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그리 확신한다면, 좋다.”
고개를 끄덕인 수장은 그 즉시 털썩 주저앉아선 앉으라며 바닥을 두드렸다.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쳐대는 소리가 우렁찼다.
수장의 행동에 피그미족 전체가 낫을 거두고 거리를 좁혀왔다.
그러더니 수장을 둘러싸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살벌함을 풍길 땐 몰랐는데 저러고 있으니 꿀벌 무리 같았다.
이안은 수장이 가리킨 곳에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일단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듣고 싶습니다.”
“흐음. 그러니까 들어오면서 봤겠지만, 우리가 요즘 아메디스트를 전혀 캐지를 못하고 있어.”
“아.”
“일주일이나 되었어. 꼬박 일주일.”
“……일주일. 그렇게 오래.”
“후우. 자네도 알 거야. 우리 일족이 독특한 음파를 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피그미족이 음파를 사용하는 경우는 보통 광을 캘 때였다.
광을 캐는 소리, 제련하며 떨어지는 쇳물 소리 등이 원체 커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소통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인데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수장은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듯 이를 득득 갈았다.
“한데 그 음파가 노상 그 망할 박쥐들을 불러 모은단 말이지.”
“박쥐라면…… 독주머니박쥐 말입니까?”
“그렇지. 그 망할 것들. 음파를 쏴서 우리를 굳힌 다음 독을 쏘는 흉악한 것들.”
“그 독에 닿으면 몸이 괴사하고 바스러져 버린다고 들었습니다.”
“해서 그것들을 막으려 우리 일족은 방어 장치에 보석안을 박아넣는단 말이야. 그러면 결계가 되니까.”
이안은 듣고 있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추임새를 따라 수장은 말을 이어나갔다.
“여태껏 별문제 없었는데 일주일 전이었어. 방어 장치가 고장 나버린 거지.”
“장치를 고치려면 독주머니박쥐의 독샘이…….”
“그렇지, 그게 필요해. 것도 우두머리의 독샘이.”
“…….”
“내가 항상 여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필 그것이 똑 떨어진 게 문제였어. 쯔읏.”
수장은 말을 할수록 화가 차오르는지 혀를 세게 찼다.
“그래서 후딱 해결사를 불렀는데, 그 틈에 독주머니박쥐가 이 동굴에 터를 잡아버렸단 말이야.”
“아…….”
“그것들을 쫓아내고 싶어도, 자네도 알지? 저 박쥐 새끼들이 우리 천적인 거.”
“박쥐의 음파에 닿기만 해도 기절해버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망할 광부 조합 놈들한테 하루속히 해결사를 보내라고 독촉했는데, 여즉 감감무소식이야.”
“…….”
“느려터진 그놈들 기다리다 우리 애들 전부 저승 문턱 밟게 생겼어.”
수장이 미간을 한껏 찌푸리다 이안을 지그시 보았다.
참된 일꾼을 찾았다는 눈빛이었다.
“내 요지는 자네가 저 박쥐 새끼들을 좀 처리해 봐. 처리하는 김에 독샘도 좀 구해오고. 그럼 내 기꺼이 보석안을 내어주지.”
* * *
잠시 후.
이안은 피그미족의 본 주거지를 나와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의 양옆에는 녹스와 사냥개가 호위하듯 나란하게 걸었다.
가는 내내였다.
또옥. 똑.
천장에 고드름처럼 달린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 메아리칠 뿐이다.
그 물소리마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위가 고요했다.
피그미족을 괴롭히는 독주머니박쥐가 이곳에 있나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다섯 번째 동굴이랬지?”
[응. 아직 조금 더 가야 한다.]
“피그미족의 활기가 없어선지 생각보다 더 스산하네.”
[본 주거지랑 분위기가 너무 다르구나.]
주변을 탐색하며 목표 지점을 향해 한참 걸었을 즈음.
[크륵!]
후각이 뛰어난 사냥개가 낮게 울부짖었다.
독주머니박쥐에게서 나는 특유의 누린내를 맡은 것이다.
즉, 목표가 근처에 있다는 신호였다.
이안은 신속하게 동굴 한쪽 벽에 몸을 기댄 뒤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방에…… 박쥐들이 득실득실했다.
[저게 박쥐인 거냐, 천장인 거냐.]
두 개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종유석에 매달린 박쥐들이 많았다.
몸의 색깔까지 동굴 벽과 같은 갈색이라서 더 분간이 안 갔다.
마치 보호색 같았다.
[아이고, 징그럽다.]
-저것들 크기 좀 봐봐. 얼마나 잘 먹었으면.
박쥐의 몸통 크기가 성인 머리통만 했다.
날개까지 펼치면 웬만한 일곱 살 아이의 키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저 턱밑에 있는 게 독샘인가?
[박쥐가 크니까 독샘도 남다르다. 주먹만 한 게, 어이쿠야.]
-일단 저 독샘이 떨리며 나오는 음파부터 막아야 하는데.
[그래야 몸이 굳지 않으니 그게 상책이지.]
-아, 그거 써볼까?
