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06화 (106/214)

제106화

그날 초저녁은 여느 때와 달랐다.

“이만하면 되려나.”

녹스가 거울 앞에 서서 날개깃을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 침도 묻혀가며 쓱쓱 문지르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노란 발도 광이 나게 닦았다.

예쁜 여자 정령이라도 만나려는 듯한 꽃단장.

하도 부산을 떨어대니, 혓바닥을 내민 사냥개가 솜방망이 발로 녹스를 톡톡 건드렸다.

[크륵?]

“내가 왜 이러냐고?”

[크르륵.]

“로르랑 어디 좋은데 가냐고? 내가 미쳤니, 그놈이랑 어딜 가게?”

[크륵. 크르륵.]

“그럼 이안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냐고? 서얼마.”

설마 그 못난 제자 놈에게 잘 보이려고 단장을 하는 것이랴.

조금 뒤 소개받기로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녹스는 침 묻은 손을 삭삭 비비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안이 말이다. 자기 친구들을 소개해 준다네.”

보석안을 얻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이안이 다소 진중한 어조로 제게 물어왔다.

<레브와 올리브에게는 녹스 네 존재를 알리고 싶은데, 괜찮을까?>

레브와 올리브, 두것들은 이안이 평생의 지기로 삼고 싶어 하는 친우이다.

하여 녹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흔쾌히 허락했다.

비밀을 아는 자가 많아질수록 위험해지는 건 사실이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안이 원하니까.

이안이 그것들을 믿으니까.

그런 이유로 오늘은 그것들을 ‘공식적’으로 만나는 첫날인 셈이다.

“그나저나 위대한 날 보면 두것들이 까무러칠 텐데, 이를 어쩐다.”

[크르륵.]

사냥개가 ‘쓸데없는 걱정한다.’라는 듯 고개를 갸울거렸다.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것들이 사족을 못 쓸 거라고.”

[…….]

녹스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 짧은 다리를 한껏 꼬았다.

그 반동으로 뚱실한 배가 더 불뚝 튀어나왔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다리에 쥐가 나도록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달칵.

그 잠깐 사이, 기숙사 방문이 열리며 앳된 소년들이 들어왔다.

이안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를 이어 레브와 올리브가 동시에 입장했다.

그러느라 어깨가 문틀에 끼어서 진입이 힘겨운데도 ‘굳이’였다.

두것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꾸역꾸역 전진했다.

혈기 왕성한 소년들의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이란.

하잖은 신경전에 녹스가 혀를 끌끌 차던 그때, 두것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지금이야말로 경애로운 수호자로서의 자애를 보여야 할 때인즉.

녹스는 멋짐이 도드라지는 잇몸 미소를 내보였다.

세상 다시 없을 미소였다.

어느 누가 봐도 끔뻑 죽을 수밖에 없는.

한데…….

제 찬란한 미소를 보고도 두것들이 눈만 끔뻑거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건가?

분명 그러긴 했다

놀라워서 그러나?

이 또한 있었다.

“…….”

다채로운 감정들이 난무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두것들이 가장 크게 내보이는 건 웃음이었다.

정확히 서술하자면 입술을 자꾸 실룩대며 웃음을 참아댔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대체 지금 웃을 일이 뭐가 있다고.

녹스는 이안을 닮아 참 실없는 것들이란 생각을 하며 꼰 다리를 착 내렸다.

안면을 텄으니 다음 순서가 무엇이겠는가.

우아하고 기품있게 서로 인사를 나누는 거였다.

목을 가다듬은 녹스는 점잔 떨며 소년들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크흠. 반갑다, 결속자의 벗들이여.”

“아……. 반가, 반가워……요.”

녹스의 알은 척에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올리브였다.

특유의 친화성을 내세워 올리브는 녹스의 앞발을 거침없이 잡았다.

그런 뒤 마구 흔들며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와아. 뭔가 특이해서 존댓말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커흐흠. 원한다면 허락하지.”

“여기 오기 전에 이안한테 이것저것 설명을 많이 들었어요.”

“저놈을 만난 그날이 내 알 생 최악의 날이란 것도 들었고?”

“캬캬캬.”

올리브가 녹스의 신랄함이 재미있다는 듯 마구 웃어젖혔다.

아무래도 내적 친밀감이 팍팍 솟구치는 모양이다.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올리브가 다시 녹스의 노란 앞발을 흔들었다.

