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00화 (100/214)

제100화

녹스는 노란 앞발을 까닥까닥 굴렸다.

[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주제긴 하다만, 뭐 하나만 묻자.]

“물어보십시오.”

[네 눈알 말이다.]

“내 눈알?”

[그래, 네 눈. 거기에 분명히 ‘시간의 서’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 않았든?]

“그랬지.”

[그랬지? 허어어어. 다시 들어도 놀랍다. 시간의 서라니.]

“그게 그렇게 놀라운가?”

[당연하지. 그게 새겨진 것도 놀라운데, 지금 네 눈에 그 표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게 더 기막히다.]

“뭘 또 기막히기까지.”

[이놈 보게? 하! 진짜 나한테 할 말 없어?]

녹스는 매섭게 추궁했다.

오늘 가주와의 대화를 듣고 나니 더욱 확실해졌다.

녀석에겐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는 것이.

뷔트시겐의 가주조차 총력을 기울여야 알아내는 정보들, 그마저도 이안은 예언자처럼 모조리 알고 있지 않던가.

하다 못 해 황실의 비밀인 저에 관한 것까지도 전부 말이다.

“할 말…….”

이안은 대답을 기다리는 녹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 대놓고 물어오는데 침묵으로 일관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질질 끌지 않고 답을 줘야 할 때인 것 같았다.

다른 무엇보다 벌써 학기 말이었다.

이는 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에루리안을 벗어나 ‘바깥’으로.

바깥에 나간다는 건 언제든 살리카 가주와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이다.

부딪히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말이고.

그럴 때 과연 지난 생을 빼고 말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지금이라면……’

적어도 녹스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비밀을 공유하면, 앞으로 닥칠 일을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을 터.

물론 그것만을 위해 진실을 털어놓으려는 건 아니었다.

숨김없이 믿음을 주고 싶었다.

등을 맡길 수 있는 아군만큼 든든한 건 없으니까.

아버지에게는 칼브란이 있고, 칼브란에게는 아버지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천천히 입을 뗐다.

“사실 조만간 말을 하려고 했어. 그랬으니 내가 ‘시간의 서’에 관한 것도 슬쩍 흘렸지.”

[그런데?]

“이게 좀 복잡해.”

[왜. 섣불리 믿기 힘든 무언가가 있는 게냐?]

“맞아. 어중간하게 풀 만한 일은 아니라서. 그 때문에 ‘오쿨루스’가 필요해.”

[오쿨루스? 동쪽 관리자? 속이 시커멓고 음흉한 그놈?]

“어. 시간의 서를 설명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그놈의 꿈을 통해 내게 알려주겠다?]

“백 마디 말보다 그게 더 나으니까.”

[……끄응. 오쿨루스라.]

녹스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오쿨루스는 태생적으로 저와 안 맞는 놈이었다.

음흉하기가 세상 어디에 내놔도 제일가는 놈이었으니까.

물론 여태 싸매고 있던 의문이 풀리는 건 썩 좋았다.

좋은데, 속내를 알 수 없는 그놈은 영 껄끄러웠다.

[하아아아아.]

“한숨은 그만 쉬시고, 말 나온 김에 당장 가자.”

[……당장?]

녹스의 장탄식을 추진력 삼아 이안은 거침없이 숲으로 나아갔다.

걸음의 방향은 동쪽이었다.

사실 녹스가 궁금해하는 부분은 말로 풀어도 된다.

하지만 ‘나 회귀했어.’를 말로 설명해내기가 참으로 난감했다.

백이면 백 붙잡고 물어보면 미쳤다고 할 얘기였으니까.

어슬렁거리는 이안의 걸음걸이.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데, 녹스는 등허리가 찌르르해지는 것 같았다.

어떤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안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는 것이, 여태까지와는 결이 다를 것이라는 걸.

[한데 말이다, 이안. 오쿨루스는 쉬이 만날 수 없다.]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네.”

[아니, 이번은 진짜 경우가 다르다니까. 오쿨루스가 탐낼만한 ‘과거’, 그게 없으면 만날 수조차 없다.]

“흐음. 탐낼만한 과거라…….”

[이안 네가 마력핵 없이 힘들게 여기까지 온 건 알겠다만…….]

“오쿨루스가 탐낼 과거는 아니다?”

[네 노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쿨루스 그놈이 아주 의뭉스러워서 그렇지.]

쌓인 게 많은지 녹스가 쉬지 않고 주절거렸다.

[그 기린 놈이 괜히 ‘미몽의 포식자’라고 불리는 줄 아느냐?]

“…….”

[놈이 들여다본 과거가 끝까지 흥미진진하지 못하고, 제 성에 안 차면 정신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등가교환을 확실히 하는 미친놈이지.]

“…….”

