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03화 (103/214)

제103화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하나 내 몸이 증거일세. 흐려지는 건 명백한 세대교체의 신호니까.”

세대교체.

산에 호랑이가 ‘둘’ 일 수는 없다지 않던가.

황제의 수호자와 차기 황제가 될 황태자의 수호자.

황궁이란 우리에 강자가 둘일 순 없기에, 수호자는 때가 되면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맞게 된다.

즉슨, 두 수호자는 같은 공간과 같은 시대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칙을 위한 총 세 단계의 과정.

일단 황태자가 수호자를 알에서 깨우면, 그걸 기점으로 황제의 수호자는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세대교체의 신호탄인 셈.

그 뒤 황태자가 탑의 상층 시험을 통과하면, 황제의 수호자는 이내 힘을 잃게 된다.

본격적인 계승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4대 가문의 순방을 끝낸 황태자가 황궁에 발을 들이는 그날.

애석하게도 황제의 수호자는 모든 힘이 봉해지며 소멸하게 된다.

즉, 황태자의 수호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비가 오고 태양이 뜨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법칙이었다.

이 흐름을 알고 있는 황제지만 차마 말을 쉬이 잇지 못했다.

“한데…… 어떻게 알이?”

“…….”

“설마 황태자가 죽었는데도 알이 살아있었단 말인가.”

“진정하게. 그것보다 먼저 따져야 할 게 있지 않나. 대체 어떤 자가 말로의 탑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거 말일세.”

“아.”

수호자의 지적에 황제의 눈이 치떠졌다.

흥분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따져야 할 일을 잠시 잊고 있었다.

황가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자가 알을 얻었다는 것.

이는 곧, 황가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 힘’이라면 지금의 황가로서는 대처하기가 힘든 실정이니까.

“일단 그자부터 찾아내야겠네. 비밀은 비밀일 때 제 가치를 하는 법이니.”

* * *

폭설이 그쳐도 먹장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또 한차례 눈이든 비든 쏟아질 것 같아 괜히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날씨였다.

이런 궂은날에도 외출한 이안은 도서관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그리고 텅 비어 있는 도서관을 느리게 훑어보았다.

평온한 이안의 얼굴과 그 손에 들린 치자색 라그라스.

둘을 번갈아 보다가 녹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예상보다 더 담담해 보이는구나.]

“아아.”

[혹, 사서가 그리될 줄 알고 있었느냐?]

“대강 눈치는 채고 있었어.”

[어쩐지. 어제 얘기할 때도 생각보다 차분하더라니.]

“최근 들어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을 자주 해서 말이야. ”

[하지 않는 행동?]

“만나면 더 있다 가라고 붙잡질 않나, 자주 찾아오라고 채근하질 않나, 누굴 데려오라고 뜬금없는 요구를 하질 않나, 꼭 뭔갈 정리하는 것처럼 굴더라고.”

그래도 동면에 들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잠깐 여행 가는 것처럼 자리를 비울 거라고만 생각했지.

갑작스레 닥친 이별에 이안의 마음이 어쩐지 먹먹해졌다.

언제나 이별은 어렵다.

결단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를 위하는 사서의 마음을 알기에, 이안은 담담해지려 했다.

사그락.

이안은 창가로 다가가 살며시 라그라스를 내려놓았다.

사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말벗이 되어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사서에게 무심히 건넸던 꽃.

예전엔 주면서도 ‘필요 없으면 버리든가’ 딱 그런 표정을 지었었는데, 사서는 꽃을 안고 환하게 웃었더랬다.

그 모습이 노란 꽃망울보다 더 화사했었는데…….

‘……언제나 고마웠어.’

이안은 햇살을 한껏 받은 라그라스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그저 물끄러미…….

시간의 흐름을 죽이며 그저 가만히.

꽃이 사서인 것처럼 응시하다가 다리가 저릴 때쯤에야 이안은 뒤돌아섰다.

그 순간.

‘이안, 고마워.’

사서의 청아한 음색이 사념인 듯 이안에게로 파고들었다.

잠깐 멈칫했던 이안은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느 때보다 더 느린 걸음.

그 걸음을 지그시 보고 있던 녹스의 눈매가 깊어졌다.

‘녀석의 비밀을 알고 났더니 어째.’

저런 매가리 없는 꼴을 보고 있으면 괜히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하릴없이 눈치만 보게 되고.

비밀을 안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니까.

투덜거린 녹스는 이안의 관심을 돌리려 녀석이 궁금해할 얘기를 얼른 꺼내 들었다.

