈.

그러니 이를 간파하기 위해선 바람이 내는 모든 소리를 수집하는 수밖에 없다.

‘덕분에 바람의 속삭임의 숙련도가 높아지고 있지.’

2현이었던 속삭임의 단계가 벌써 ‘3현’까지 급성장했다.

고되지만 유익한 깃발 뺏기였다.

고대종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어디 흔하랴.

천금을 줘도 못 살 기회라 이안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열의 넘치는 이안의 모습에 로르가 투레질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시작하자, 이안.”

* * *

이안이 민트색 포멜로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던 그 시각.

수련을 마친 가주는 집무실 앞에서 칼브란을 만났다.

“가주님.”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칼브란의 얼굴은 복잡다단했다.

언제나 웃는 낯인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아무래도 보고받을 게 많을 것 같아서 가주는 서둘러 집무실로 들어갔다.

“표정을 보아하니 보고가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군.”

“저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일단 말해 보게.”

가주는 대화의 예열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보부인 ‘늑대의 그림자’가 총력을 기울여 알아낸 정보들이 무엇인지.”

“우선 모든 것의 교차점인 에루리안, 그곳의 학장인 플로이드 에루리안에 관한 것부터 보고 드리겠습니다.”

“파보니 뭐가 나오던가?”

“특별할 게 없었습니다. 발리올에게서 에루리안을 강탈한 뒤부터 줄곧 살리카 가주의 명으로 학장을 역임했다는 것 빼곤.”

“이후의 행적은?”

“‘성’까지 ‘에루리안’으로 바꾸며 아카데미로 이주한 뒤론 외부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반년에 한 번, 살리카 가주를 만나긴 하지만.”

“흠.”

가주가 책상을 검지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생각을 정리할 때 나오는 버릇이라 칼브란은 잠시 기다렸다.

틈을 두었다가, 두드림이 느려지자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국, 그쪽은 살리카의 사주를 받는 자일 뿐이라 더 파봐야 나올 게 없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

“그래서 지시하신 대로 살리카 가주 쪽에 총력을 기울인바……, 상당히 희한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희한한 점?”

“이것을 얘기하려니 저도 기가 막히긴 합니다만……, 살리카 쪽에 4대 원소를 다룰 수 있는 자가 있었습니다.”

“……!?”

놀란 가주의 손놀림이 뚝 멈췄다.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말의 내용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군. 황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황가만이 가지는 힘을 쥐고 있다니 말일세.”

“예, 너무나 공교롭습니다.”

“그렇군. 4대 원소를 다루는 자였어. 살리카 그자가 가진 비장의 무기가.”

일순간 집무실의 공기가 날카로워졌다.

말소리마저 끊겼다.

얼마간 흐르는 침묵을 조심히 흘려보내다, 칼브란이 한층 은밀해진 어조로 대화를 다시 이어붙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 칼브란, 황가의 비밀을 더 열심히 캐보았습니다. 황태자의 측근인 ‘레와티움 가’를 낱낱이 조사해 보았지요.”

“그만한 가문이 없지. 황태자가 비밀 별장에 갈 때 유일하게 따라가는 자들이니.”

“예. 황태자와 생과 사를 함께하는 가문이니까요.”

레와티움 가.

‘황제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가문이다.

황태자가 태어나 황제가 되고, 죽을 때까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아서다.

오죽하면 황제의 근위대조차 저들이 황제에게서 다섯 발자국 이상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할까.

고로 황태자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가문이라 말할 수 있다.

칼브란은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이 가문의 특성상 뭔가를 캐내기가 심히 어려웠습니다.”

“하긴. 레와티움 가가 잔인하긴 하지. 황태자 곁에 두려고 아이가 10살이 되면…… 귀를 멀게 하고 말을 못 하게 만들지 않나.”

“……예. 그 상태로 황제의 곁을 지키다 같이 묻히기까지 하니까요.”

“그게 다 황가가 감춘 비밀을 지키려고 그러는 게 아니겠나.”

“그런 잔인함 때문에 레와티움 가를 벗어나려 하는 자도 있지 않습니까.”

즉, 정보를 캘 수 있는 유일한 구멍이라는 의미였다.

“어렵사리 가문에서 도망친 자를 추적한 끝에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그래, 무엇이 있던가.”

“황태자는…… 마력핵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답니다. 도련님처럼.”

“이안처럼……?”

“예. 줄곧 핵이 없다가, 핵을 얻는 시점이 일곱 살 탄신일 쯤이랍니다.”

“흠. 에루리안으로 가는 그때 말이군. 4대 가문을 순방하기 직전, 그때.”

가주의 동공이 이채를 띠었다.

황태자의 체질이 놀랍도록 이안과 똑같았다.

