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07화 (107/214)

제107화

휘익. 휘이익.

익살스러운 이안의 입술 끝에서 미약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처음은 실바람 수준이었다.

하지만 물기둥에 이르렀을 때는 돌풍이 되어 기둥을 흔들어댔다.

그 반동에 물기둥이 맥없이 뜯겨 나갔고, 비산한 물방울들은 거북이 모양이 되었다.

빙글빙글 도는 거북이들.

그것들은 허공을 가르며 일제히 올리브에게로 날아갔다.

“형님 소리 들으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이안의 도발에 올리브 또한 다시 수면을 내리치며 공격을 가했다.

놀이처럼 하는 수련이었다.

‘수련’이라고 못 박으면 질릴 수도 있으니까.

엎치락뒤치락.

물기둥을 놓고 벌이는 공방전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물론 올리브는 다 젖어가고, 이안은 햇볕에 말린 이불처럼 여전히 뽀송뽀송했지만.

그 때문에 더 약이 오른 올리브가 원숭이처럼 날뛰었다.

약 먹은 미친 원숭이, 딱 그 짝이었다.

폭주한 채로 한참 수면을 쳐대더니…….

느닷없이 올리브가 약발이 다한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러나 싶어 이안이 빤히 쳐다보자, 올리브가 답하듯 입을 벙긋거렸다.

물론 다소 엉뚱한 서두였지만.

“근데 이안, 혹시 소식 아는 거 없어?”

“소식? 무슨 소식?”

“에이프릴 말이야. 외출계를 4일이나 썼다는데 아직 집에서 안 오네.”

“아.”

“무슨 일 생긴 건가?”

“……글쎄.”

이안은 눈가를 좁히며 물비늘 일어난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꼭 에이프릴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 * *

물비늘 일어난 해수면이 참 고즈넉했다.

파도도 그리 높게 일지 않았다.

중앙의 정자를 중심으로 난 십자 형태의 길, 지르콘 바닥을 적시는 파도의 포말 조차.

“하아.”

길게 심호흡한 에이프릴은 회랑 중앙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랑과 회랑으로 이어진 동그란 지붕의 건물들.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루하흐의 건물은 대체로 이런 수상가옥의 형태였다.

바다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는 일종의 본능 같은 것.

흔히들 루하흐를 ‘바다에서 태어나, 죽으면 바다로 돌아가는 자들.’이라고 일컫는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에이프릴은 ‘오빠’가 생각났다.

바다가 된 오빠가 이 슈튼하노버를 흐르고 있을까, 하여.

그렇다면 부디…….

에이프릴은 소금기 묻은 바다 냄새를 들이키며 가주의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집에 온 지 벌써 수일 째라 담판을 짓고 싶었다.

그래야 에루리안으로 하루빨리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굳게 마음먹은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괜한 고집부리지 말거라.”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보고 있던 슈튼하노버의 가주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만하면 철없는 반항은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보기엔 제 모든 행동이 그저 철없는 반항처럼만 보이는 건가요?”

“츠읏. 아비가 말하는데 말대꾸하지 말고.”

“…….”

“중앙에 갈 실력이 되면서 에루리안으로 간 네 행동은 눈감아주마.”

가주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자식과의 대화인데 곁눈질조차 없었다.

냉랭하다 못해 무정한 뒤태였다.

하지만 에이프릴에게는 가장 친숙하고 낯익은 모습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대체 왜 낳았나 싶게 관심이 없었고, 관심을 가질 땐 강압적이었다.

“그러니 아카데미는 관두고 얌전히 있다가 결혼하거라.”

“아버지!”

“아비 앞에서 큰 소리 내는 거 아니다.”

“하아. 어떻게 딸자식을 팔아치울 생각밖에 안 하세요!”

“아둔한 것. 네게 들어온 혼처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

“알죠. 너무 잘 알죠. 오빠를 배신하고, 오빠의 꿈을 짓밟은 개자식 중 하나가 있는 곳이잖아요.”

“에이프릴!”

가주의 화난 목소리 따위, 에이프릴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 귀가 막혀버렸다.

긴급 서신을 보냈길래 혹시나 아버지에게 일이 생겼을까 봐 급히 돌아온 참이었다.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비정해도 아비라고……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집에 오자마자 들은 말이 ‘결혼’이었다.

것도 오빠를 죽음으로 몰아간 살인자와 하란다.

기가 차서.

분노에 잠식된 에이프릴의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오빠의 사고조차 조용히 묻어버리시더니 어떻게!”

“그놈 얘기는 하지 말거라. 나약해 빠진 멍청한 놈 얘긴!”