탈골될 것 같은 격함이었다.

그 채로 슬쩍 만져보고 눌러도 보는 게 무척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오올, 이게 대지를 상징하는 건가?”

“그렇다. 푸른 몸은 물을, 검은 날개는 바람을, 붉은 꼬리는 불을 상징하지.”

“오오오! 진짜로 4대 원소를 모두 다룰 줄 아시는 거네요.”

“그야 당연하지. 타고나길 그렇게 잘나게 타고났으니.”

“캬캬캬. 외모가 달라서 그렇지, 누가 보면 수호자님이라고 착각하겠어요.”

올리브의 호들갑에 녹스는 ‘내가 그 수호자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입이 간질거렸지만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언젠가는, 말하지 못한 비밀마저도 두것들에게 스스럼없이 밝힐 날이 올 것이다.

“크흠. 위대한 수호자도 멋지지만 생김은 내가 더 낫다. 난 귀엽기까지 하지 않느냐.”

“이열. 넘치는 이 자신감. 역시 이안의 정령이야.”

어째 욕처럼 들리는 발언이었다.

듣기는 그런데 제 딴에는 나름의 칭찬이었나 보다.

올리브가 쾌활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단순함이 장점인 녀석이군.’

사람이든 사물이든 있는 그대로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일종의 재능이었다.

녹스는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올리브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이 녀석, 발리올 가주를 쏙 빼다 박았어.’

그 사실만으로도 어쩐지 친근함이 배가 되었다.

하여 녹스는 말랑한 눈빛으로 올리브를 쳐다보았다.

“올리브, 만나자마자 할 말은 아니다만 내 부탁 하나 들어주련?”

“뭐든지요. 이안의 정령인데 뭐 어렵겠어요.”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다. 그저 내 정체를 함구해달라는 것이니.”

“왜요? 이렇게나 기깔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험험. 너도 알 것이다. 제국의 관행을. 특이한 정령은 대개가 수거당해버리지 않느냐. 제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다면서.”

“아, 맞다. 그렇게 끌려가면 실험체가 되지.”

“그렇지. 그래서 부탁하는 것이다.”

녹스가 ‘들어줄 거지?’라며 눈망울을 올망졸망하게 뜨자, 이에 올리브가 큰소리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 생기면 제가 잘 지켜줄게요.”

“허허. 내 참으로 든든하구나.”

“물론 저도 있지만, 방패막이가 하나 더 있잖아요. 그 ‘법’ 말이에요, 제국법. 결속된 정령은 누구든 힘으로 뺏을 수 없다는.”

“오. 그렇긴 하지. 하나, 그런 법이야 무시할 수 있는 집단이 있지 않으냐.”

“응?”

“이를테면 정령사 협회라던가, 또 정령사 협회라던가.”

“아, 거기! 말도 안 통하는 꼰대 집단!”

녹스의 구체적인 예시에 올리브는 쉽사리 넘어갔다.

심지어 그것들이라면 그럴 수 있다며 욕까지 해댔다.

누가 보면 올리브가 정령사 협회와 철천지원수라도 진 줄 알 거다.

녹스는 제 언변에 홀딱 넘어간 올리브를 가만히 보다가 레브란 아이에게 눈길을 옮겼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입 한번 떼지 않았으나 이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관찰을 위한 침묵이었다.

‘역시 만만한 놈이 아니야.’

이안 같은 노련함이 부족할 뿐이지 영민한 녀석이었다.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 태도만 봐도 알 만했다.

녹스와 눈이 마주치자 레브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상당히 정중했다.

마치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예를 차리더니 레브는 싱긋 미소를 내보였다.

“염원을 이뤘네, 이안.”

“염원?”

레브의 뜬금없는 서두를 이해하지 못한 이안이 되물었다.

“강해지겠다는 거 말이야. 정령이 강한 만큼 정령사도 강해지는 거니까.”

“아아.”

“그러니까 나중에 한 판 붙자. 내가 살살 봐주면서 할 테니까.”

레브가 자신감 넘치게 웃으며 곧장 이안의 어깨를 툭 쳤다.

이에 이안이 ‘봐주는 건 이 형님이시다.’라는 눈빛으로 응수했다.

누구도 먼저 눈을 떼는 법 없이 눈싸움이 이어졌다.

하여튼 허세에 쩔어선.

