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고작 한 달.
빠르게 무너지는 전선은 수습되지 못했고, 결국 크라바나스 설산은 점령당했다.
언제나 고고하던 설산이 피의 강을 이루며 붉게 뒤덮였다.
“아아아악!”
이안은 식어버린 작은 손을 쥐고 비명을 토해냈다.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했다.
예언자?
개나 주라지.
앞날을 알고 있어도 저 작은 손을 지키지 못했던 건 전부 제 탓이다.
제가 약해빠져서, 제가 너무 못나서 그리된 것이다.
만약 그 예언서를 강한 자가 얻었다면…… 그랬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필시 더 많은 이들을 지켜낼 수 있었을 터.
“겨우 나 따위가 비밀을 훔쳐봐선.”
벌을 받은 것이다.
이들을 지켜서 명예를 얻겠단 오만이 여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악!”
이안은 엎드려 울부짖었다.
목구멍을 찢는 가시 같은 비명에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목뿐만이 아니다.
전신이 갈라지고 살가죽이 터지는 것처럼 쨍한 둔통이 일었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모든 뼈가 잘게 토막 나는 것 같은 고통에 이안은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오죽 세게 물었으면 뜯겨나간 살덩이에서 피가 줄줄 샜을까.
비릿한 피 내음 속에 시야가 어질어질해지던 그때였다.
[……예삿놈이 아니군.]
흥미롭다는 음색이 이안의 뇌수로 파고들었다.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절망과 회한은 지나치게 달콤한 맛을 지녔지.]
“……누가 그딴 개소리를.”
[상당히 거친 언사는 그냥 넘어가 주겠네. 이 몸을 즐겁게 한 값으로.]
실핏줄이 터져 핏물이 흐르는 눈.
붉어진 이안의 시야에 웬 기린 하나가 들어왔다.
‘……동쪽의 관리자?’
청록색 기린이 비식 웃으며 발굽을 굴리자 털이 물결쳤고, 그 모습은 구름이 피어나는 것 같은 잔상을 남겼다.
신묘한 광경을 따라 이안의 눈이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탁해졌다.
지난 생과 현생, 짧은 현생과 아득한 듯 가까운 지난 생.
이것들이 뒤섞이며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안의 혼돈을 잠재우려는 듯 기린이 또 한 번 발굽을 굴렸다.
[이제 과거에서 깨어날 때다. 미몽에 오래 머물러 좋을 것 없으니.]
다그닥다그닥.
경쾌한 소리에 맞춰 이안의 정신이 다시금 혼미해져 갔다.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싶어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풀썩.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이안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기절한 이안을 붙잡으려 은발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꽤나 극진했다.
그 모습에 히죽인 기린이 남자를 향해 짓궂게 말했다.
[흘흘흘. 정성이군, 정성이야. 딱 그 정성만큼 곱게 싸서 고이 데려가시게, 수호자여.]
* * *
“……내 예상 범위를 아득히 벗어나는군. 회귀라니.”
남자의 혼잣말을 따라 치렁한 은발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그것은 흡사 은사처럼 고아해서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선을 앗아 가는 게 이뿐이랴.
반듯한 눈썹,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긴 은색 속눈썹, 오색의 동공.
하나하나가 세심한 세공품 같았다.
거기다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룬 얼굴은 아름답다는 수식조차 초라해질 지경이었다.
세이렌의 노랫가락처럼 보고만 있어도 홀리게 되는 외양.
마냥 아름다웠으나, 한편으로는 위압감과 서늘함도 진하게 녹아있었다.
[……크륵?]
그런 남자의 모습이 낯설다는 듯 사냥개가 머리통을 이리저리 움직거렸다.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은발의 남자, 아니 녹스는 옅게 미소 지으며 사냥개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코르키, 나도 너처럼 이 변화가 갑작스럽긴 매한가지구나.”
[크르륵.]
“왜 이 모습이냐고? ……글쎄.”
갑작스러운 변화의 이유는 불분명했다.
다만 현재와 과거, 정확히는 지난 생이 교차하면서 생긴 결과가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다.
녹스는 길쭉길쭉하고 가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라 그런지 낯설고 생소했다.
[크르륵. 크륵?]