“오빠가 죽은 걸 그저 나약으로……. 그렇담 저도 나약해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네요.”

“다시 말하마. 요청이 아니라 가주의 명이다. 결혼하거라.”

“제 나이는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저 열다섯이에요, 열다섯.”

“…….”

“이미 충분히 가지셨잖아요. 뭘 더 가지려고 그렇게 아득바득 방계 혈족과 혼맥을 맺으려고 하시는 건데요.”

“그 혼인이면 조금 더 중앙에 가까워질 수 있다. 루하흐 가주와 가까워지는 것이지.”

“여기서 뭘 더요. 사람들이 아버지를 뭐라 부르는지 진짜 모르세요?”

에이프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가주의 개’, 한 가문의 가주가 가지기에는 참 민망한 칭호 아니에요? 그렇게 불리면서 대체 뭘 더 움켜쥐려고.”

말을 거르지 않는 에이프릴은 신랄했다.

자식의 비난에도 가주는 일절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창밖에 요염한 정부라도 숨겨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금은보화의 산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저 밖만 보며 가주는 제가 해야 할 만만 딱딱하게 토해냈다.

“마지막으로 말하마. 내년에 결혼하거라.”

“……제가 죽으면 그리하세요. 뜻대로 할 수 있게 목매달아 드릴 테니까.”

에이프릴은 충혈된 눈으로 가주를 쏘아보았다.

이 순간까지도 아버지는 결코 저를 돌아보지 않는다.

암담한 절망감과 비참함에 입술을 깨문 에이프릴은 뒤돌아섰다.

기대할 게 없었다.

애정이란 게 손톱만큼이라도 있어야 목숨을 빌미로 한 협박도 먹히는 거다.

아마, 아비는 제가 죽으면 영혼결혼식이라도 시킬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이 짓눌러왔지만, 에이프릴은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비틀대는 발걸음을 붙든 채 집무실을 나설 뿐이었다.

.

.

.

에이프릴이 떠나고 십여 분이 지난 후였다.

끼이익.

집무실 한편의 문이 열리며 사십 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생김의 남자, 그는 노상 그리 해왔던 것처럼 곧장 가주에게로 직진했다.

“시간을 가지고 설득하지 그러나. 밀어붙이지만 말고.”

“설득? 설득한다고 먹힐 고집이 아니지. 이미 충분히 마음 추스를 시간을 줬는데, 아직도 저러지 않나.”

“흠. 루하흐 가주와 가깝고, 우리 쪽이 믿을 수 있는 자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저 아이를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안타까워하는 남자의 모습에 슈튼하노버 가주는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남자는 본디부터 인정이 많았다.

뜻을 이루기 위해선 때때로 비정해야 하지만 전혀 모질지 못했다.

그게 남자의 천성이라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거사를 위해선 약간만이라도 유약함을 덜어내면 좋으련만.

가주의 바라보는 시선이 길어지자, 남자 역시 슈튼하노버 가주를 쳐다보았다.

상대를 비추는 가주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로지 목표가 하나뿐이라서, 그래서 텅 비어 있었다.

아니지.

‘배신자를 루하흐의 수장직에서 끌어내리자.’만 들어차 있어, 되레 비어 보이는 거였다.

대개 하나의 열망만을 가진 자들이 그러지 않던가.

오죽하면 제 딸을, 제 아들을 죽인 자와 엮으려 할까.

그들의 일원이 되면 루하흐 가주와 수월히 만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희생이 아니네. ‘나의 주군’을 위한 충심일 뿐이지.”

“그렇긴 하네만…….”

“그것 말고는 어떤 무엇도 우선되어야 할 건 없다네.”

“하긴. 우리의 목적이 있는데, 괜한 연민을 드러내서 뭐 하겠는가. 따져야 할 건 저 아이가 루하흐 가주에게 가는 디딤돌이 되어 우리를 안내할 거라는 사실이지.”

“그러니 말을 보태지 말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으니 말일세.”

“그렇지. 시간이 갈수록 배신자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질 터.”

남자의 침중함에 슈튼하노버 가주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자식에게 미움받는 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에이프릴이 어떤 감정을 가졌든 그건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왜냐면 시간이 지체될수록 거사가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진정 두려운 것은 이것이었다.

배신자를 끌어내리지 못해 주군의 죽음을 달래지 못할까, 그게 무서웠다.

슈튼하노버의 가주인 그나, ‘서부 연합’의 한 축인 이 남자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대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으니 묘수를 짜보게.”