녹스가 ‘저것들 또 저런다.’란 낯빛으로 쳐다보자, 레브가 또다시 피식 웃었다.

멋쩍어서였다.

하지만 이내 레브는 그런 적 없다는 듯 얼른 표정을 바꾸곤, 올리브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안의 정령도 봤고, 올리브 그만 가자.”

“응? 가자고? 벌써?”

“봤으면 됐지, 혓바닥이 길면 잘린다는 거 몰라? 수련하러 가자.”

“으억.”

“미적거리지 말고. 피똥을 쌀 만큼 수련해도 등급이 오를까 말까인데 게으르긴.”

“꼭 그렇게 재수 없게 말을 해야겠수?”

“억울하면 페이라조 3성이 되시던가.”

“아오. 이 자식을 그냥.”

발광하는 올리브의 등을 레브가 팍팍 떠밀었다.

가차 없었다.

기어이 녀석을 방 밖으로 내몬 뒤에 문을 닫으려다가, 레브는 방안으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이안, 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네 비밀을 떠벌릴 생각도 없고.”

“하여간.”

“나라도 눈치가 빨라야 네가 덜 답답하지. 올리브 저거 봐라, 생각 없이 감탄만 하는 거.”

방 밖에서 ‘내가 뭐?’라고 반박하는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브의 투덜거림을 귓등으로 흘린 레브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따 수련할 때 보자.”

할 말을 끝낸 레브는 미련 없이 떠났다.

태풍이 몰아쳤다가 가버린 것 같았다.

뭔가 호로록 지나가 버린 사태에 녹스는 허탈해졌다.

“내 외모에 대한 칭찬은……? 내 잘남에 대한 찬양은……?”

* * *

이안은 수련을 위해 오랜만에 히오나스 호수를 찾았다.

레브를 비롯한 아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대련하는 사이.

“이안, 잘 봐.”

올리브가 건틀릿을 찬 팔로 호수의 수면을 거세게 내리쳤다.

촤악.

수면에 파동이 일며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 양이 얼마 되지는 않았다.

물보라가 크게 일어 흠뻑 젖었던 예전에 비한다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안은 확연히 보이는 올리브의 성취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오. 정밀도가 상당히 올랐는데.”

물이 튀지 않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원으로 치자면 원의 중간 지점, 아주 작은 점만 정확히 치면 된다.

그러면 타격을 가해도 반동이 크게 오지는 않는다.

무척 쉬워 보이지만, 이는 꽤 높은 정밀도를 요하는 작업이다.

이안이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기뻐하자, 올리브의 입가가 쭉 벌어졌다.

“어때? 대단하지?”

“대단하십니다.”

“캬캬캬. 노력 좀 했지. 저번에 가주님께서 말씀하셨잖아.”

“한 달 남짓한 시간 만에, 오올-.”

“발리올 가주님도 지금껏 하는 수련법이라니까 더 의욕이 나더라.”

“짜식, 배짱이 큰데?”

“응?”

“언젠가 발리올 가주님을 뛰어넘겠다, 뭐 그런 거 아냐?”

“캬캬캬. 남자가 돼서 그런 포부 정도는 있어야지.”

올리브는 열의 가득한 얼굴로 웃어젖혔다.

아무래도 호응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신이 난 모양이다.

“이안, 딱 기다려. 당장에 네가 날 형님이라 부를 만할 걸 보여줄 테니까.”

“후훗. 웬만해선 날 놀라게 할 수 없을 텐데?”

“두고 봐야 아는 거지.”

올리브가 자신만만하게 이를 드러내며 수면을 내리쳤다.

타격이 가해진 건 호숫가였다.

가장 바깥쪽, 그런데.

촤아아아앗.

물기둥이 일어난 건 호수의 정중앙이었다.

그것도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달아 물기둥 다섯 개가 일어났다.

물기둥들은 용솟음치다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물방울이 되어 땅으로 낙하했다.

때아닌 소낙비였다.

폭우가 그친지가 겨우 30분 전이었는데.

“어떠냐? 날 형님이라 부를만하지?”

그 비를 다 맞으면서도 올리브는 어깨춤을 둠칫둠칫 춰댔다.

아무래도 저 자식…… 로르의 잃어버린 핏줄이 아닌가 싶다.

하는 행동이 어쩜 저렇게 똑같은지.

이안은 바람 우산을 우아하게 쓴 채로 입술 끝을 올렸다.

“훗. 고작 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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