“예전의 모습으로 언제 돌아오냐고? 그 또한 ‘글쎄’라고 밖엔 말할 수 없겠구나.”
[크르르르륵.]
아쉬움이 담긴 사냥개의 목울음에 녹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녀석 덕분에 환기가 좀 된 것 같다.
마주한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해볼 수 있게 됐으니까.
녹스는 다시 한번 사냥개의 머리통을 쓸었다.
그런 뒤 시선을 떼고 이안에게로 고정했다.
녀석은 땀과 열에 절어 눈가를 잔뜩 구기고 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뭐가 그리 괴로운지 왼쪽 눈을 자꾸 긁어댔다.
피가 날 정도로 생채기가 나자 녹스는 이안의 손을 잡아챘다.
“……본래는 이 눈에.”
뷔트시겐 가주가 새겨 넣은 시간의 서가 있었다.
그리고 ‘서’가 사용된 게 가주마저 죽고 가문이 멸문했을 때였다.
그래서였다.
이안 이놈이 노상 성난 멧돼지마냥 굴었던 것이.
“가문의 멸문으로 회한 많은 생이 끝났으니 그럴밖에.”
실마리가 풀리자 녹스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그간 이안에게서 맡았던 희미한 위화감이 이제는 명확하게 이해가 되었다.
왜 그렇게 절박하고 치열하게 무언가를 했었는지.
왜 그렇게 시간에 쫓기듯 수련을 했었는지.
왜 그렇게 악착같이 강해지려 했는지도.
아마도 회한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이리라.
지금껏 느슨하게 상념을 이어가다가 녹스의 시선이 일순 모로 꼬아졌다.
“흠.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만은 도통 모르겠군.”
‘시간의 서를 사용한 자는 기필코 죽는다.’
이는 거스를 수 없는, 당연한 명제였다.
사용자의 목숨, 그 값의 등가교환으로 회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안은 죽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한 명제가 어떻게 비틀릴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시간의 서를 만든 자의 의도.
“시간의 어느 축을 바꾸고 싶었던 게로군.”
과거를 바꾸려면, 과거를 ‘기억’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억을 잃지 않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시간의 서를 사용하고도 죽지 않는 것.
아마도 ‘서’를 만든 자는 이를 위해 어떤 편법을 쓴 것 같다.
녹스의 오색 동공이 검어 보일 정도로 진해졌다.
아직 전체의 맥락을 파악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의문이 한 겹씩 벗겨질수록 도리어 언짢음이 녹스를 내리눌렀다.
“이안 너도, 나도 체스판의 말에 불과한 것 같군.”
애초의 의도가 선의였던들.
결국 체스를 두는 사람의 의중에 따라 말의 처지가 살지, 죽을지 결정된다.
그래서 영 께름칙했다.
상황을 알지 못한 채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체스를 두는 자가 되지는 못할망정 말이 될 순 없지.”
가당치 않다.
제 목숨을 남에게 저당 잡히는 짓 따위 할 생각 없다.
굳은 결심이 녹스의 목구멍을 타고 이안에게로 쏟아졌다.
녀석을 위해서라도 수호자로서 그래야만 한다.
몇 번이나 다짐하며 녹스가 이안의 손을 꽈악 움켜쥐던 때였다.
“……크읏.”
사납게 내장이 짓이겨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그와 동시에 몸 여기저기서 은색 빛이 터져 나왔다.
파스슷.
빛이 진해질수록 심장께가 바스라지는 것 같은 섬뜩한 파열음도 났다.
“크아아아앗!”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몰아쳐 녹스는 침대 맡에 엎어졌다.
그 상태로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져 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눈꺼풀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밭은 숨만 몰아서 쉬길 수 분.
이내 점멸하는 시야마저 걷히자 녹스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 * *
“……녹스, 녹스.”
이안은 멍한 녹스의 말랑한 앞발을 쿡쿡 눌렀다.
어제부터 상태가 물컹한 브로콜리 마냥 시들시들했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그동안 언뜻언뜻 내비치던 궁금증이 해결됐으니 마구 떠들 만도 하건만…….
녹스는 입을 꾹 다문 채 바깥만 내다보고 있었다.