[이안, 내가 그동안 생각을 정리하느라 말하지 못했는데 예언서 말이다.]

“……맞다. 뭔가 좀 알아내지 않았어?”

[대략? 어떤 놈이 우리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는지 정도는.]

“결국 우리 스승님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네, 누군지 몰라도.”

[에헴. 내가 누구냐. 네놈의 스승이시다.]

“후훗. 존경심이 절로 샘솟는 바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네놈은 생각도 못 했겠지만, 책에 섞인 마력향은 총 세 개였다.]

“세 개? 진짜 예상 밖이네.”

[일단은 네놈을 위해 그 하나하나 짚어주자면. 첫 번째는 바다 엘프의 수장, 두 번째가 시간의 정령 라트비아, 그리고 마지막 마력향이 초대 황제였다.]

“와, 책 하나에 얽혀 있는 인물이 많기도 하다.”

[그러게나 말이다.]

녹스는 거침없이 말을 내뱉다가 앞발을 촤악 펼쳤다.

[한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황제 그놈이 정말 예언서에 관여되었느냐 하는 거다.]

“아아. 그거 때문에? 에루리안의 모든 것에는 그분의 마력이 진하게 묻어있는 거 말이야.”

[그렇지.]

“하긴. 애초부터 그랬던 것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기에는 비약일 수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머지 둘은 여러 가지 일에 엮여 있지만, 그놈은 좀.]

이안은 녹스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제는 에루리안을 지었다는 사실 말곤 별 연관성이 없었다.

굳이 뭔가 꼬투리를 잡아보자면, 되게 독특한 밀실을 만들었다는 것 정도?

그것만 가지고 일련의 일들과 엮는 건 조금 많이 억지였다.

그러니 황제는 한 편에 밀어놔도 될 듯했다.

“이제 대략의 실마리가 풀린 것 같은데?”

[얼추.]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그 의도를 안 다는 거지. 우리한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거.”

[하긴. 의도는 분명하지. 시간을 돌려 제국을 지켜내고 싶었던 거니까.]

제국이 망하는 걸 막고 싶은 예언서의 저자나, 뷔트시겐을 살리고 싶은 이안이나.

목적은 거의 비슷했다.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 대전쟁의 원흉인 살리카 가주만 저지하면 된다.

이안은 생각을 갈무리하며 느릿하게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간 묵혀놨던 것을 알게 돼서일까.

사서의 일까지 얽혀서 묵직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 * *

도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꾸물거리는 날씨와 습한 공기, 샤를 골드 장미가 만발한 정원.

이 삼박자가 긴 그림자를 만들며 이안의 걸음을 졸졸 뒤따랐다.

‘평소보다 꽃향기가 진하네.’

올드 로즈의 눅진함과는 다른, 화사한 향이 느껴졌다.

이 냄새 때문일까.

난데없이 사냥개가 호다닥 장미 정원을 질주했다.

[저거, 저거. 누가 개 아니랄까 봐.]

“크큿. 내버려 둬. 보기 좋은데 뭐.”

이안은 사냥개의 팔락대는 귀를 눈으로 뒤쫓아갔다.

그러나 시선의 쫓음은 얼마 가지 않아 금방 끝이 났다.

사냥개가 누군가의 발치에 발라당 드러누웠기 때문이다.

‘……스톨레 교수님?’

스톨레는 플라스크에 장미 꽃잎을 모으다 사냥개를 내려다보았다.

치대는 사냥개가 싫지 않은 듯 그는 사냥개의 머리통을 문질렀다.

그 손길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저런 모습은 또…… 오랜만이군.’

잘 드러내지 않는 온화한 모습의 여파 탓이었을까.

스톨레의 현재와 과거가 뒤섞이며, 이안의 뇌리로 아버지가 전해준 정보들이 튀어 올랐다.

<스톨레 바르푸니는 정령사 협회장의 수제자였다. 협회장이 무척 아꼈지.>

<별 탈이 없었다면 협회장의 후계자 자리에 내정되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협회장과 틀어졌다. 10년 전 클로에의 제자가 죽은 사건이 원인이었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정보들이었다.

이렇듯 빈 곳을 채우자 나자, 지난 생의 스톨레 교수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어쩐지 정령사 협회만 보면 원수라도 만난 듯 굴더라니.

그 이면에는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던 것이었다.

“…….”

사실 이런 뒷이야기를 잘 몰랐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교수님과의 교류가 전쟁터에서 함께 보낸 3년간이 다라서지.’