[그놈은 남의 아픈 과거를 ‘미식’으로 표현하는 괴팍한 놈이라니까.]

“음. 그러니까 더더욱 날 마음에 들어할 걸.”

* * *

그라나토스 동편, 동쪽 관리자의 영역.

[괴팍한 기린 놈을 닮아서 둥지도 꼭 뭣 같다.]

“상상했던 거랑 다르게 뭔가 묘한 느낌인데?”

이안은 툴툴대는 녹스의 눈길을 따라 거대한 ‘미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걸 단순히 크다고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무 위로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 울창함은 장엄함과 닮아있었다.

무척 신성한 분위기.

“녹스, 뭔가 있어 보이지 않아?”

[있어 보이긴 개뿔. 나무뿌리가 음침하게 꼬인 게, 에잉!]

“큭큭. 삐딱선 제대로 타셨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으으. 들어가기 싫다. 그놈 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이안은 밑동에 난 작은 구멍으로 다가가 안을 살폈다.

성인이 못 들어갈 정도는 아니나 체구가 작지 않으면 딱 끼기 좋은 크기였다.

끙차, 앓는 소리를 낸 이안은 나무뿌리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잔뜩 뻗쳐있는 잔뿌리에, 얼굴이며 팔이 거칠게 긁히면서 생채기가 났다.

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안은 꿋꿋이 기어나갔다.

얼마 뒤, 그의 앞에 드디어 양껏 쪼그린 몸을 펼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비좁지만 곧은 흙길.

습한 흙냄새가 밀려오는 길은 끝을 알 수가 없었다.

흐린 듯 아른거리는 빛이 이정표처럼 그 끝을 알려주어도 마찬가지였다.

이정표조차 도통 가까운 건지, 먼 건지 가늠할 수 없어서 더더욱 그랬다.

“일단 저곳까지 가보자.”

[분위기가 영 구린 게 귀신 나올 것 같은데.]

“훗. 그 자유분방한 얼굴에도 귀신이 무서우신가.”

[헹. 귀신보다 무서운 놈이 있어서 그런다. 더 말해 뭐할까. 네놈도 그놈을 만나보면 알게 될 게다.]

이안은 샐쭉거리는 녹스를 풍경처럼 바라보며 나아갔다.

흙바닥이 젖어 있어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점차 시간 감각이 모호해져 갔다.

걷는 건지, 달리는 건지 모를 흙길을 얼마쯤이나 갔을까.

뭔가 매캐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생살이 불에 지져졌을 때 나는 찐득하고 불쾌한 냄새.

“…….”

후각을 덮는 감각의 출처를 알아보기 위해 이안이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돌풍이 그를 덮침과 동시에 청록색 빛이 이안을 벼락처럼 집어삼켰다.

* * *

청록빛은 현실과 혼몽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앞이 흐릿했다.

얼룩진 망막에 맺힌 액체가 자꾸 흘러내려서 이안은 눈을 비볐다.

그러자 끈적하게 손등에 묻어나는 건 핏물이 섞인 진물이었다.

……화상?

손등뿐이 아니었다.

제 몸 여기저기가 발갛게 부어오른 데다 화농이 심한 곳도 더러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이안은 수포가 인 몸을 살피며 상황을 파악해보려 했다.

그 순간.

“내가 유인하겠다.”

이안의 의식을 잡아채듯 비장한 말소리가 그의 귓가로 내리꽂혔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 음색.

고개를 짓쳐 드니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남자의 왼쪽 눈을 덮은 문신이었다.

곡선의 꼬리가 아름다운 새였다.

“암살자들의 손에 예언자인 도련님이 죽으면 이 전쟁은 패한다. 그러니 내가 미끼가 되겠다.”

“…….”

남자의 단언에 그와 함께 있던 검은 무리는 어떤 말도 보태지 못했다.

동료가 미끼가 되는 동안 도망가야 하는 처지.

정말 비참한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예언자 이안 뷔트시겐을 살리는 것이 그들의 본분이었기 때문이다.

“……대장, 최선을 다해 예언자님을 보호하겠습니다.”

희생을 자처하는 남자에게 검은 무리가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그러자 남자가 부탁한다는 듯 그들의 어깨를 일일이 힘껏 쥐었다가 놓았다.

자부심이 깃든 손길이었다.

“……알란?”

상황을 지켜보던 이안은 문신이 있는 남자, 아니 알란을 불렀다.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

이안은 대답을 하려고 입을 뗐지만, 말을 하지는 못했다.

뼛속까지 침투한 화농이 자꾸 날뛰어서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다.

정신을 놓고 싶은 고통에 이안의 고개가 뒤로 꺾이자, 알란이 그의 등을 다급하게 받쳤다.

“으읏.”