“내가? 후후. 슈튼하노버의 가주 씩이나 돼서 내게 일을 떠미는 건가?”

“자네를 만나고 일이 순탄하게 풀리고 있지 않나. 돌아가신 주군의 측근이어서 그런가.”

“그도 옛일이 됐지만…… 그대의 믿음에 답은 해야겠지. 머리를 쥐어짜 보겠네.”

“부탁함세.”

“그럼 일이 돌아가는 사정도 눈으로 봤겠다, 이만 수도로 돌아가야겠네.”

“조심하게. 배신자의 동태를 가까이서 살피는 자네는 언제든 위험해질 수 있으니 말일세.”

“알았으이. 슈튼하노버 그대도 조심하게.”

대화를 끝낸 남자는 가주의 집무실을 나섰다.

누구도 모르게 뒷문을 통해 슈튼하노버를 빠져나가는 그림자.

남자는 후미진 곳에 세워져 있는 마차에 은밀히 탔다.

보는 눈이 없어지고 마차 문이 닫히던 찰나, 언제 그랬냐는 듯 삽시간에 남자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한기에 주변이 얼 것 같았다.

이에도 개의치 않고 하인은 마차 문을 닫아주며 정중히 말했다.

“나라토르님, 에드레이 나일로 가겠습니다.”

“그리해라. 수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터이니 지체할 순 없지.”

남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인은 고개를 숙이곤 마부석에 올랐다.

푸히힝.

투레질한 말이 움직이자 이내 마차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짜증 나는 일이군. 인간과 섞여 부대껴야 하는 건.”

남자는 뜻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이 스치고 난 자리에 남은 남자의 얼굴이……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사십 줄에서 이십 대로.

흔하고 평범해서 기억도 안 나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아름다운 외양으로 변모해있었다.

성별을 떠나 진심으로 찬탄이 나오는 외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동공에는…… 자색 연꽃 문양이 선연하게 새겨져 있었다.

* * *

“흐음.”

이안은 서신을 읽다 말고 눈썹을 꿈틀했다.

서신엔 동공이 특이한 남자에 관한 정보가 한가득 적혀 있었다.

“루하흐 가주가 가장 신임하는 자란 말이지.”

[예상은 했다만, 주에 두 번 이상 독대하는 걸 보면 보통 신임이 아니다.]

녹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서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빛만으로 종이를 태워버릴 것처럼 이글거렸다.

[게다가 독대할 땐 종일 붙어 있다지?]

“그때마다 루하흐 가주에게 ‘분홍산호 가루’를 공급한다는데, 그건…….”

[아편의 일종 아니냐.]

“인간에게는 그런 작용을 하지. 정령에게는 그저 산호 가루일 뿐인데.”

이안의 부연 설명에 녹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남자, 영 구리다. 살리카 가주와도 한 다리 걸쳐 있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지. 슈튼하노버 쪽에도 엮여있는데.”

[흐음.]

“게다가 더 묘한 건 이거야.”

이안은 서신의 어느 부분을 가리켰다.

《수상쩍은 이 남자의 행적은 항상 에드레이 나일에서 끊깁니다. 그곳은 명분 없이 발을 들이밀기 힘든…….》

“거긴 치외법권 지역인데.”

[해서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지 않누.]

“흠. 남자의 정체가 에드레이 나일에 사는 바다 엘프라니……. 생각도 못 했네.”

이안의 뇌까림에 덧대듯 녹스가 콧김을 슉슉 뿜어댔다.

[아니, 그것들은 안 끼는 데가 없네. 예언서도 그렇고, 시간의 서도 그렇고. 천년 넘게 에드레이 나일을 벗어나지 않던 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바다 엘프는 방관자들인데 이런 식으로 계속…….”

바다 엘프가 누구던가.

루하흐가 에드레이 나일에 터전을 잡기 전부터 살고 있던 토박이들이다.

명실상부한 바다의 패자이자, 황제조차 동등한 위치에서 대하는 유일한 종족이다.

이 때문일까.

바다 엘프는 인간의 일에 지독히도 무관심했다.

지난 생만 해도 그랬다.

전쟁에 휩싸여 제국이 아비규환이 되었을 때도 전혀 미동 없던 그들이었다.

산처럼 쌓인 시체 역시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시체의 핏물이 그들의 영역인 에드레이 나일을 벌겋게 물들여도 마찬가지였다.

지독한 무심함이 특질인 자들.

해서 이안은 바다 엘프를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었다.

“무튼 살리카와 엮인 건 사실이니, 남자의 동태를 계속 살펴봐야겠다.”

[그래, 그러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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