폭설이 멈추지 않고 있는 바깥만.
사방을 뒤덮은 눈에 파묻힌 세상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했다.
뭐가 그리 걸려서 저러는 걸까.
이안은 녹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녀석의 앞발을 재차 꾸욱 눌렀다.
장난치면 괜찮아질까 해서다.
“왜 이렇게 종일 멍해? 아픈 사람 신경 안 쓰고 내 배 위에서 꿀잠 잘 땐 언제고.”
[…….]
“진짜 왜 이러실까.”
[에휴. 뱁새인 네가 내 크나큰 뜻을 어찌 알겠누.]
녹스가 말 걸지 말라는 듯 앞발을 휘저었다.
……오춘기라도 온 건가.
이유 없는 까칠함에 이안은 턱을 괴고 책상에 앉았다.
제가 종일 누워 있어서 그렇다고 치기에는 확실히 이상했다.
아무래도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톡톡.
이안이 저 좀 보라는 듯 책상을 두드리자, 녹스가 먼저 더디게 말문을 열었다.
[본래는 생각이 더 정리되면 너랑 대화해 볼 생각이었다만.]
“아.”
[네놈이 그 입을 안 다무니 지금 하는 게 낫겠다.]
녹스는 누워 있던 몸을 뭉그적뭉그적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안을 뚫어지게 보며 또박또박 질문을 던졌다.
[으음. 네가 알고 있는 정보들 말이다. 예언서에 나와 있었댔지?]
“어. 제1 도서관에 있던 책이었어.”
[아무나 열람이 가능한 그곳에?]
“구석진 곳이긴 한데 못 찾아낼 만한 위치는 아녔어.”
[흠. 그렇단 말이지.]
녹스는 정보를 취합하며 각진 구석 없는 둥근 턱을 문질렀다.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개방된 장소.
도서관은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라 뭔가를 숨기기 적합지 않다.
만약 전달할 대상이 정해졌어도 다른 사람이 멋모르고 손댈 수 있으니까.
‘물건을 지킬 파수병이 있다면 모를까.’
녹스는 머릿속을 맴도는 단서를 쥐고 다시금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하나만 더 묻자.]
질문을 정해놓은 것처럼 녹스는 앞발 하나를 폈다.
앙증맞은 닭발에 이안은 사르르 눈꼬리를 접었다.
“대화하자면서 고작 질문 두 개가 다야?”
[시끄럽고. 그 후는 어찌 되었느냐?]
“그 후?”
[살리카가 뷔트시겐마저 무너트리고 제국을 집어삼킨 후 말이다.]
“당연히 2파전이 되었지.”
[2파전? 살리카와 루하흐의?]
“아니. 살리카 가주와 살리카 가주의 사냥개, ‘라이라프스’의 2파전.”
원래대로라면 라이라프스는 가주에게 반기를 들 수가 없다.
왜냐면 가주가 ‘금제’를 걸어놨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이려 할 시, 뇌수가 으깨지며 숨통이 끊어지도록 말이다.
통증이 시작되고 숨통이 끊어지기까지 고작 5분.
그 금제로 인해 목숨줄이 매인 라이라프스는 가주에게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여기서 반전.”
[반전?]
“사냥개가 반기를 들도록 뒤에서 조정한 게 바로 폰투스였어.”
[또 폰투스냐? 그것은 안 끼는 데가 없구나.]
“금제를 풀 방법을 알려주면서 사냥개를 꼬드겼지. 살리카 가주를 죽이고 우두머리가 되라고.”
[그것이면 충분히 그럴만하지.]
“그렇게 둘이 눈 맞은 뒤로 금제를 푸는 데만 7년 넘게 걸렸지 아마?”
[목줄 풀린 사냥개가 얼마나 흉포해졌을꼬.]
“뭐, 둘의 싸움에 히에로스는 더 황폐해졌고.”
[쯔읏. 전란을 수습해도 모자랄 마당에.]
쌓는 건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란 말이 있다.
이와 같았다.
오랜 전란이 할퀸 상흔을 히에로스는 감당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녹스는 이미 제국의 결말을 알고 있으리라.
그래선지 녀석의 얼굴이 무척 쌉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