[그거? 아아, 이번에 졸개 저놈이 얻은 기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지. 저놈들도 마비시키는데 우리라고 못 할까.
이안은 사냥개에게 ‘알지?’라는 눈짓을 보냈다.
[크르륵.]
이안의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사냥개가 머리통을 주억거렸다.
이안에게 다부진 고갯짓을 선보인 후.
캬우우우울.
사냥개가 사나운 하울링을 독주머니박쥐들에게 쏘아 보냈다.
하울링이 동굴에 메아리친 즉시였다.
적의 침입을 알아챈 박쥐들이 날개를 매섭게 퍼덕거렸다.
공격 태세를 갖췄으나 그 채로였다.
하울링의 파동에 닿은 박쥐들이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후둑. 후두둑.
‘석화’ 상태가 된 박쥐들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석화의 지속 시간은 10초 남짓.
“이 틈에.”
이안은 독주머니박쥐들을 처리하려 내달렸다.
저것들은 독샘으로 인해 재생력이 뛰어나 석화도 더 빨리 풀린다.
게다가 독샘만 살아있으면 다른 부위가 다 잘려 나가도 몸통이 도로 재생이 된다.
“저 좀비들이 깨어나기 전에.”
후우웅.
이안은 회오리를 일으켜 석화된 박쥐들이 한 지점에 모이도록 만들었다.
그런 뒤 찌부러트리고 압착 시켜 예쁘게 덩어리로 만들었다.
한순간에 커다란 구체가 된 박쥐들.
단단하게 모양이 갖춰지자 이안은 즉각 녹스를 불렀다.
“녹스, ‘서풍의 미소.’”
[알았다. 석화된 걸 태우는 데는 그만한 게 없지.]
이안의 한 마디에 녹스가 날개를 크게 휘저었다.
한 번의 휘저음.
그것만으로 수십의 작은 깃털이 생겨나더니 구체 여기저기에 꽂혔다.
푹푹 박혔다 뿐일까.
깃털들은 빠르게 회전하며 마찰을 일으켰다.
그 마찰로 인해 후벼 파진 부위에 바람 불길이 일어났다.
화르르르륵.
무색무취의 불길은 단숨에 박쥐들을 태우며 목숨을 집어삼켰다.
서풍의 미소는 불로 일어난 불길과는 결이 달랐다.
불의 실체가 보이지 않아선지 꼭 소리 없이 숨어든 암살자 같았다.
[어떠냐. 금제가 풀리며 잠금이 해제된 기술인데.]
“아주 끝내줍니다, 스승님. 크으.”
이안은 우쭐대는 녹스를 찬양하며 추켜세워주었다.
안 그러면 삐진다.
늘 사냥개의 기술이 대단하다고 감탄했더니, 녹스가 그걸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역시 멋지십니다.”
입바른 소리를 하며 이안은 재가 되어버린 구체를 발로 비볐다.
흡사 모래 같았다.
초록과 검정이 섞인 것 같은 하엽색 가루가 꼭 그렇게 보였다.
“이렇게만 하면 되겠다.”
사냥개의 석화로 박쥐를 제압한 뒤 이안이 박쥐를 모아 뭉치고, 녹스의 불길로 태워버리기.
셋의 연계는 독샘을 가진 박쥐를 상대하기에 최상이었다.
이후로는 손쉬웠다.
빈틈없이 이어지는 연계에 박쥐들은 제 기술을 써먹지도 못했다.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갈 뿐.
득실득실한 독주머니박쥐들을 줄여나가며 앞으로 나아가길 얼마쯤.
-우두머리 박쥐다.
얼마나 처먹었는지 유난히 통통한 박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몸매로 천장에 잘도 매달려 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우두머리의 양옆에 있는 호위로 시선을 옮겼다.
두 마리씩, 총 넷.
그들 역시 오동통한 것은 우두머리에 버금갔다.
[저 우두머리는 독샘부터 얌전히 잘라 내야겠다.]
-그럼 가볼까.
끄덕인 이안은 여태까지 수월했다고 방심하지 않고 차분히 회오리를 불러냈다.
캬우우울.
그 즉시 사냥개가 울부짖어 독주머니박쥐 다섯을 석화시켰다.
아까와 달리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가 않았다.
우두머리의 영향 탓이었다.
“……이런. 석화가 잘 안 먹힌다. 일단 호위병부터 처리하자.”
“키에에엑.”
이안의 계획이 가소롭다는 듯 우두머리 박쥐가 비명을 지르며 날개를 쭈욱 폈다.
날개는 혈관을 이어붙인 것처럼 수백의 실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통상적인 날개가 아니라서 자유로이 꺾였고, 그만큼 제약이 없었다.
쇄애애액.
날개가 왼쪽 사선으로 들이치며 이안의 갈비뼈를 노리자, 녹스의 날개가 방패처럼 막아섰다.
날개 방패에 막힌 박쥐의 날개가 탄력적으로 튕겼다.
파르르 떨린 날개는 즉각 횡으로 휘어지며 이안의 뒷덜미를 스쳤다.
날개의 꺾임이 변화무쌍했다.
우두머리 박쥐가 공격을 쉴새 없이 가하는 사이.