에루리안을 다닐 땐 서로 데면데면했으니까.

아마 회귀하지 않았다면 지금 역시도 지난 생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 간극을 좁히려면 스톨레 교수와 말을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이안은 스톨레 교수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님.”

“샤를 골드 장미가 생기를 머금기 좋은 날씨군요. 질 좋은 변신 물약의 재료를 모을 수 있겠어요.”

살가운 이안의 말 붙임에 스톨레 교수는 평소처럼 대꾸했다.

지난번, 추적진이 녹은 차 상자를 건네줄 때의 미약한 예민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척 잔잔했다.

그 상태를 유지한 채로 스톨레는 장미의 꽃대를 툭 하고 꺾었다.

그 채로 장미를 공중에 휙 던지자.

아우우.

장미 꽃잎은 금빛 늑대가 되어 샤를 골드 위를 내달렸다.

질주하는 늑대의 근육, 숨소리, 설원을 내디딜 때 나는 마찰음.

늑대의 모든 것들이 실제인 것처럼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난 말입니다. 제자를 들이면 이처럼 ‘환술’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환술이란 건 무엇이든 내 뜻대로 바꿀 수 있는 거니까요. 희망을 가르치고 싶었지요.”

“희망…….”

“좌절은 현실을 살다 보면 항상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스톨레 교수는 이안에게 손을 줘 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이안이 손을 내밀자, 스톨레는 샤를 골드를 이안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어쩐지 교수의 눈빛이 가라앉은 채였다.

“그래서 난 이안 너에게 환술을 가르쳐주고 싶었단다.”

“…….”

“설령 내 실력을 다 드러내야 한다 할지라도.”

스톨레는 나직하게 ‘아쉽다.’라는 말을 한숨처럼 토해냈다.

그의 숨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그러나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단박에 표정을 지운 스톨레는 사냥개를 한 번 보더니, 이만 가보겠다며 먼저 정원을 떠났다.

“…….”

이안은 멀어지는 교수의 뒷모습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괜스레 장미를 쥔 손끝이 무척 따가워졌다.

<이안, 잊어라. 내 죽음마저 네 아픔으로 남겨두지 말고…… 그냥 잊어야 한다.>

살리카 가주를 죽이려 그들의 본진을 습격한 어느 날.

작전은 실패했고, 그 전장에서 스톨레 교수를 잃었었다.

잊으라고 했지만…… 그의 죽음 또한 이안에게는 상흔이 되었다.

“변한 건…… 없는 것 같네.”

스톨레 교수의 이면이 어떻든 그는 여전히 스톨레였다.

이안이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인.

* * *

그날 늦은 오후에는 또 날씨가 바뀌었다.

하늘이라도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쏴아아아아.

이안은 손에 쥔 장미꽃을 보고 있다가 창문을 난타하는 빗소리에 밖을 내다보았다.

“……시원하게도 내린다.”

[날씨가 진짜 지랄 맞구나.]

“이렇게 쏟아지는데 로르는 돌아오질 않네. 날궂이라도 하나.”

[그놈은 신경 쓰지 마라. 눈 바닥에서 알몸으로 자도 죽을 놈이 아니니.]

녹스는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듯 앞발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이안이 들고 있는 장미로 관심을 돌려 버렸다.

스톨레 교수가 준 샤를 골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꽃의 꽃대 부분을 녹스는 힘주어 눌렀다.

[환술이라…….]

“스톨레 교수님의 특기지. 특히 번개 정령과 연계해서 그 기술을 쓰면 환상이었어.”

[네 기억 속에서 본 적 있다.]

“……아쉽다. 스톨레 교수님께 환술을 배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환술로는 그자가 최고이니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거다.]

“도움도 도움이지만, 제자가 됐으면 교수님과 더 친해지지 않았을까.”

진하게 아쉬워하는 이안을 빤히 보다가 녹스가 이안의 이마를 톡 쳤다.

절 좀 보라는 신호였다.

[아쉬움은 접어라. 스톨레 보다 잘난 나를 보면서.]

“푸흡.”

이안은 콧구멍을 벌름대는 녹스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진지할 새가 없다.

괜스레 새어 나오는 건 빗소리만큼 시원한 웃음뿐이었다.

배가 당길 정도의 폭소는 긴 꼬리를 남기며 손에 든 장미로 스며들었다.

덩달아 떨리고 있는 장미, 떨리는 장미로 만들었던 환술…….

생동감 넘치는 늑대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안은 ‘아’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환술하니까 퍼뜩 생각나는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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