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이안과 녹스가 서신을 두고 속닥거리던 그 시각.
은발에 동공이 탁색인 한 남자가 그라나토스 북쪽을 서성거렸다.
말로의 탑 지척에서부터 북쪽 관리자인 루체의 영역이 있는 곳까지.
무언가를 탐색하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주의 깊게도 살폈다.
그런 염탐꾼의 주변.
[주인의 냄새가 난다. ‘옛 주인’의 냄새가.]
[그리운 냄새야.]
[꺄르르. 은발이다, 옛 주인과 똑같은 은발.]
[응. ……응? 아니야. 똑같지 않아. 이 자는 가짜야.]
[맞아. 만들어진 은발이라 낙엽 썩는 냄새가 나.]
그라나토스의 정령들이 남자를 따라다니며 속살거렸다.
‘정령어’로 나누는 대화라 정령 외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물론 알아들었다 해도 관심을 가졌을까 싶게 남자의 얼굴은 지독한 무표정이었다.
흡사 잘 만들어진 인형 같달까.
정령들은 숨 쉬는 것으로 사람임을 증명하는 남자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그런데 이 인간의 냄새…… 뭔가 익숙하지 않아?]
[익숙하다. 항상 주인과 함께 오는 자의 냄새가 이랬어.]
[그러네. 그러고 보니 주인은 그를 ‘레와티움’이라고 불렀어.]
[레와티움, 레와티움.]
정령들이 남자의 주변부를 빙빙 맴돌던 그때였다.
소리 없는 걸음으로 남쪽에서 나타난 또 다른 은발이 남자에게로 다가왔다.
새로운 인물은 스물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자 손짓을 하며 수어(手語)로 얘기했다.
배에서 목 쪽으로 양손을 들어 올려 떼는 서두.
‘남쪽’이란 말이었다.
극도로 조심하는 손짓에는 경계가 극심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은 옆에서 너울대는 정령들은 개의치 않았다.
무관심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히에로스에선 지천에 깔린 게 정령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냐면.
길을 가다 잠시 쉴까 해서 그루터기에 앉았는데 그게 정령이더라, 하는 우스갯소리가 떠돌 정도로 많다.
굳이 결속하지 않아도 쉬이 볼 수 있다는 뜻.
특히 작은 점, 지렁이 같은 실선, 평평한 면 등 근원에 가까운 형태는 언제나 공중을 떠돌아서 마치 공기와 같이 여겨졌다.
그러니 두 사람의 반응은 당연한 걸지도.
관심받지 못한 정령들이 연신 폴짝거리며 조잘거림을 이어갔다.
[여자 레와티움이 남쪽을 탐색하고 왔어. 남쪽을.]
[남쪽 관리자의 둥지까지 가는 걸 내가 따라갔다 왔다.]
[레와티움이 또 있다. 서쪽과 동쪽에도.]
[뭐 하는 거지? 왜 관리자들의 영역을 정탐하는 거지?]
[더 수상한 건 따로 있어. 말로의 탑 주변에 정령서를 심었다는 거.]
[꺄르르. 술식을 심으려면 수호자의 힘이 필요한데.]
[그럼 수호자하고 옛 주인은 왜 안 보이는 거지?]
정령들의 호기심이 부쩍 자랄 즈음 다른 레와티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모습이 똑같았다.
동공이 없는 은색 눈동자를 무감하게 흘리며 그들 모두 수어를 했다.
몇 마디를 나눈 후.
충분한 조사를 했다 여긴 모양인지 레와티움들은 그라나토스를 벗어났다.
몸놀림이 사뿐했다.
다른 카르디아처럼 숲의 밀도에 힘들어하거나 숨 차 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 * *
“숲이…… 소란스럽네.”
이안은 수련을 끝내고 종탑을 나오다 시선을 그라나토스에 두었다.
늘 적막하던 숲이 일다가 이지러지길 반복했다.
흔들리는 녹음을 보며 녹스가 콧구멍을 크게 벌름거렸다.
[언제는 조용했었누. 네가 ‘주인’이 되고부터는 언제나 저렇다.]
“그래서 숲의 정령들은 더 좋아하던데.”
실없는 말을 나누며 이안은 숲의 속삭임을 주워들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들떠 있었다.
어지간히 할 말이 많은가 보다.
하여튼 수다쟁이들이란 생각을 하며 이안이 온실로 향했을 때였다.
“이안.”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안의 걸음을 흔들며 밀려들어 왔다.
“에이프릴.”
이안은 반색을 하려다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집에서 돌아온 에이프릴의 낯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잘 다녀왔어? 생각보다 본가에 오래 머물러 있었네.”
“응.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
힘없이 웃은 에이프릴이 고개를 내려트렸다.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
처연한 그 모습에 이안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간신히 편안하게 웃게 된 것이 엊그제인데…….
단 며칠 사이에 곧 죽을 것 같은 몰골이라 이안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아무래도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보기는 그른 것 같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감시자까지 붙어있는 거지?’
이안은 에이프릴과 그녀의 뒤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여자만 있었을까.
여자의 뒤로 넷의 감시자가 더 붙어있었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에이프릴을 보는 눈빛들이 불손했다.
가주의 딸, 제가 모셔야 할 자로 보는 게 아니라 오직 감시 대상으로만 여기는 시선.
그 시선이 불쾌해서 이안은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살가죽을 찢는 사나운 바람이 감시자의 눈을 으깨버릴 듯이 스쳤다.
섬찟한 위협에 감시자가 눈을 다급히 내리깔았다.
그 꼴을 보니, 그제야 속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이안은 오만한 낯을 하고선 감시자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감시자의 눈뿐 아니라 고개까지 아래로 수그러졌다.