“키엑키엑키엑.”
연계하듯 호위병들 또한 이안만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그들은 날카로운 송곳니로 내려찍듯 활강해서 이안의 살가죽을 찢어발기려 했다.
카가강.
보호막에 의해 시도가 무산되고 호위병 하나가 바람에 밀려나자, 즉각 또 다른 하나가 짓쳐 들었다.
비스듬히 파고든 호위병은 독이 묻은 송곳니를 이안에게로 휘둘렀다.
가슴팍을 노린 공격에 이안이 왼발에 힘을 주고 즉시 반보 물러난 때였다.
[크르륵.]
그 틈을 노린 사냥개가 발톱을 길게 빼곤 호위병의 독샘을 꿰뚫었다.
크아아아앗!
날카로운 발톱이 턱을 관통해 정수리까지 뚫자 박쥐가 몸을 뒤틀었다.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가 고막을 긁어댔다.
그에, 독샘이 풍선처럼 부풀며 박쥐의 몸이 퍽 하고 터져버렸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살점들.
그것들이 떨어진 자리가 시커멓게 변색 됨과 동시에 부글부글 기포가 끓어올랐다.
기포에서 나온 연기만으로 피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크흡.”
이안은 연기가 오지 못하도록 바람을 반대쪽으로 흘려보냈다.
연기를 계속 맡았다간 피부가 괴사해 버릴 테니까.
동굴 안을 메우는 연기 탓일까.
홀로 남은 우두머리 박쥐의 독샘이 분노로 파르르 진동했다.
스으으으읏.
뱀 꼬리가 떨리는 것 같은 독특한 음파가 터지려는 순간.
촤아아앗.
이안이 신속하게 바람 그물을 던져 우두머리 박쥐의 독샘을 감쌌다.
이대론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물이 부식되기 전 이안은 사냥개에게 신호를 보냈다.
[크륵.]
이에 곧장 사냥개가 발톱으로 박쥐의 턱밑을 매섭게 잘라냈다.
아래로 툭 떨어지는 독샘.
그것을 녹스가 잽싸게 낚아챈 뒤 이안의 손바닥에 고이 안착시켰다.
그러고는 우쭐대며 이안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
.
.
<전사야, 위대한 전사. 독주머니박쥐를 일거에 쓸어버리다니 말이야.>
<진짜 멋져요. 어떻게 싸웠는지 알려주세요.>
<자네, 정말 대단하군. 혹시 우리 일족의 일원으로 살 생각 없는가?>
<파하하핫. 내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다니.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문은 항상 열려있네. 그러니 언제든 놀러 오게.>
우두머리 박쥐의 독샘을 가지고 귀환하자 이안은 피그미족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처음의 시큰둥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예 같이 살자고 붙잡는 통에 빠져나오기가 힘들 정도였다.
“오. 이게 바로 아메디스트의 보석안.”
이안은 벌집 모양의 보석안을 손바닥 안에서 굴려보았다.
손길 따라 무지개색이 다채롭게 변화했다.
“손톱만큼 작은 것이 참 여러 가지 일을 하네.”
이안은 기분 좋게 보석안을 몇 번 굴려보다 왼쪽 귀 끝에 가져다 댔다.
츠스슷.
그러자 보석안이 살아있는 것처럼 귀 끝에 흡착되었다.
딱히…… 뭔가가 바뀌었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지 않았다.
이안은 실감이 나지 않아 귀 끝의 보석안을 살살 문질러보았다.
“흠. 이제 오쿨루스의 결을 써도 괜찮으려나?”
[한번 써봐라. 나도 보고 싶으니.]
녹스의 기대감을 싣고 이안은 얼른 오쿨루스의 결을 시전해 보았다.
목표 지점은 그라나토스 초입에 있는 별이끼 나무의 군락지였다.
츠즛. 츠즈즛.
‘결’이 발동되자 왼쪽 눈 위, 허공에 미밀의 나무 모양의 작은 진이 생겨났다.
그 즉시 군락지 주변의 공간이 뒤틀리며 정보를 쏟아냈다.
다양한 형태의 작은 정령들이 떠드는 소리, 밤중의 빗소리가 부서지는 입자, 땅을 지나는 지맥의 흐름 등등.
수많은 정보가 이안의 뇌를 쑤셨지만, 격통은 일지 않았다.
뭔가 신기함을 넘어 기묘했다.
“와, 장난 아닌데?”
[저거, 또 신났다.]
“이 사기 기술을 얻었는데 그럼 안 신나?”
[푸핫. 사기긴 하지. 3분 지속에 하루의 대기 시간이 있으니.]
“…….”
‘말발’ 하면 빼놓지 않는 이안도 ‘하루의 대기 시간’에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쳇. 이틀이 아닌 게 어디야.”
라며 정신 승리를 일궈냈다.
이안다웠다.
녀석의 하찮은 몸부림에 녹스가 피식 웃고는 가볍게 당부를 이었다.
[내가 노파심에 하는 얘긴데, 시간은 꼭 엄수 해라. 괜히 더 보겠다고 지속 시간을 넘기지 말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