알란의 손이 닿은 즉시, 그 자리가 돌판에 지져지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생살 타는 냄새가 더 고약해졌다.

이안의 인상이 심하게 찌그러지자 알란이 재차 물었다.

“어지러우십니까? 살리카 개자식들 때문에 도련님이 많이 다치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

“‘레퀴에스’가 질기게 도련님을 쫓고 있습니다.”

“……날 죽이려고 살리카 가주가 조직한 암살 부대?”

“예. 독 안에 든 쥐새끼 꼴이 되기 전에 속히 빠져나가야 합니다. 제가 유인할 테니 그사이에 도련님은 파론디스 평야에 있는 본진으로 가십시오.”

알란은 떠밀다시피 외팔의 남자에게 이안을 맡겼다.

시간이 촉박했다.

더는 미적거릴 수가 없어 알란은 호위대에게 속히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장의 명에 무리는 알란의 반대 방향으로 신속히 움직였다.

“……아, 안돼!”

저건 희생이 아니라 개죽음이었다.

비명은 비명이 되지 못하고 사포를 긁는 것 같은 거친 바람 소리만 났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자, 이안은 화농이 깊은 팔을 허우적거렸다.

죽을 자리에 누군가를 밀어 넣고 혼자 살겠다고 떠날 순 없었다.

이안의 버둥거림에 외팔의 남자가 주변을 살피며 당부했다.

“불길에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더는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멈춰……, 멈추라고.”

“가주께서 임명한 호위 부대의 임무는 하나입니다. 도련님을 지키는 것.”

“…….”

“당신이 산다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서도 희망이 꺼지지 않을 테니.”

외팔이 남자의 쉰 목소리는 무척이나 지쳐있었다.

그럼에도 이안의 팔을 움켜쥔 손아귀의 힘만큼은 억셌다.

놓지 않으려는 듯.

그것보다는…… 놓으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숨기려는 듯했다.

“…….”

버둥거리는 이안을 끌고, 남자는 온 사방이 타들어 가는 숲을 벗어났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동료 하나를 사지에 남겨두고선 일절 돌아보지 않았다.

호위대가 느낄 비참함과 절통함을 알기에 이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예언자라 칭송받는 주제에 고작 사람 하나를 구하지 못하다니.

제 곁을 지켜주는 사람조차 허무하게 놓치고 있었다.

‘무능한 나는 거짓 예언자일 뿐, 희망이 될 수 없다.’

그렇게 외치지 못하고 누군가의 생을 빌어 목숨을 치졸하게 연명했다.

그저 살고 싶은 욕망을 예언자란 거짓에 숨기고 있었다.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

이안은 뜨거워진 목울대를 쥐며 수많은 말들을 모조리 삼켰다.

죄책감인지, 무엇 때문인지 손톱이 파고든 살덩이가 아팠다.

통한의 회한이 그를 삼켰지만 이후로도 줄곧.

“제가 남겠습니다.”

여지없이.

“예언자님은 사셔야 합니다.”

여지없이.

“제가 길을 뚫을 테니 예언자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십시오.”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이안은 살아남았다.

그러다 결국엔.

“주군의 곁을 지킬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늘 희생을 자처해도 끝까지 살아남았던 알란마저 떠나보냈다.

결국엔 그마저.

“…….”

이들의 목숨을 빌어 무엇을 구했는가.

이들의 목숨을 빌어 무엇을 해냈는가.

자신은 그저 남의 생목숨을 잡아먹는 살인귀였을 뿐이다.

“……이안 도련님, 예언자님, 어디 아프세요?”

앳된 목소리가 이안을 흔들어 깨웠다.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괜찮으세요?”

고사리 같은 손이 이안의 바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제 열 살 남짓.

8년의 전쟁을 치르며 뷔트시겐에 남은 이들은 이런 어린아이뿐이었다.

싸울 수 있는 어른들은 전부…….

히에로스의 어느 협곡에, 바다에, 평원에 장렬하게 묻혔다.

이안은 떨림을 감추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엉클었다.

“괜찮아.”

“아프지 마세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예언자님이 있어 8년을 버틸 수 있었대요.”

아니.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다.

이 대전쟁은 결국…… 예언서대로 될 것이다.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신물과 함께 삼키며 이안은 쓰게 웃었다.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아. 저도 내일부터 전쟁에 나가요.”

“……너도?”

“응. 싸움에 익숙해지고 더 강해지면 예언자님을 지키는 호위 부대에 들어갈 거예요.”

호위 부대의 정원은 언제나 다섯.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이동에 제약이 있어 늘 이 수를 유지했다.

물론 그 구성원이 수십 번 바뀌긴 했지만.

“그……래. 살아서……, 꼭 살아서 날 지켜주려무나.”

“그럴게요!”

아이가 다부지게 양 주먹을 쥐며 다짐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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