그럼 그리 태어난 후에 에루리안으로 가서 수호자를 얻는 거라면?

이 과정을 거쳐야만 4대 원소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진실을 꿰뚫어 본 가주의 눈매가 삽시간에 날카로워졌다.

“황가가 필사적으로 감추려 했던 것이 ‘이거’였어.”

“어쩌면 말입니다, 가주님. 뷔트시겐에 남겨진 밀서의 의도가…….”

“‘그 힘’을…… 이안이 얻길 바란 것일지도 모르겠네.”

“한데 대체 누가…… 그런?”

“누가 그랬건, 그 의도에 담긴 건 명백한 ‘선의’이네. 그러니 의문이 풀린 지금 우선 따져야 할 건 하나일세.”

“혹, 4대 원소를 다루는 자가 둘이란 것 말입니까?”

“수호자가 하나인데, 힘을 다루는 자가 둘일 리 없지.”

“도련님의 수호자는 ‘진짜’였습니다. 무저갱 같은 특유의 기운은 흉내쟁이 무지개 정령이라도 따라 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살리카 쪽이 ‘가짜’겠군요.”

칼브란과 가주의 생각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치했다.

* * *

“역시 대단하시다.”

이안은 아버지와 통신을 마치고 네케시투도관을 나오며 연신 감탄했다.

한번 정보를 모으기 시작하자 거침없었다.

황실이 감춘 비밀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합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심지어 도출하기까지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역시.

천외천이라 불리는 가주의 ‘격’이란 게 무엇인지, 이안은 새삼 실감했다.

까마득하다.

그 깊이가 아득하게 멀어서 숨통마저 막힐 지경이었다.

“……후우.”

부러 숨을 들이켠 이안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아까는 아버지의 형언할 수 없는 격에 압도당해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뭐 걸리는 게 있는 게냐?]

“아버지 안색이 좀 칙칙하달까.”

아버지의 낯빛이 이전보다 좋지 못했다.

수심이 들어차 있는 것이 뭔가 해결치 못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세상 무거운 정보들을 알아냈으니 가주로서 근심이 많을 수도 있지.]

“그런 류는 아닌 것 같았어. 우리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열흘간 흙바닥에서 굴러도 잘난 외모가 결코, 죽지 않는 분이시거든.”

[…….]

“그런 분이신데, 저 정도로 얼굴이 까칠해지신 걸 보면……. 으흠.”

이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진지해지는 꼴을 보니 또 혼자 애먼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대략 짐작해 보자면.

‘가뜩이나 바쁘신 분한테 내가 너무 많은 부담을 지웠나? 이런저런 부탁을 너무 시도 때도 없이 해서?’

이런 헛생각을 하고 있달까.

[허허. 헛똑똑이 같으니라고.]

녹스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녀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신기할 정도로 제 주변의 모든 일을 꿰뚫고 있는 놈이었다.

한데 제 아비에 대한 것만큼은 어찌 저다지도 모를 수 있을까.

녹스는 아둔한 제자를 일깨우려고 이안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네가 생각하는 거, 그런 거 아니다.]

“……아니라고?”

[네 아비는 집무에 치여 죽을지라도, 네가 부탁하는 걸 더 좋아할 게다. 워낙에 팔불출이라.]

“그래도 아버지의 빛나는 외모를 보존하려면 나라도…….”

[됐고. 네놈이 아비의 마음을 알아?]

“꼭 애들 서넛은 키워본 사람처럼 말씀하시네?”

[헹. 내 손으로 키워내 결혼시킨 황제 새끼들이 몇인데, 그거 하나 모를까.]

녹스는 재차 이안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세상 혼자 사는 놈처럼 굴지 말아라. 때로는 떼도 좀 쓰고, 사고도 쳐가며 네 나이대에 맞게 행동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그게 네 아비가 바라는 것일 테고.]

“…….”

녹스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서 이안은 눈매를 가름하게 떴다.

골몰하는 동공이 한순간에 수축했다.

생트집을 잡을 수 없게 녹스의 말이 완벽히 타당한 데서 오는 반응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말씀.”

[에헴.]

녹스는 멋진 척을 위해 말을 아꼈다.

이 이상 혓바닥이 길어봐야 설교에 잔소리가 될 뿐이다.

그래서 입을 다문 녹스는 저를 보고 있는 이안을 가만히 직시했다.

[…….]

녀석의 유리알 같은 동공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푸른 빛에는 그동안 헤아리지 못하고 있던 것까지 녹아 있었다.

흡사 노인 같은 그것을 보고 있으니…… 녹스의 뇌리에 ‘불현듯’ 잊고 있던 것이 튀어 올랐다.

그동안은 시간에 치이며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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