“너, 이름이 뭐지?”
“……세르비 메르빙거입니다.”
“메르빙거라면 슈튼하노버를 호위하는 가문이군.”
“예.”
“정복에 구름 문양이 세 개인 걸 보니 호위 단장인가.”
“그렇습니다.”
“알았다. 그대의 직무가 무엇인지는. 하나 지금은 물러나라, 메르빙거.”
“하지만…….”
“다시 말하지 않겠다. 너에 관해 물었던 건 명을 내리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니.”
“하나 저희 가주님께서 아가씨의 곁에…….”
“내가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자비는 여기까지다, 메르빙거.”
“…….”
이안이 보내오는 서늘한 경고에 감시자가 몸을 움찔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덜미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섬뜩했다.
……어느 때나 자신의 주군이 내린 명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다른 일족이라도 이안은 직계였고, 그 직계의 명을 무턱대고 어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타협할 수밖에.
입술을 깨문 감시자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멀찍이 떨어지긴 했는데, 자리를 잡은 게 워프 게이트 앞이었다.
마치 에이프릴이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구는 모양새였다.
이안은 감시자의 행태에 눈가를 굳혔다.
어쩐지 돌아가는 꼴이 영…….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해서 이안은 찌푸려진 눈가를 펴며 에이프릴에게 차분히 말을 건넸다.
“에이프릴, 일단 거기 가서 얘기하자.”
“거기? ……아.”
“거기만큼 말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곳은 없으니까.”
* * *
인기척이 도는 밀실에는 먼지가 한 톨도 없었다.
계속 누군가가 드나들었다는 의미였다.
이안은 한쪽 의자를 빼놓고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 봐.”
“그게…….”
에이프릴은 깨끗한 탁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한숨으로 탁자도 부수겠다.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에이프릴이 고개를 들어 이안을 쳐다보았다.
뭔가 결심이 선 듯싶었다.
이내 에이프릴은 머뭇거림을 접고 고운 입술을 뗐다.
그간 있었던 일과 아버지가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결혼에 대해서.
그러고는 말의 끄트머리에 또다시 날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안 너밖에 상의할 사람이 없더라.”
“너는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지?”
“응.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 그놈과 한 공간에 있다고 가정만 해도.”
화가 가시지 않는지 에이프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화만 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하여 에이프릴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연신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내가 에루리안에 온 것도 애초에 아버지를 피해서였는데…….”
“오빠가 죽고 나서지?”
“응. 오빠가 죽은 지 한 달도 안 돼서 결혼 얘기를 꺼내시더라.”
“슈튼하노버 가주가 결혼을 밀어붙인다……?”
이안이 뭔가를 생각하며 팔짱 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던 에이프릴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우리 아버지가 웃기지. 권력욕에 미쳐 자식을 파는 아비잖아.”
“…….”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오죽할까.”
“글쎄. 사람이 극단적이라면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사실…….”
이안의 말에 에이프릴은 뭔가가 떠오른 듯 귀밑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러고 보면…… 열 달 전 그때는 분명 달랐었다.
결혼이란 단어를 처음 꺼내 들었을 때는.
그때 아버지의 표정과 말투는 분명, 어딘가 침잠한 기색이 엿보였었다.
“내 짐작이지만 이 결혼의 의미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
“의미?”
“아버지가 직접 언급한 적은 없어서 정확한 건 아냐. 근데…….”
에이프릴은 무척 오래된 기억까지 헤집어보았다.
그날들 속에서 아버지는 대개 집무실에 붙박여 살았었다.
절대로 자식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던 곳.
차가운 집무실에서 아버지는 항상 세상에 있는 일은 혼자 다 하는 것처럼 분주했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그 집무실에 누군가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언제나 뒷문을 통해 오고 은밀한 말들을 나누다 또 몰래 떠나는 손님들.
그로 미루어 보아 뭔가가 있다는 건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생의 전부가 아닐까.
그것이 아마 가주의 개로 불리는 아버지의 본 모습일 테지.
“욕심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 어떤 이유로도 네 결혼이 정당화될 순 없어. 에이프릴 네 선택이 아니니까.”
“…….”
이안의 단정에 에이프릴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오묘해졌다.
선택…….
아마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짓눌릴 것 같은 답답함을 안고 이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말을 해줄 걸 알았던 것이리라.
그래서일까.
지금처럼 이안과 있으면 ‘나만의 생’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들끓는다.
그냥 그랬다.
이안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먼저 묻는 그 모습이 언제나 마음을 술렁이도록 만들었다.
에이프릴은 왠지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볼을 슬쩍 문질렀다.
“나는 ‘나’로 살고 싶어. 설령 아버지에게 어떤 뜻이 있대도.”
“그러니까 가주의 결정을 거부할 명분이 필요하단 거지?”
“응.”
에이프릴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버지의 생을 위해 자신을 죽이며 살고 싶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확고한 뜻을 담은 그녀의 눈동자가 이안을 똑바로 직시했다.
흔들림 없는 푸른 동공에 이안은 터지는 숨을 혀끝으로 밀어 넣었다.
“흠. 현재로선 가주의 결정을 뒤집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데.”
“그런 것 같아. 명분도 가주의 명보다 우선할 수 없는 게 가문의 일이잖아.”
“낙관적이지가 않네.”
두 사람은 뾰족한 방도가 없는 것 같아 잠시 고심했다.
지하 공간을 표표히 흐르는 침묵이 먼지처럼 쌓여갔을 즈음이었다.
뭔가가 떠오른 듯 이안이 느릿하게 입을 뗐다.